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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특강3/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 뜻일까?
성경 해석 능력을 키우는 4가지 방법
2021년 02월 05일 (금) 13:48:37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 뜻일까?' 이것을 화두로 던지면서 본 강의(동영상 강의 제공 ‘클릭’)를 시작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적지않은 이단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 경우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되는 정말 엉뚱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종종 그들의 주장을 쉽게 무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이단 사상을 말하면서 그 내용이 바로 성경에 나와 있다며 성경구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아담 이전에 사람이 존재합니다”(창4;14)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입니다”(시106:28)
성경에는 짝이 있습니다. 따라서 짝풀이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사34:16)
성경에 나오는 ‘동방’은 바로 한국입니다”(사41:2, 46:11)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눅4:16)
거짓말도 하나님의 모략입니다”(롬3:7)
유월절을 지켜야 영생을 얻습니다”(눅22:7-20)
예수님의 재림은 두 번,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입니다”(살전4:16-17)

   
▲ 이단들의 주장 앞에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질문을 해보자. 놀라운 일이 발생된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본 원고의 동영상 강의로 연결된다.

이러한 주장들에 성경구절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무작정 무시하기가 힘들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 뜻일까?’라는 구호다. 이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필자가 이단 강의를 할 때 회중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다. 아래와 같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는 어떤 성도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는 주일예배는 당연하고, 교회의 각종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활동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도 잘 하고 있으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합니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잘 하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훌륭한 성도입니다. 이제 질문입니다. 이런 성도가 있다면 그는 점점 더 ‘사람’ 다워질까요? 아니면 ‘신’ 다워질까요?”

위 질문을 받은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웅성거린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확인해 보며 또 자신의 생각도 정리해 보려는 모습이다. 대체로 ‘사람’ 쪽 의견이 다수를 이룬다. 이때 어느 집회에서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한 성도가 손을 높이 들었다. 의견을 직접 말하겠다는 표시다. 그를 편의상 ‘홍길동 씨’라고 지칭하겠다. 필자가 그를 지목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신 다워집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집회에 참석한 모든 이의 이목이 홍길동 씨에게 집중됐다. 잠시 적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당당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며 요한복음 10장 34절이 바로 그 성경구절이라고 했다. 이미 그 성경구절을 외운 듯 역시 큰 소리로 그 성경구절을 읊기도 했다. 그 성경구절은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집회장은 더욱 조용해졌다. 필자는 성도들의 얼굴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쭉~’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려는 이가 없어 보였다. 홍길동 씨는 자신이 성경구절까지 언급했으니 자신의 말이 정답인 양 우쭐거리는 듯했다. 누가 그 성경구절을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그 성경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든지 또는 ‘아닙니다. 사람 다워지는 게 맞습니다. 해당 성경구절은 000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홍길동 씨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 준다는 성경구절이 있다고 여기는 것 때문이다.

   
▲ 요10:34. 오른쪽에 관주가 보인다

필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단 문제를 취급해 오면서 얽히고설킨 실타래 하나가 풀어진 듯했다. 바로 이단자들이 이단 교리를 언급하면서 당당할 수 이유와 반대로 정통교회 성도들이 이단 교리를 듣고도 쩔쩔매는 이유가 동일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의견에 ‘성경구절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단에 속한 자들이 얼토당토않는 이단 교리를 배우면서도 자신감이 넘칠 수 있는 이유는 그 교리를 뒷받침해 준다는 성경구절이 있다고 배웠고, 또 그 구절들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적으로 ‘정통’(?)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가 정통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는 데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이제 그들의 틀을 깨보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해 본다.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

이단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이라고 포장하기 위해 많은 성경구절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해당 성경구절이 자신들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반면 정통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제시한 성경구절 앞에서 너무도 작아지곤 한다.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무지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제시된 성경구절 앞에서 바로 위에서 언급한 관점을 갖고 있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바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점이다. 성경구절을 제시하는 이단자들 앞에서 우리는 당당해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그 이단자 앞에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으로 사용된 것일까요?”라는 말만 해도 그들은 ‘움찔’거린다. 어떤 이는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미처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이단과 요즘 이단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과거 이단 문제는 단순한 면이 많았다. 과거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 이외의 경전이 있다, 교주를 신격화한다, 여자 문제와 돈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기도원을 조심하라’는 식으로 이단을 구분하려 했다. 어렵지 않았다. 대처하는 법도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그러나 요즘 이단은 정통교회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과거의 기준에 해당되는 곳도 아직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요즘 이단들 중 상당수는 정통교회 성도들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활용한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면 이단에 빠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이단자들이 대화하자며 성경을 내밀고 다가오면 정통교회 성도들은 불안해진다. 두렵기도 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 물론 그 이단자들은 정통교회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훈련을 받고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대면하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이때 정통교회 성도들은 의문을 갖게 된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데 우리가 왜 피해야 할까?’라고 말이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성경구절 앞에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그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본다. 그리고 그 관점으로 성경 해석의 능력을 조금 더 키워보자.

위에서 언급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신앙생활을 너무너무 잘 하면 정말로 사람은 점점 ‘신’이 될까? 이단 교주는 물론 정통교회 목회자와 특정 은사가 있다는 성도들도 종종 착각하는 개념이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또한 특별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자신이 평범한 신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 노력한다. 행동도 유별나게 하려고 한다.

 

* 사도행전 14장 이야기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나타난 한 장면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14장에 나타난 이야기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했다. 그곳에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걷게 된 것이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랬다.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중 일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 ‘신’이라고 불렀다.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을 일으킬 사람이 있겠는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대다수 사람들이 이에 동참했다. 급기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대상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찌해야 할까.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적극적으로 ‘YES’라고 반응하는 경우다. 즉, 자신들이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고 신처럼 행동하는 일이다. 신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묵인이다. 자신들이 신이라는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면 ‘묵인’의 경우를 택할 수도 있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그 상황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는 방식이다. 신으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꿩 먹고 알 먹는 방식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단 단체에서 흔히 나타난다. 슬프게도 정통교회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매우 적극적으로 ‘NO’를 선언하는 경우다.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신격화시키려는 이들을 말리는 일이다.

오늘날 일부 정통교회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한다. 치병, 안수, 입신, 환상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이 발생한 이후다. 대표자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신’이라고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단 단체 신도들조차도 그 정도로 무지하여 교주를 따르는 이가 많지 않을 정도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다. 몇몇 성도들이 자신의 종교심으로 인해 교주 또는 담임목사를 필요 이상으로 추앙하려는 경향이 흔히 발생한다. 개개인 성도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 때문이다. 담임목사의 목소리만 들어도 은혜 받는다고 표현한다. 하루 종일 설교 테잎(또는 파일)을 틀어놓는 이도 있다. 어쩌다 악수를 한 번 하면 성령충만해 진 듯 그 감동을 잊지 않는다. 꿈에서 그 분(?)의 모습을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재림 예수님이라도 만난 듯 기뻐하며 간증(?)까지도 한다. 그 분의 책은 읽지 않아도 무조건 구입하고, 그 분이 단위에 오르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그 분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실질적으로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각종 혜택을 누리게 된다. 위 성경 본문에서 사도 바울에게도 그러한 상황이 펼쳐졌다. 매일 잔치상을 받을 수 있는 꽃길(?)이 눈앞에 놓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때 어떤 경우의 수를 선택했을까? 바로 세 번째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NO’를 외쳤다. 자신은 ‘신’이 결코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과 같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사도 바울은 자신도 무리들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외쳤다. 비록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리려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능력이나 특별함을 드러내려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옷까지 찢으며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 홍길동 씨 이야기 1

그럼 홍길동 씨가 제시한 요10:34절로 돌아가 보자. 그는 그 성경구절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 준다고 했다. 이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관점을 가지고 직접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언뜻 보기에는 정말로 사람이 신이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보인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말이다. 정말 그럴까? 홍길동 씨는 위 성경 말씀이 사람이 신이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홍 씨의 말대로 그 성경 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

이제 하나씩 접근해 보자. 먼저 ‘기록된 바’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구절 아닌가. 그렇다. 예수님이 마귀에서 시험 받으시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즉 ‘기록된 바’의 다음 문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직접화법의 문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차용해 온 간접화법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차용해 온 문장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이다. 다시 말해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의 문장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빌려온 것을 말한다. 그럼 어디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져온 것일까? 역시 관주가 고마운 일을 또 해주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말씀 앞에 관주 표시가 있다. ‘인 시82:6’이라고 안내를 해 준다. 시편 82편 6절을 인용했다는 표시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요한복음 당시 상황에서 말씀하고 계신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 시편 말씀은 무엇인가. 찾아보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82:6)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34절에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찾으려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해석을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관주를 사용하였고, 이때 관주는 우리를 시편의 한 구절로 안내했다.

위 시편 구절을 천천히 읽어보자.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너희=신들=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이다. 있는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자 그럼 이때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가 바로 ‘신’이고 ‘지존자의 아들’이 된다고 연결하고 있다.

조금 아쉽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접근하겠다. 그 다음 해석을 위한 접근은 ‘다른 번역 성경 사용하기’와 ‘문맥따라 읽기’와 관련이 된다. 곧 이어가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관주에 대해 살펴보고 있으며, 또 그것을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인내하며 계속 정독하시기를 바란다. 현재까지 요10:34절의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시편의 한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는 데까지만 살펴보았다. 또한 시편에서 그 ‘신’은 ‘지존자의 아들’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까지만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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