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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영성(2)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2021년 02월 12일 (금) 22:02:31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하려면 

히브리서 11:25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했다”고 하였다. 사실 여기 “더 좋아하다”는 말은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려면 선택하다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왠지 나는 한국어 번역이 더 좋다. 더 좋아한다얼마나 좋은 번역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법칙 두 번째를 발견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더 좋아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영성이다. 권력은 매우 좋은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쓰고라도 국회의원 하려고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도 하다못해 학교에서 줄 반장이라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요즈음 초등학교에는 애들 반장 선거에 부모가 피켓을 들고 후보로 나선 자기 아이 홍보까지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를 지켜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우리나라는 권력을 탐했던 정치인들이 지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잠시 잠깐 한때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역사의 무대에 서 사라졌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를 지켜온 람들은 힘없는 백성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누면서 형극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유혹이 많았다. 두 가지 유혹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친일의 유혹이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부패한 권력이 유혹했다. 그러나 그들이 유혹을 이겼던 것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분해 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었다. 그래서 잠깐의 영화를 버리고 고난받는 백성 편에서는 길을 택할 있었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일시적이고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보는 영적 시야를 갖는 것이다. 요한일서 2:17에 보면 사도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고 하였다. 여기 지나간다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모세가 이집트의 권력을 택했다면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택했기에 영원히 거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핍박

오늘날 이 시대는 우리가 언뜻 보면 신앙생활이 쉬워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예수 믿는다고 총칼로 다스리는 핍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독가스가 사람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암세포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는 핍박보다 보이지 않는 핍박이 더 무섭. 지금 이 시대는 어디 가든 교회가 있고, 누구든 쉽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질은 점점 약해지고 엷어지고 있다. 왜 그런가? 기독교인들이 엇이 더 소중한지,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렇다.

현재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인기 절정을 누리는 것은 무엇인가? 권력이 아니다. 권력보다 더 높은 것이 황금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문화, 교육, 스포츠,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정상에는 황금 우상이 서 있다. 모든 것 후에 황금 우상이 있고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 미국서 공부할 때 어느 유명한 선교학자가 와서 특강을 하면서 이제 한국이 세계 선교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유감스럽게도 “Money talks!”라는 말을 하였다. 즉 “돈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에는 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세계 선교를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 의심을 했다. 그에게는 선교도 돈으로 하는 것으로 보였던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돈이라는 세상의 지배원리가 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사상

오래전에 박한상이라는 23세의 대학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칼로 50군데 찌르고 완전 범죄를 만들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다. 그 이유는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가진 돈 40억이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얼굴을 돈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사상적 경향이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보라. 지금 그 자녀들이 부모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우리 부모는 얼마짜리야?’ 하면서 카운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 물질이 우주의 기초이며 모든 것을 물질이 지배한다는 유물사관이 끝난 으로 생각했으나 더 질기고 강한 물질 중심적 세계관이 인간의 정신구조를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이다. 요즈음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공부”를 하고 “돈 버는 지식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학의 실험실이 공장이 되고, 대학의 연구실이 회사가 되고 있다. 학생들이 돈이 되는 학과만 선택하려고 하고, 모두가 돈이 되는 공부만 하려고 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더 좋아해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 인생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세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사는 길로 나갔다. 오늘날 새로운 지배 논리가 되어버린 황금 우상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보다 더 탁월한 것, 더 좋아하는 것을 가지면 된다.
 

주님만이 희생하셨다 

모세가 세상 권력을 버린 것은 세상 권력보다 더 큰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26에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참믿음의 법칙 세 번째를 보게 된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을 라보고 그가 마침내 그가 주실 상을 바라보는 것이. 즉 기독교인의 영성은 영원한 미래를 내다보고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가 세상과 권력의 유혹을 무시해버리고,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적 시선을 미래를 향해 하나님께 정확하게 맞춘 데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선한 것이 우리에게서 결코 나올 수 없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에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모세에게 배우는 것은 보화를 발견한 자가 미래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버렸다는 것은 새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는 것은 옛것을 대신할 어떤 새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인 가운데는 ‘포기증후군’(giving up syndrome)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뭔가 포기해야 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하나씩 지워가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종교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 예수 믿은 후에 우리가 포기한 것이 얼마나 있는가? 무엇을 희생했는가? 실제로 희생한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시고 자신의 전부를 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 믿은 후 잃은 것보다는 주께로부터 얻은 것이 대부분이다. 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은 것이다. 모세의 경우에도 언뜻 보기에는 그가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뭔가 더 중요한 것을 얻고 있었다. 그는 애굽의 모든 보화나 명예보다 더 귀하고 더 중요한 것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보화를 얻고 있었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한 농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소작농이었다. 어느 날 남의 밭을 갈다가 그 땅에 보화가 있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있는 대로 다 팔아 그 밭을 비싸게 사게 되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농부가 뭔가를 손해 보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 재산을 다 팔아 쓸데없는 땅을 샀다고 바보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농부는 남이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을 얻고 있었다. 세상이 지혜로운 것 같아도 믿는 사람의 지혜를 따라간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주일날 가게의 문을 열면 분명히 수지맞는 장사를 할 수 있고 돈을 엄청나게 벌 수 기회가 있는데, 문을 닫고 교회 가는 신앙인을 보면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아마도 그가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발견한 것이 있고, 바라보는 것이 있어야 참으로 믿는 길이 열린다. 신앙생활을 억지로는 절대 못 하는 것이다. 신앙을 제대로 가지면 내 속에 세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고, 하나님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진다. 예수 믿어 손해 보게 되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엄청난 보화를 얻은 것을 알고 매우 즐거워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영국으로 잠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얼마나 수고했습니까?” 위로하면서 말했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 “수고라뇨, 저에게는 특권이었습니다. 제가 희생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수고로 느껴지고 희생으로 느껴진다면 아직도 우리는 세상의 보화를 대체할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믿음은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엄청난 보화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면서 소망 중에 살아가는 삶이다.

사람이 진리를 깊이 깨닫고 참 신앙으로 나가면 그 사람 아무도 못 말린다. 이집트의 찬란한 권력이 모세를 말릴 수 없었다. 로마의 베스도 총독도 바울이 가는 그 길을 말릴 수 없었다.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바울은 그 길이 사는 길인 것을 알고 있었으며, 망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기독교인을 정의할 때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정의를 내린다. 그는 독교인들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라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할 사람이라는 것이다(고후 4:8-9).

나는 아무리 신앙이 어리고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기독교인이라도 그가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확신한다면 온 세상이 뜯어말려도 그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상은 제대로 믿는 한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히11:38).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독특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 그에게 주어도 이렇게 살아가는 신앙인 한 사람과 결코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제대로 믿는 한 사람의 가치를 아신다. 한국교회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배출하여 우리 사회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영성이 가야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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