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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남장로교 파송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의 배경 연구(2)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2021년 02월 15일 (월) 14:18:14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미 남장로교 파송 매티 새뮤얼 테이트(Mattie Samuel Tate) 선교사의 배경 연구(2)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모교회인 올드 옥스바스 장로교회와 부설 묘지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의 소명과 헌신의 요인들

그렇다면, 이런 가정 배경 속에서 루이스와 함께 매티 새뮤얼 테이트가 소명을 받고, 은자의 나라였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헌신하게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매티 테이트 선교사도 한 시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다양한 영향들을 받으면서 깍기고 다듬어져서 열정을 불태우는 사역자로 부르심에 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일곱 가지 요인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서술하면서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들에 대한 사실들도 더불어 언급코자 한다.

첫 번째로, 가족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경건의 훈련과 부모를 통한 헌신의 모범에서 기인하였다.

   
▲ 올드 옥스바스 장로교회 묘지에 있는 부친 캘빈 하우 테이트의 비석

매티 새뮤얼 테이트의 부모들은 한결같이 경건하고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과 신앙을 실천하였다. 매티의 가족들이 섬겼던 올드 옥스바스 장로교회(Old Auxvasse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로 54년 동안 목회한 존 플레밍 코언(John Fleming Cowan) 목사는1 아버지 캘빈 테이트가 선하고 모범적인 신사이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2 1861년 11월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회에 부임했던 코언 목사는3 부친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캘빈 테이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기질적으로 그의 형제인 아이작 테이트 대령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외형적으로 바짝 말랐고, 호감적이지 않은 얼굴인데 키는 크고, 빨간 머리에다 쉽게 흥분하였고, 열정과 감성이 풍부하여 차고 넘쳤고, 자신이 한 말이든 사물에 대한 표현이든 본의 아니게 과장되어 보임으로 오해를 받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4

부친인 캘빈 테이트는 재혼을 통해 대가족을 이루게 되면서 가족교회의 가장으로서 경건한 삶과 신앙의 진수를 자녀들에게 전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도시들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여파로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가족교회가 위협을 받았고, 가족교회가 감당했던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생업 때문에 바쁘고 지친 부모들의 한계에 부딪혀 사실상 방치되었다. 하지만 미주리 주 칼라웨이 카운티에에서 줄곧 살아온 그녀의 가족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장로교회의 좋은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더불어 채택되었던 역사적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가족예배지침’(Directory for Family Worship)을 기반으로 장로교주의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공교회와 가족교회의 두 축이 균형을 맞추어 경건의 훈련과 실천에 매진하였다.6

   
▲ 부친 캘빈 테이트가 신학 공부를 했던 레인 신학교

두 번째로, 신학교에서 수학한 부친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매티 새뮤얼 테이트(최마태) 선교사의 부친인 캘빈 하우 테이트(Calvin Howe Tate)신시내티 레인 신학교’(Cincinnati Lane Seminary)의 신학 예비 과정에서 공부하였다.7 기록에 등장하는 캘빈 테이트의 나이가 1834년 신학교의 재학 기준으로 보자면, 그가 1813년 10월에 출생했기 때문에, 당시 20세였다. 캘빈 테이트가 정확히 언제 입학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 처럼 또 다른 신학의 명문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 야심차게 개교한 신생 학교에서 지성과 영성의 연마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캘빈 테이트가 속한 과정에는 58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8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기준으로 1829년에 출범한 ‘레인 신학교’는 미국 동부를 기준으로 서부 지역, 즉 북동부 지역에 정규 신학교를 세워서 개척자들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과 그들을 위한 목회사역에 적합한 사역자들을 양성할 필요성이 대두되던 상황 가운데서 탄생하였다.9 레인 신학교의 명칭은 학교 설립에 금전적으로 지대한 기여를 했던 에버니저 레인(Ebenezer Lane)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10 조슈아 윌슨 박사가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삼고초려 끝에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활동하던 라이먼 비처(Lyman Beecher) 박사를 초대 총장으로 초빙하여 18321226일에 취임식을 가졌다.11 비처 총장을 비롯하여 저명한 신학자들이 합류하면서, 소명감이 투철하고 모든 면에서 준비가 잘 된 학생들이 대거 지원하여 신생 신학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12

   
▲ 레인 신학교의 초대 총장인 라이먼 비처 박사(중앙),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저자이자 딸인 헤리엇 비처 스토 여사(왼쪽), 아들인 헨리 워드 비처(오른쪽)

하지만, 새롭게 출범한 신학교가 단기에 명성을 얻게 되면서 내부적인 갈등과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한 관점들이 학내에서 충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초창기 학생이었던 매티 선교사의 부친 캘빈 테이트도 이런 갈등들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첫 번째 위기는 장로교 총회에서 비등하던 신학파, 즉 부흥운동들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던 분파와, 구학파, 즉 장로교주의의 원칙을 강조하며 부흥운동들에 대하여 신중한 입장을 보였던 그룹들과의 충돌과 갈등이었다. 레인 신학교의 이사장과 대다수 이사들은 구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 라이먼 비처 박사는 예일대학교 출신으로서 뉴잉글랜드의 영향을 받아 신학파의 경향이 농후하였다.13

이런 갈등은 1835년에 윌슨 박사의 주도로 라이먼 비처 총장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서 교회 법정에 고소하는 사태로 발전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 총장의 신학적 혐의들은 모두 무죄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레인 신학교 내부에서 벌어진 이사진들과 총장의 신학적 갈등은 결국 구학파에 속한 이사들과 목회자들이 학교와 결별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14

   
▲ 레인 신학교를 배경으로 제작된 포스트카드

두 번째 위기이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신생 신학교로서 명성을 얻어 가던 레인 신학교에서 발생하여 학교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들에게도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아프리카 식민주의자들’(Colonizationists), 즉 해방된 노예들의 아프리카 본토 송환을 적극 추진하던 인사들, 그리고 노예제도 폐지론자’(Slavery Abolitionists)들과 연관된 일연의 논쟁이었다. 부친 캘빈 테이트도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편으로는 심각하게 고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앙 양심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지성인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당시 레인 신학교에서 벌어졌던 자유를 향한 학생 운동은 향후 미국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학내 운동들의 선례가 되었다.15

미국의 부흥사로서 활약했던 찰스 피니(Charles Finney)로부터 카리스카틱한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테오도르 벨트(Theodore Weld)가 레인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16 벨트가 레인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흑인 노예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주도한 학내 동아리 활동이 전국적이고 역사적인 반향을 불러 오리하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17 그는 실질적으로 레인 신학교의 학생 대표로서 노예제 폐지로 학내 여론이 기우는 것을 간파하고 18342월에 18일 간 진행된 저녁 논쟁들을 주도하였다. 당시에 노예제 폐지 문제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서 공개토론을 개최하지 못하던 분위기에서 벨트는 미국 역사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공론화한 모임들 가운데 하나를 18일 동안이나 열었던 것이다.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것이었다.18 이 회집의 주제는 해방된 노예들을 아프리카의 일정 지역으로 보내서 식민지화하는 것과 노예제 폐지론이었다. 벨트의 판단대로, 보름이 넘게 진행된 모임들은 노예제 폐지 문제를 더 비중 있게 다루면서 해방된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는 것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19

   
▲ 1834년 노예제 폐지 논쟁을 주도하고, ‘레인 신학교 저항자들’의 리더인 테어도르 벨트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부친인 캘빈 테이트(Calvin Howe Samuel)도 이런 논의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여러 명의 연사들 가운데 일원으로서 자신이 경험했던 한 노예에 대한 학대행위를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은 테오도르 벨트가 편집한 책에 게재되었다. 다음은 그가 증언했던 내용이다:

평소보다 더 심한 채찍질로 만신창이 되었고, 매우 심하게 학대받았던 젊은 여성 노예가 달아났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돌아와서 일하기 위해 현장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때 그녀의 피부는 채찍질로 생긴 상처 때문에 피떡이 지고 딱지처럼 뻣뻣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녀는 주인에게 자신이 아파서 약간 일찍 숙소로 가서 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갔고, 숙소에 도달하자마자 완전히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여주인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였습니다. 여자 노예가 대답이 없자, 여주인은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 노예는 너무 육체적, 정신적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주인은 잔뜩 화가 나서 "네가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대답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여주인은 집게를 가져다가 불에 뜨겁게 달구어 여자 노예의 발바닥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여자 노예의 다리와 몸에 벌겋게 달군 집게로 가학을 했습니다. 그래도 여자 노예가 반응이 없자, 여주인은 크게 분노하여 여자 노예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아 눌렀습니다. 불쌍한 소녀는 희미하게 속삭이며 "아, 여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나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에요." 여자 주인은 그 노예의 목소리가 워낙에 작아서인지 듣지 못하고 계속 목을 조르다가 결국 죽이고 말았다. 20

부친인 캘빈 테이트가 증언한 내용들과 유사하거나 더 잔혹한 학대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진술되자 청중들은 공분에 사로잡혔다. 당시 총장이었던 라이먼 비처 박사와 교수진들도 참석하여 노예들에 대한 가학 행위들에 대한 증언들을 청취하였다.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던 사람 중에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여사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인 라이먼 비쳐 총장의 딸로서 레인 신학교를 방문했다가 저녁 토론회에 열정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레인 신학교의 저녁 토론회가 스토 여사에게 준 영향은 그로부터 18년 후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라는 걸작을 출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1

   
▲ ‘레인 신학교 저항자들’이 발표한 성명서

테오도르 벨트의 주도로 레인 신학교에서 18일 동안 진행된 저녁 토론회는 한 신생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미국 전역에 걸쳐 혁명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레인 신학교가 위치한 신시내티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는 폭동들이 연이어 일어났다.22 이런 반향들로 말미암아 위기를 느낀 레인 신학교의 이사회는 학생들의 노예제 폐지 활동을 금지시켰고 이와 관련된 동아리도 해체할 것을 가결하였다.23 테오도르 벨트를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 활동을 했던 학생들은 학교의 입장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강하게 반발하였다.24 결국 1834년 봄학기 기준으로 등록했던 전교생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다. 역사는 레인 신학교 신학생들의 단체 행동을 레인 신학교 저항자들’(The Lane Rebels) 이라고 부른다.25 결과적으로 레인 신학교는 짧은 시간 내에 쌓은 명성만큼이나 급작스럽게 하향 곡선을 그리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레인 신학교의 신학 정규 과정 학생 중에 단 두 명 만이 학교에 남았고 절대다수인 40명은 자퇴하였는데, 그 중에 대다수가 1833년에 문을 연 오벌린(Oberlin)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던 이 사건으로 레인 신학교는 한동안 학생이 없어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에 흡수되다시피 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26

   
▲ 미 남장로교 파송 7인 선발대의 일원이었던 루이스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 남매 선교사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부친되는 캘빈 테이트도 ‘레인 신학교 저항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캘빈 테이트의 기록이 18341월 달에 나온 4년 차 연례 보고서와 학교 카탈로그에는 있었으나, 183411월에 발간된 5년차 연례 보고서에는 대다수 학생들처럼 학교를 이탈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27 캘빈 테이트가 레인 신학교의 처사에 반발하여 학업을 중단한 후 다른 학교로 옮겨서 등록을 했는지는 현존하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레인 신학교 사건이 발생한지 몇 개월 후인 1835211일에 고향인 칼라웨이 카운티로 돌아와서 첫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 알렌(Elizabeth H. Allen)과 결혼한 것으로 볼 때, 캘빈 테이트는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농부로서 생업에만 충실했던 것으로 보여진다.28

부친 캘빈 테이트가 신학 공부를 중단한 원인이 구학파(Old School)에 속한 레인 신학교 이사진들의 편협하고 인종차별적인 교권 남용에 대한 그의 저항과 반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가 레인 신학교에 재학 하면서 또는 1834년 사태를 몸소 겪으면서 두 가지의 귀중한 교훈들을 얻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는, 라이먼 비처 총장을 중심으로 레인 신학교가 견지해 온 신학파(New School)의 경향, 즉 역동적인 영혼 구원의 부흥운동을 수용하는 태도였다. 다른 하나는, 캘빈 테이트가 18342월에 18일 동안 연속으로 개최되었던 저녁 토론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연사로 나설 정도로 노예제 폐지 운동에 능동적으로 가담했던 사실을 볼 때, 그가 타인종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실천하면서 큰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친 캘빈 테이트의 경험, 즉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모든 민족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 등은 향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으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게 될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최의덕)와 매티 새뮤얼 테이트(최마태) 남매 선교사 각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주(註)

1. ‘Rev. John F. Cowan’, Missouri Civil War Heritage Foundation.
2. US., Find A Grave Index, 1600s-Current for Calvin Howe Tate.
3. ‘A Pastor 50 Years’, The Daily Notes , February 15 1912.
4. US., Find A Grave Index, 1600s-Current for Calvin Howe Tate.
5. ‘Presbyterians and Presbyterianism’ by Rev.Dr. John F. Cowan, American History & Genealogy Project.
6. ‘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Glasgow 1994), 417-422.
7. Fourth annual report of the Trustees of the Cincinnati Lane Seminary, together with a catalogue of the officers and students. January 1834, US., College Student Lists, 1763-1924.
8. Ibid.
9. ‘Lane Theological Seminary’, Ohio History Central.
10. History of The Foundation and Endowment of The Lane Theological Seminary (Cincinnati 1848), 4.
11. ‘Hope for The West: The Life and Mission of Lyman Beecher’, Connecticut History.
12. The Beecher Family Papers, Dr. Lyman Beecher, Yale University Archives; History of The Foundation and Endowment of The Lane Theological Seminary , 18;
13. ‘Hope for The West: The Life and Mission of Lyman Beecher’, Connecticut History.
14. ‘Administrative History’, Lane Theological Seminary Records, The National Archiv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
15. Stuart C. Henry, ‘The Lane Rebels: A Twentieth Century Look’, J 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Vol. 49, No. 1 (SPRING 1971), pp. 1-14.
16. Lane Theological Seminary: General Catalogue, 1828-1881 (Cincinnati 1881), 11.
17. Stuart C. Henry, ‘The Lane Rebels: A Twentieth Century Look’, 2.
18. Ibid ., 5.
19. Theodore Weld, American Slavery As It Is: Testimony of A Thousand Witnesses (New York 1839), 8-10.
20. Ibid ., 87.
21. ‘Hope for The West: The Life and Mission of Lyman Beecher’, Connecticut History.
22. Lawrence Thomas Lesick, The Lane Rebels: Evangelicalism and Antislavery In Antebellum America(New Jersey 1980), 117.
23. Fifth Annual Report Of The Trustees Of The Cincinnati Lane Seminary: Together With The Laws Of The Institution and A Catalogue Of The Officers and Students, November 1834, 33.
24. A Statement Of The Reasons Which Induced The Students Of The Lane Seminary To Dissolve Their Connection With That Institution, 1834, 1-27.
25. Stuart C. Henry, ‘The Lane Rebels: A Twentieth Century Look’, 1.
26. Lane Theological Seminary Records, Folder #8-Students, The National Archiv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
27. Fifth Annual Report Of The Trustees Of The Cincinnati Lane Seminary: Together With The Laws Of The Institution and A Catalogue Of The Officers and Students, November 1834, 32.
28. The Missouri, U.S., Compiled Marriages, 1754-1850, Calvin Howe Tate and Elizabeth H.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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