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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불신법정 송사의 역사-예장 고신 교단을 중심으로(3)
신재철 교수의 한국교회사 논단
2021년 03월 29일 (월) 11:45:40 신재철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신재철 교수/ 인천초원교회 담임, 철학박사, 부산외대 교수

   
▲ 신재철 교수

2) 고신 교단 초기 지도자들의 소송 관과 그 영향

(2) 박윤선의 소송 불가론

한상동의 건덕론과 송상석의 소송정당론 사이의 괴리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르게 정립할 대안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서 고려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의 소송불가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박윤선은 당시 논의되던 송사 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논설, “송상석 목사의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에 대한 박윤선 목사의 답”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글을 <파수꾼>에 발표하였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단언하고 소송 불가론을 주장하였다.

박윤선의 소송 불가론은 불신법정 소송문제에 대한 성경 신학적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문제는 덕의 문제에 앞서 분명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윤선은 처음부터 교회 건물문제로 타 교파 신자들을 걸어 소송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1953년 영도교회에서 모인 노회 임사부에서, 신자가 부득이한 경우에 불신자를 걸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나, “신자가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 박윤선은 그런 쟁의는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는 그런 것을 불신법정에서 판단받으려고 내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그런 불의는 기독인들 가운데서 없어졌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윤선은 비록 총회 측에서 불신법정 소송을 제기했다 하더라도 이에 맞대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위배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모든 재산을 양도하더라도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신자가 신자를 걸어 불신 세상 법정에서 소송할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신자가 불신자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음을 막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2 만약 신자끼리의 쟁의에서 불신법정에 가서 판단을 구한다면 그것은, 신자들(교회)의 위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며,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불신자들 앞에 폭로시켜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이라고 하였다.3

   
 

박윤선이 앞서 지적한 한상동, 송상석과는 달리,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 문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비록 재산상에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성경적인 지침을 따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중심의 신앙과 삶을 고취시켜 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고신교단의 신학과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 유지하는 데 유효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박윤선은 불신법정 소송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소송 불가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교단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상동, 송상석 사이에서 자신의 신앙적, 신학적,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여타의 이유들과 맞물려 교단을 떠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4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교단의 지도자인 한상동과 송상석이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교단 내 교회들도 양측의 입장에 따라 양분되어 갔다. 비록 신학자인 박윤선이 성경에 근거한 원칙적인 입장을 천명했을지라도, 교단의 상황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송상석이 한상동의 처신과는 달리 불신법정 소송에 대해 맞대응했을 때, 한상동은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불가하다는 결론을 가지고 조언하거나 교훈하지 않았다. 이는 과연 그가 성경적인 입장에서 ‘불신법정 소송 불가’의 확신을 가지고 초량교회를 명도했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후일 1970년대에 고신교단 내부에서 소송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한상동 측에서 송상석 측을 고소하였다. 한상동은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불가하다는 성경적인 확신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건덕론에 의해 소송을 피했어야 했다. 따라서 송사 건에 대한 한상동의 견해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존한다.
 

3) 고신교단 내분시기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고신교단은 박윤선이 불신법정 소송문제를 반대하다가 1960년에 고신교단을 떠난 이후에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좌시하여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정립하지 못한 채 심각한 교단 내홍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초 소송문제로 수 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고신교단 형성과 더불어 배태되었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고신교단 내부의 문제로 확산되었다. 또한 한상동과 송상석을 중심으로 하는 각 계파의 교권 투쟁으로 비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한상동 측에서도 이런 송상석의 의중을 살펴 적절한 지도력 배분 등의 아량이 필요했지만, 독선적인 구도가 서서히 부상하게 되면서 불신법정소송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부산의 고려신학교 주변과 송상석을 중심으로 한 경남노회 사이에는 늘 긴장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교권장악을 위한 시도로 비쳐졌다.5 이때부터 한상동과 송상석은 이전의 협력이나 화합의 관계가 아닌, 대립의 관계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소송문제는 예배당 명도 소송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교단 분열까지 예고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고신교단 초창기에 있었던 법정소송은 한국장로교단 분열 시기로서 교단 대 교단 간의 문제였으므로 교회 정치 구조 속에서 상급치리기관에 상소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1970년대의 소송 건은 동일교단 내부의 문제였다. 또한 전자의 소송 건은 민사 소송이었으나, 후자는 구속력이 수반되는 형사소송 건이었다. 아울러 고려파 초창기의 소송은 당시로서는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한 교회와 신도들 간의 소송이었으나, 후자의 경우는 동일한 치리회에 속한 성도들 간의 문제였다. 따라서 1970년대의 소송은 믿는 형제간에 벌어진 불신 법정 소송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기한 것처럼, 송상석이 교단 설립 시기에 한상동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한상동도 그가 법통임을 알아 상호 협조적 견지를 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학장과 이사장으로서 혹은 교단 지도자로서 양자가 교단의 장래를 숙고하면서 대화를 통한 합의점을 도출했다면 장차 일어날 비극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6
 

4) 고신교단 23회 총회 결의와 제24회 총회의 번복

이상에서 고찰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총회의 입장과 태도는 대단히 중요했다. 제23회 총회가 소송 문제를 두고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73년 9월 20일에 제23회 총회가 송상석이 시무하던 마산 제일문창교회당에서 개회되어 불신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던 윤은조가 교단 문제로 형사소송을 제기한 데 대해 총회 앞에서 사과했고,7 총회는 이 소송문제에 대해 해결점을 찾기 위해 위원 5인8을 선정하였고, 위원회의 결의문을 수용하였다.9

이런 과정 속에서 총회는 ‘신자 간의 불신법정에서의 소송’은 바람직하지 않고, 다시 재론하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당시 고신교단에서 총회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던 불신법정 소송 문제는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정확한 연구와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신교단은 성경적 결론이 분명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1974년 9월 19일부터 25일까지 부산남교회당에서 진행된 제24회 총회에서는 제23회 총회 결의를 번복하여 성도 간에도 불신법정에 고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번복이 바로 고신 교단 반고소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교단 제23회 총회의 ‘소송불가 원칙’을 “소송 남용 금지 차원으로 수정하자”는 동의가 성립되어 당시 목사 총대 64명, 장로 총대 64명, 도합 128명 중 투표에 응한 총대 표 중 가 72표, 부 7표, 기권 1표로 동의가 가결되었다.10 불과 1년 만에 이 문제를 투표에 부쳐 경남노회 32명의 총대 중 퇴장한 20명의 총대와11 경기노회 10명과 경동노회 6명의 총대를 제외하더라도, 절대다수가 소송 불가가 아닌 소송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한 회기 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당시 총대들이 소송 가능에 투표할 수 있도록 사전에 교단 정치가 작용했다. 총대들 대부분의 정서는 불신법정 소송 불가가 성경적이라는 데 공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송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투표한 것은 교단 정치가 개입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총대들이 한상동이냐 송상석이냐의 갈림길에서 교단을 살리는 길은 출옥 인사인 한상동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반영되었다. 분명한 것은 한상동 측이 1년 동안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배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송상석 측과 고신 교수진과의 불화와 고신 교수들이 쓴 논문을 철회할 수 없는 입장 때문이었다.12

비록 제24회 총회는 소송 가능으로 결론지었지만, 총대들 가운데는 소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신법정 소송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선택한 것은 교단을 어려움에서 구하기 위해 성경원리보다는 현실을 추구한 것이다. 이 결의는 소송이 가능한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시하고 있지 않아 본래 취지와는 반대로 소송이 남용되기 쉬운 결과를 낳았다.

총회 측은 송상석을 중징계함으로써 문제를 확대시켰을 뿐 아니라 교단 분열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했다. 제24회 총회의 결정은 총회 측에서 송상석을 세상 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합법화한 것이었고, 그런 견지에서 교회법으로 송상석을 치리하여 정치적 타격을 주고자 했다. 송상석을 포함한 마산 측 총대 10명(송상석, 이기진, 권성문, 박장실, 김해룡, 송명규, 정판술, 서봉덕, 현기택, 박기창)을 3년간(1974. 9. 23-1977. 9. 22) 총회 총대 피선거권(총회 산하 각 노회 포함)을 박탈하고, 노회(총회 산하 각 노회 포함) 임원 피선거권을 정지하였다.13 아울러 송상석은 경북노회의 건의와14 총회 특별재판국의 재판으로15 1974년 12월 4일 ‘목사 면직’이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되었다. 경북노회가 발의한 송상석의 징계 건은 원고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였고, 기소위원 전성도와 한학수 이름으로 기소되었다. 피고는 경남노회를 소속 치리회로 둔 송상석이었다. 이 건은 ‘송상석 목사의 비행 처리 건’이라는 제목으로 상정되었고,16 특별재판국장은 민영환, 서기는 신현국, 국원은 강호준, 심군식, 박은팔, 김수복, 변종수, 손기홍, 조인태였다. 그 죄목은 ‘총회 결정에 불복종(법적 이사장 문제)’, ‘문서 위조’, ‘거짓 증거’, ‘공금 유용’ 등이었고 죄증 설명서가 첨부되었다.17

당시의 총회는 송상석과 그의 측근만 제거하면 논란 중이었던 소송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교단도 한상동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전진해 갈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경남노회는 송상석의 면직에 대한 총회 재판국 지시에 대한 결의를 통고받고 1974년 12월 16일에 임시노회를 열어 그 통고서를 거부, 반려하였다.18 이에 대해 총회 측은 1975년 5월에 총회 지시를 순종하는 노회원을 중심으로 경남노회를 계승하는 별도의 노회를 조직하였다. 총회는 기존의 경남노회원들이 제25회 총회에 참석고자 했으나 호명하지 않았고, 계승노회의 총대만 받아들였다.19 그리하여 기존의 경남노회 총대들은 9월 26일 ‘총회가 정상화하기까지’ 행정 보류를 선언하게 되었다.20 총회는 이 행정 보류를 ‘본 교단을 이탈한 행동’으로 규정하였다.21 이로 인해 송상석과 측근들은 고신 교단을 떠나 표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세칭 ‘송파’로 분류되었다.22

 

주(註)

1. 박윤선, “송상석 목사의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파수꾼」 제63,64호)에 대한 박윤선 목사의 답,” 「파수꾼」 제65호, 31.
2. 박윤선, “송상석 목사의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파수꾼」 제63,64호)에 대한 박윤선 목사의 답,” 31.
3. 박윤선, 『고린도전서』 (서울: 영음사, 1980), 80-81.
4. 심군식, 『박윤선 목사의 생애』 (서울: 영문, 1996), 159, 181;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278.
5. 남영환, 『한국 기독교 교단사-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492.
6.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역사편찬위원회, 『한국 장로교사』, 494 참조.
7.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역사편찬위원회, 29. “윤은조 장로가 교단 문제로 형사 소송을 제기한 데 대해 총회 앞에 사과하다.”
8. 김경래, 박은팔, 류윤욱, 이경석, 손명복.
9.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3회 총회록(1973)」, 30-31.
1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4회 총회록(1974)」, 23.
11.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4회 총회록(1974)」, 23.
12. 고려(반고소)역사편찬위원회, 『고려(반고소) 25년사』 (서울: 경향문화사, 2003), 89; 조긍천과 필자의 인터뷰(2005. 5. 4); 김경래와 필자의 인터뷰(2005. 6. 26); 이금조와 필자의 인터뷰(2005. 6. 11).
1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4회 총회록 부록(1974)」, 24.
1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4회 총회록 부록(1974)」, 14.
15.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158-174.
16. 오병세, 『경북노회 30년의 회고와 전망』 (1983), 15.
17.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영문, 2008), 209;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5회 총회록 부록(1975)」, 67.
18.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175.
19.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역사편찬위원회, 『한국 장로교사』, 497-498.
20.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183.
21.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제25회 총회록 부록(1975)」, 23.
22. 고려(반고소)역사편찬위원회, 『고려(반고소) 25년사』, 140; 하찬권과 필자의 면담(200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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