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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파송 최초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에 관한 연구(3)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2021년 01월 04일 (월) 11:41:06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의 가정배경에 관한 연구(3)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3.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회, 경제적 배경

노예제도

남북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후유증을 북부와 남부 모두에게 주었다. 그래서 진정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야기시킨 남북전쟁의 주된 요인이 노예제도이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남부지역에는 약 4백만 명의 노예들이 재산처럼 취급되고 매매의 대상이었다. 노예 관련 산업의 가치가 여타 산업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았고 노예들을 통해 생산되는 원재료의 가격이 나날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구조였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아버지인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 장로가 소유한 23세의 여자 노예 문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의 집에도 흑인 노예가 한명 있었다. 23세의 흑인 여성 노예였는데 아이가 많은 집안에서 식모와 같은 일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1 아마도 신생아인 셀리나 데이비스가 태어났을 당시에도 유모와 같이 그녀를 돌보았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가 여러 군데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노예의 숫자는 훨씬 많았다고 봐야 한다.2 셀리나의 이모부가 된 플로이드 허트도 화이트 샤펠 (White Chappell)이라는 남자 노예가 있었다. 이모부는 농사보다는 금융관련 일을 하였기 때문에 꼭 필요한 노예만 부리고 있었다.3 워싱턴 카운티의 수도인 아빙돈에서 평균 규모의 농사를 짓는 백인들은 대략 10명 전후의 흑인 노예들을 소유하였다.4 1830년에 아브람 외할아버지도 10명의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부친이 죽고 나서 노동자로 고용된 60세의 과거 흑인 노예-1870년 연방 센서스

남북전쟁 이전에 남부지역에는 46,300개 정도의 대규모 농장(Plantation)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농장에는 농장주가 있고, 농장주에게 고용된 관리자, 그리고 적어도 20명 이상의 흑인 노예들로 구성된다. 흑인 노예들에 대한 가학행위는 주로 관리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경향이 있다. 농장에는 농장주가 거주하는 대저택, 관리자 등이 거주하는 숙소, 농사에 필요한 창고, 보조 창고, 그리고 노예들이 집단 거주하는 소규모 주택들이 자리했다. 셀리나 리니데이비스의 첫째 외삼촌인 제임스 라이온스 풀커슨(James Lyons Fulkerson)1849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제임스 외삼촌이 작성한 유언장 내용에 대규모 농장이 등장한다. 이 유언장에서 제임스 외삼촌은 앨리스(Alice) 외숙모에게 동산과 부동산을 대부분 상속한다고 명시했다. 대규모 농장은 당시 가치로 1400달러 정도 호가했는데, 이 금액만큼은 앨리스 외숙모에게 주고, 시장가치가 상승해서 그 이상의 돈을 받을 경우 자신의 동생들인 프랜시스(Francis)와 새뮤얼(Samuel) 대령에게 위임하여 관리하게 하고 매년 그 이자를 어머니인 마가렛 풀커슨(Margaret Fulkerson) 여사에게 주도록 했다. 어머니 사후에는 원금을 여동생들인 헤리엇(Harriet)과 캐서린(Kate)에게 주라고 적었다. 당시 농장에는 적어도 20명 이상의 노예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5
 

   
▲ 데이비스 선교사의 첫째 외삼촌인 제임스 라이온스 풀커슨이 남긴 유언장

셋째 외삼촌인 프랜시스 마리온 풀커슨(Francis Marion Fulkerson, Frank)도 이런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가 처음부터 농장주가 된 것은 아니었고, 20세가 될 때까지 집안일을 돕다고 테네시주의 로저스빌에서 연봉 100달러와 숙식을 제공하는 가게 직원부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멕시칸-아메리칸 전쟁에 일반 병사로 지원하여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였다. 1848년부터 법학을 공부하여 1851년에 변호사가 되었고 테네시주 테이즈웰(Tazewell)에서 8년간 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859년에 로저스빌(Rogersville)로 돌아와서 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1863년에 주 상원의원에 피선되면서 남북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다.6
 

   
▲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향인 워싱턴 카운티 전경

남북전쟁에서 북부군이 승리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셀리나 리니데이비스의 가문 사람들은 그 전에 이미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녀의 집에서 자신을 돌보며 놀아주던 당시 23살의 여자 노예도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1865년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부친 대신에 노동력을 제공할 일꾼이 필요해서 당시 노예에서 해방된 아이작 프라이스(Isaac Price) 라는 비교적 나이 많은 사람을 고용하였다. 이 노동자도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대략 1810년생으로 1870년 당시 60세였고, 직업은 노동자였다. 그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당시 여덟살이었던 셀리나 데이비스의 눈에는 인종구별 없이 자상한 할아버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7
 

   
▲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향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가옥들

셋째 외삼촌인 프랜시스도 남북전쟁이 종료되자마자 자신의 농장에 있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찾아 떠나든지 아니면 정식 노동자로 계속 일하든지 하라고 선택권을 주었다. 일단 그들 모두는 자유를 선택했고 테네시주 남쪽 지역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문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프랜시스 외삼촌에게 풀커슨이라는 성을 사용해도 되는지 문의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방된 흑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독립된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일단의 전직 노예들이 정식 노동자로 복귀하였다.8 이 같은 사실은 그가 노예해방 이전부터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註)

1. 1860 U.S. Federal Census-Slave Schedules for Archimedes Davis.
2. Virgil A. Lewis, ‘Virginia and Virginians’, History of Virginia from Settlement of Jamestown to Close of the Civil War , Vol. II, p. 716.
3. Bristol Herald Courier, January 10, 1965.
4. 1860 U.S. Federal Census-Slave Schedules: See also, 1810, 1820, 183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Abram Fulkerson.
5. Tennessee, Wills and Probate Records, 1779-2008 for James L. Fulkerson
6. Fulkerson Papers, James L. Fulkerson.
7. 187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8 William S. Speer, ‘Colonel Fulkerson’, Sketches of Prominent Tennesseans (Southern Historical Press 1997); Fulkerson 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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