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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불신법정 소송의 역사(2)-예장 고신 교단을 중심으로
신재철 교수의 한국교회사 논단
2021년 03월 22일 (월) 11:43:50 신재철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신재철 교수/ 인천초원교회 담임, 철학박사, 부산외대 교수
 

   
▲ 신재철 교수

1) 고신교단 태동기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1901년에 평양에 최초로 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독노회가 1912년에는 총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을 받은 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분열을 경험했다.

출옥 성도인 한상동과 주남선을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를 중심으로 결집한 교회와 목사들은 결국 1952년에 별도의 노회를 결성하고 1956년에는 총회를 설립하여 오늘의 고신교단이 출범되었다. 고신교단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에서, 신앙적으로는 신사 참배를 한 무리에게서 분리하였다. 나아가 해방 후의 교회쇄신 운동에 장애가 되는 자들과도 분리하였다. 이런 점들이 중요한 설립근거가 되었다.

1938년에 기존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한 후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하고1, 그 후 1940년에는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신학교는 천황숭배를 용인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이들은 일제와 타협했을 뿐 아니라 총독부가 교회를 통폐합시키는 데도 전력을 다해 협력했다.2 더욱이 이 학교가 해방 이후 남부 총회에 의해 직영 신학교로 결정되면서 총회적인 큰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가 결국 고신교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조와 전초기지가 되었다.

고신 교단 설립의 주역인 한상동 목사는 1892년에 부산에 설립된 전통 있는 초량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로 1946년 7월에 부임하여 51년 10월까지 시무하였다.3 이때 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경남법통노회가 자의든 타의든 전기힌 이유 등으로 기존의 총회와 분리되면서 피차간 내재되었던 재산권에 대한 불씨가 가시화되었다. 총회는 분리되어 나간다고 인식한 경남법통노회 측의 교회를 선별하여 예배당 명도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총회 측에서는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축출된 지 약 3개월 후인 1951년 9월 8일 한상동에게 그가 시무하는 부산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하였다. 당시 초량교회는 약 500명의 신도가 회집하는 경남 지방의 유력한 교회였다. 총회는 한상동이 경남(법통)노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때문에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나가라고 요구했다.4 이 당시 교회당 명도를 요구받은 교회는 초량교회 외에도 마산 문창교회, 거창읍교회 등 경남 지방의 6개처 교회였다. 당시 초량교회는 90% 이상의 성도들이 한상동과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한상동이 교회의 화평과 건덕을 이유로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삼일교회를 개척해 나갔을 때는 장로 7인 중 1인, 성도들은 약 60% 정도만 함께했다.

총회로부터 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가피한 요소가 있었다. 총회 측에서는 한상동을 추종하는 교회가 의외로 많고 나름대로 재산을 보유한 교회가 많게 되자 재산권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총회는 비록 결별의 수순을 밟는다손 치더라도 총회 소유라고 생각한 재산권을 결별한 사람들에게 순순히 내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상동을 추종하여 분리의 노선을 택했던 세력들은 예배당 명도 소송과 같은 재산권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2) 고신 교단 초기 지도자들의 소송 관과 그 영향

고신 교단의 초기에 한상동은 신앙, 송상석은 행정, 박윤선은 신학적인 면에서 중요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기존 총회에서 행한 예배당 명도 소송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대단히 중요했다. 한상동의 경우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개척함으로 외형상 건덕의 모습을 취했다 하지만 송상석은 송사정당론의 입장이었고 박윤선은 송사 불가론의 입장이었다.

(1) 송상석의 소송 정당론

한상동이 건덕상의 이유로 조건 없이 초량교회를 명도하게 되자, 총회를 이탈하여 고신 교단에 합류한 교회들과 명도 소송을 당한 교회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송상석은 송사가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송사를 진행하였다. 송상석은 건덕과 예배당 명도 문제는 분명히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5 건덕의 문제와 예배당 명도 건은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여 소송정당론을 주창하였다.6 송상석은 많은 점에서 한상동의 지도력을 신뢰했으나, 예배당 명도 건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송상석은 교회 재산은 ‘교인의 총유’라고 생각했다.7 그는 법치 국가에서 법적으로 자기 재산을 보호받는 것이 신법(信法)에서도 정당하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성도들이 교단을 옮기게 될 경우, 그 성도들이 헌금을 드려 지은 예배당과 기타 재산도 일정 부분 동반되어야 하며, 그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송상석은 교회 재산권이 내포하는 교단의 외적 위상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보았다. 따라서 한상동이 당시 교단의 중추적 위치에 있었던 초량교회당을 순순히 내어준 일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교회에 속한 재산을 순순히 내어 줄 경우, 교단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위기감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송상석은 총회 측의 예배당 명도 소송에 대응하여 교회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주저 없이 소송정당론을 제기하고 응소했던 것이다.8 송상석의 입장은 그 후 교단 내의 불신법정 소송문제에 있어서 논란의 빌미가 되었다.

경남법통 내에는 교회 재산 소송 건에 대한 건덕론과 정당론이 대립하면서 긴장 기류를 형성하였다. 비록 한상동이 불신법정 소송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건덕상 처신했다 하더라도, 외면적으로 보면 성경적인 결정이자 모범적인 처신으로 간주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창교회에서 소송문제를 제기한 송상석은 ‘응소하여 교회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교리적,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을 시종일관 강변하였다.9 이런 송상석의 현실론에도 무게가 실리면서 고신 교단 내에는 교단형성 초기부터 불신법정 소송 문제로 한상동 측과 송상석 측의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한상동은 자신은 그런 처신을 했지만, 송상석의 처신이 오히려 교단의 재산을 지켜줄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 처음부터 송상석을 반대 세력으로 내몰지는 않았다.

남영환은 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책 《한국 기독교 교단사》에서 송상석의 소송 정당론으로 교단의 재산을 수호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울러 많은 상처도 남겼다고 평가했다.10 그러나 오히려 고신 측은 소송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명분과 실리적인 유익의 갈림길에서 송상석의 현실적인 대처를 통해 재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당시 초량교회는 쉽게 명도했지만, 교인들이 일치단결했던 영도교회의 경우 송사를 감행한 기존총회의 요구를 압도하였다.11 이런 과정에서 고신 교단은 일치된 견해를 가지지 못했지만, 송상석이 전방에 서서 재산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 준 일에 대해 내심 동의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주(註)

1. 총신대학교100년사 편찬위원회, 『총신대학교 100년사 제1권(역사 편)』 (서울: 총신대학교, 2003), 409.
2. B. Hunt, “Trials Within and Without”, The Presbyterian Guardian, 29(Feb. 1960), 38. 이 일에 대하여 김영재는 “신학의 자유를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팔아먹었다”라고 평가한다.
3. 초량교회80년사 편찬위원회, 『초량교회 80년사』 (부산: 대한예수교장로회 초량교회, 1972), 139.
4. 오병세, “진리의 파수자로서의 한상동 목사,” 「고신대 학보」(1977.2.19.)
5. 송상석, “교회 소송 사건 재검토(2)” 「파수꾼」 제64호(1957.7.)
6.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서울: SFC출판부, 2006), 152.
7. 남영환, 『한국 기독교 교단사-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서울: 영문, 1995), 386. 송상석의 이러한 견해는 후일 대법원 판례에 영향을 주었고, 그 후 교회 분규에 따른 재산 건 논쟁에서 ‘교회 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이라는 판례가 중시되어 왔다.
8.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44.
9. 송상석, “교회의 소송 문제 재검토,” 「파수꾼」 제63호(1957. 6), 61; 송상석, “교회 소송 사건 재검토(2),” 41; 송상석, “교회 소송 문제에 대한 재검토,” 「파수꾼」 제66호(1957. 9), 47.
10. 남영환, 『한국 기독교 교단사-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386.
11.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역사편찬위원회, 『한국 장로교사』 (부산: 고신출판사, 2002),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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