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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파송 최초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에 관한 연구(4)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2021년 01월 11일 (월) 15:38:13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의 가정배경에 관한 연구(4)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3.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회, 경제적 배경

사회경제적 변화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의 출생과 성장 시기는 남북전쟁에서 남부군의 패배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재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노예들을 무상으로 해방함으로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연쇄적인 문제들을 양산하던 무렵이었다. 아울러 남북전쟁 전부터 결혼적령기의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짐으로 성비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는데 4년이 넘는 전쟁의 과정에서 수많은 남성들이 전사함으로 성비불균형 문제가 충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1 성비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혼적령기의 여성들은 결혼의 시기가 점점 늦어졌고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비전통적인 결혼도 늘어났다.

   
▲ 1870년 연방 센서스-데이비스 선교사의 모친인 메리 데이비스가 직업이 가정주부고, 16000불의 재산이 있다는 기록

셀리나 ‘리니데이비스에게 5명의 언니들이 있었는데 아라벨라(Arabella), 세라(Sarah), 그리고 리디아(Lydia) 등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2  특히 리디아 언니는 막내 동생인 로버트(Robert) 가족과 함께 아빙돈에서 평생을 보냈다.3  그녀의 가족만 보아도 남북전쟁 이후 성비 불균형에 따른 결혼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메리 언니가 제일 큰 언니인 마가렛을 제치고 2년 먼저 1872년에 결혼했는데 그 때의 나이가 23세였다.4 자매들 가운데 메리 언니만 적정연령에 결혼했던 셈이다. 마가렛은 34세인 1874년에 초혼이 아닌 상처한 존 서튼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5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마가렛은 결혼 4년만에 두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였다. 마가렛의 남편은 부인이 죽자마자 곧바로 둘 사이에 태어난 어린 아서를 처갓집에 보내고 처제인 메리의 남편되는 찰스 해리스의 여동생과 세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만큼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남자가 초혼이든 재혼이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이 초혼의 여성들과 쉽게 결혼할 수 있었다.

   
▲ 1900년 연방 센서스-데이비스 선교사의 언니인 리디아가 남동생인 로버트 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기록

셀리나 ‘리니데이비스가 일곱살 되던 무렵에는 낸시 데이비스(Nancy Davis) 고모가 46세의 늦은 나이에 12살이나 어리고 첫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이 있는 34세의 남성과 18691116일에 혼인을 하였다.6 이 경우는 남북전쟁 이전에 이미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루다가 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심화되었다는 전형적인 실례이다. 셀리나 데이비스도 혼기가 지난 1892년에 30세의 나이로 한국에 선교사로 왔고, 6년 후인 그녀의 나이 36세가 되던 1898년에 4살 연하의 윌리엄 버틀러 해리슨(William Butler Harrison,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의 사회적 문제가 선교지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던 셈이다.

46세에 결혼한 낸시 고모는 독신인데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영위할 정도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1860년에 그녀의 재산 가치는 1000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적지않은 규모였다.7 낸시가 1896년 1월 11일에 72세의 나이로 죽었고, 며칠 후인 1월 27일에 그녀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8 이때는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가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후 준비 기간을 거쳐 군산지역 선교가 시작되려는 시기였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오빠인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 쥬니어가 아버지가 남긴 유산 덕분에 킹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었다.

유언장의 주요 내용은 자신이 소유한 땅의 일부를 남편에게, 또 다른 일부는 남동생 존 데이비스(John Davis)에게 주며, 존은 형제인 제임스 데이비스(James Allison Davis) 목사에게 100달러를 주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했던 비버 크릭 교회(스프링 크릭 교회와 합침)50달러를 헌금하며, 아직 받지 못한 빚들은 남편에게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낸시 데이비스의 유언대로 동생인 존 그리피스 로건 데이비스(John Griffith Rogan Davis)가 누나의 땅 일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부동산을 상속받았지만,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그가 죽을때까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9

막내 친삼촌인 존과는 다르게, 데이비스 집안의 장남이자 대가족의 가장이었던 셀리나 리니의 아버지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는 근면하고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일하여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형성하였다. 셀리나의 부모들은 매우 성공적인 지주(landowner) 였다는 평가다. 1850년에 그들은 4000달러의 가치를 지닌 토지를 소유하였다.10

   
▲ 데이비스 선교사의 가족 묘지에 세워진 부친의 기념비

1860년에는 그들의 재산이 3000달러의 동산을 비롯하여 총자산이 23,000달러를 상회하였다.11 아울러 가문을 위한 전용 묘지도 있었다. (Davis Cemetery)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가족도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더군다나 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5년 10월 22일에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장인 자신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경제적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셀리나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실시된 1870년 센서스에서 어머니인 메리의 재산이 총 16000달러로 집계되었다. 센서스에 나타난 어머니 메리의 직업도 가정주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버지 사후에 어머니가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상황이 되었던 것이다.12 비록 아버지는 54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의 부름을 받아 가셨지만, 그가 평생을 열심히 일해서 가족의 미래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의 악조건 속에서도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은 자녀들이 모든 면에서 주어진 기회들을 활용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향인 아빙돈의 겨울 풍경

아버지와 동일한 이름을 물려받은 다섯째 자녀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 주니어(Archimedes Davis Jr.)는 이런 경제적인 뒷받침 덕분에 테네시주 브리스톨(Bristol)에 위치한 킹 컬리지(King College)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졸업후에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13 작고한 아버지는 단지 경제적인 준비에만 그치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유산을 남겨줌으로 유무형의 영향력을 깊게 심어 주었다.
 

주(註)

1. J. David Hacker, Libra Hilde, and James Holland Jones, ‘The Effect of the Civil War on Southern Marriage Patterns’, The Journal of Southern History , February 2010, pp. 39-70.
2. Virgil Lewis, ‘Residents of Washington County’, p. 716.
3. 192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Robert Davis.
4. Thomas Colley, Washington Co. VA Marriages 1853-1880 , p. 150.
5. Ibid., p. 358.
6. Ibid ., p. 34.
7. 186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Nancy Davis.
8. Nancy E. Bradley will (recorded 1896), Washington C., VA Will Book 25: 259.
9. Theophilus Rogan, ‘Reminiscences’, N/A
10. 185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Archimedes Davis.
11. 186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Archimedes Davis.
12. 187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Mary Vance Davis.
13. ‘Archimedes Davis’, The History of Carroll County, Arkansas 1889 (Goodspeed Publishing Company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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