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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영성(1)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2021년 03월 05일 (금) 14:44:37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이사야의 부르심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가야야 할 참 영성의 길을 배울 수 있다. 그는 주전 770년경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던 왕족 출신으로 화려하고 풍족한 귀족 생활을 버리고 그의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말씀을 증거 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살다가 그를 미워하는 무리에 의해서 톱으로 잘리는 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사야가 이렇게 살게 되었던 것은 스스로 결단은 아니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사야 6장에는 그가 부르심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종교적인 수행의 열매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귀족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약간은 편하게 그리고 조금은 화려하게 귀족의 품위를 적당히 유지하면서 안락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면 우리는 아마 그를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고 기억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이사야의 영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어느 날 거룩하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만났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결과로 주어진다. 하나님을 만난 감격 없는 영성은 모조품에 불과하다. 그가 성전에 올라갔었을 때 유다는 역사적으로 매우 어려운 혼돈의 시대를 직면하고 있었다. 지난 52년간 백성들에게 비교적 존경을 받아 온 유다의 왕 웃시야가 죽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력은 탁월하였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나라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서 유다의 국력은 급속히 쇠하고 나라는 혼란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슬픔에 잠긴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엎드렸다. 위기의 때에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성전에서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성전에서 보았던 것은 너무 놀라운 광경이었던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그를 온통 사로잡으면서 그는 깊은 감동으로 소리 지르게 되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사6:1)

그는 거기서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웃시야 왕은 유대 땅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다윗과 솔로몬 버금가는 나라의 힘을 키웠던 왕이었다. 그러나 한때 그 명성과 힘을 자랑하던 그도 이제는 자신의 보좌를 비어야 했던 것이다. 웃시야라는 한 인간의 생이 끝나고 그의 보좌는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극적인 대조를 만나게 된다. 웃시야의 보좌가 사라지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가 클로즈업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아 보였던 웃시야의 보좌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곳에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끝나는 곳에

인간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또한 하나님은 한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 그곳을 떠나 어디론가 피해 계시거나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혼란스러운 세상 그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유대 땅을 다스리시며, 온 세상이 그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관심의 대상이며, 만물이 그의 주권을 따라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의 여건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날 때 시작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기독교인의 영성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주권적 통치를 새롭게 경험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깨어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일상 속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이 영성의 핵심이다. 이 세상에서 만남이라는 단어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다정한 연인들이 “우리 어느 날 몇 시 어디서 꼭 만나는 거야”라고 약속했을 때 그 연인들은 얼마나 그 만남을 기다리고 사모하겠는가? 사실 만나서 별로 할 일이 없어도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좋고 기쁜 것이다. 헤어졌던 가족이 만나는 것 이상의 감격이 철철 넘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다.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만남이다.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이처럼 기다림의 설렘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사모하던 주님을 만나는 벅찬 감격을 통해 우리의 영성은 익어 가는 것이다.

다윗의 평생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우리는 시편에서 다윗의 평생의 기도 제목 즉 그가 살아서 숨을 쉬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한 가지 소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시편 27:4에 보면 그는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평생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며 살겠다고 하는 그의 간구이다. 이것은 다윗이 소유했던 영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전 생애를 통해 바라고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무엇인가? 왜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가?
 

인간은 만남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만 있는 특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언제나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인도에서 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만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50년 만에 만난 부부 이야기를 언론에서 보았다. 6.25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가 50년간 탄광에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한국 군인의 이야기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이,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50년 만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20대에 만나서 부부가 되었지만 6. 25전쟁에 참전했다가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슬프게 헤어졌다가 7백발노인들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다시 만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막는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느꼈다.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펑펑 우는 그 눈물을 보면서 이 세상의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정치 세력이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만남을 방해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50년 동안 헤어지는 아픔과 고통의 세월이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오랜 세월의 아픔이 한순간에 녹아져 내렸다는 것이다. 만남의 위력이 이렇게 큰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엄청난 영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정확하게 한 번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살아난다. 그의 가정은 회복된다. 그가 삶을 영위하는 터전에서 인생의 진정한 살맛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언제 인간인가? 사실 인간은 만남을 통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기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관계가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다. 그 아기는 어머니를 만나므로 인생의 눈을 뜨고 진정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다시 정리한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인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영적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고 살 때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발견

기독교인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자기 발견의 체험은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 되어 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보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 이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인간이었는지 자신의 죄성을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쉽게 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를 보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벌써 옛날 일처럼 되어버린 사건이지만 1999년에 한국에서는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당시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이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에게 고가의 명품 옷으로 로비한 사건으로 인해 매우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되었고 국회에서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문회가 소집되었다. 그 청문회 목적은 그 사건에 연루된 유명한 상류층 여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스컴이 동원되고 요란스럽게 생중계까지 하면서 청문회를 하였지만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딱 한 가지 밝혀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증인으로 나왔던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만 알아도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에게 이미 영적인 새벽이 찾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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