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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씨(새물결플러스) 사상, ‘엄중 경고’ 규정 이유
분석/ 김요한 씨의 책 <지렁이의 기도>
2020년 12월 01일 (화) 15:29:29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김요한 씨(새물결플러스 출판사 대표)의 신학 사상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104회, 2019)에서 ‘엄중 경고’ 규정을 받았다. 합동 총회는 김 씨가 저술한 책 <지렁이의 기도>(김요한, 새물결플러스, 2017, 10월)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이단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의 보고서를 그대로 받았다(참고, 김요한 씨에 대한 예장 합동 보고서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98 ).

   
▲ 김요한 씨의 책 <지렁이의 기도>

이대위 보고서는 <지렁이의 기도>에 나타난 김 씨의 사상의 문제점에 대해 ‘1. 김요한 씨의 특이한 불 성령체험, 2. 다가가기만 해도 신자들에게서 방언이 나옴, 3. 태중의 성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음성, 4. 영혼의 몸과 몸의 분리(유체이탈)’ 등이라고 지적했다.

김 씨의 <지렁이의 기도>는 지난 2017년 10월에 출판되어 나왔다. 교계에 이름이 제법 잘 알려진 목사, 교수 등 32명이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2년 뒤, 예장 합동 총회(104회, 2019)에서 <지렁이의 기도>를 통해 나타난 김요한 씨의 사상에 문제가 있다며 ‘엄중 경고’의 규정을 내렸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이상하다’며 총회에 헌의한 것에 대한 결론이다. 김 씨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지렁이의 기도>라는 책은 현재 김 씨가 대표로 있는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인터넷 홈페이지(https://www.holywaveplus.com/133 )를 통해 여전히 홍보되고 있다. 그것도 ‘신앙과 경건’이라는 코너를 통해서 말이다.

이제 그 <지렁이의 기도>라는 책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위헌한 지렁이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독교포털뉴스>(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77)를 통해 분석 기사를 올린 바 있다. <지렁이의 기도>가 출판된 지 약 3개월 후의 시점이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정리하여 다시 게재한다.

어떤 책을 분석 비판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다양하고 깊이 있는 신학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 대표의 저서에 태클을 건다는 것은 축구 경기에서 자살골을 넣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갖게 한다. 하지만 <지렁이의 기도>를 읽고 적지 않은 실망감이 들었다. 신학 서적 출판사 대표의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성령 체험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성경에 나타난 성령 체험도 이와 같은 것일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랑하고 소망하고 갈구하는 기도의 삶이 과연 이런 것일까? 오히려 신비주의의 그릇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김 씨가 대표로 있는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여전히 <지렁이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김요한 씨는 자신의 책이 기도에 대해 ‘신학’과 ‘체험’에 균형을 이루도록 신경을 쓰며 집필된 것이라고 했다(<지렁이의 기도> pp.37-38). 즉, 이론과 실제의 두 축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는 의도다. 그가 의도한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자.

먼저 기도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다. 김 씨는 삼위일체, 주기도문, 성령, 찬송 등의 주제와 연결하며 기도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했다. 때로는 관련 성경 본문에 대한 주해(exegesis)적 접근을 하기도 했으며, 역사의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역시 목회자이자 출판사 대표답게 다양한 책들을 언급하며 폭넓고 깊이 있게 이론적 접근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렇듯 신학 이론으로 무장한 이의 실제 기도 체험은 어떠한가에 대한 접근이다. 김 씨는 자신이 직접적인 기도 체험을 했다며 그 예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단단한 이론으로 무장된 그의 기도 실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위험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

먼저는 소위 ‘하나님의 음성 듣기’다. 김 씨는 위의 책(<지렁이의 기도>)에서 자신의 기도 체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자주 사용했다. “~라고 하십니다”는 식으로 어떠한 존재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말을 상대에게 전달해 주는 표현이다. 역시 자주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자신의 귀에 또렷이 들은 후에 상대에게 말해준다는 행위다.

이러한 직통계시성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김 씨의 책, <지렁이의 기도> 처음부터 등장한다. 책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인 ‘프롤로그’에 그의 대표적인 경험담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것을 독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즉, ‘지렁이의 기도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이다.

김 씨는 예전(그는 그때를 정확하게 1999년 6월 8일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자신의 자녀가 태중에 있을 때 그 아기의 성별이 아들인지 딸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알려줄 수 없었다. 그것이 규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사가 그 내용을 알려주면 그것은 불법이 된다. 김 씨는 자녀의 성별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하지만 의사의 답은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의사의 행동은 사실 칭찬 받아야 할 일이었다. 당시 사회의 규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 김 씨의 마음은 상했다. “분하고 약 올랐다”고 표현했다. 그는 의사를 원망까지 했다. 그날 저녁 마음을 정리한 후 서재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고 언급했다. 그때 뜨거운 불이 자신을 감쌌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 직통계시성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게 내려왔다고 했다. 그 받았다는 음성이라는 것을 김 씨는 자랑스럽다는 듯 직접 서술했다. “아들이다, 됐냐”라고 말이다. 이것을 그는 ‘불의 체험’이요,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그때가 우리 첫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서 6개월을 막 넘긴 시점이었으며, 그날이 마침 병원 정기 진료일이었다. ... 산부인과 주임인 L선생님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한마디하고는 이내 상황을 종료해버렸다.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요??

이게 돌아온 답의 전부였다. 솔직히 황망하고 부끄럽고 분했다.
···
서재에 들어가 무릎을 꿇기 직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무릎을 꿇자마자 기세등등한 산불처럼 어떤 뜨거운 불이 내 온 몸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런 음성이 들여왔다.

“아들이다, 됐냐?! 뭐, 그런 것 갖고 하루 종일 화를 내고 그러느냐?”

참으로 우습게도 내가 처음 들었던 성령의 음성은 “아들이다, 됐냐?!”였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는 웃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아,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구나!”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그 신기한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소망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나는, 벌써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김 씨의 책, p.31-33)

김 씨는 “아들이다, 됐냐”라는 그 무엇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여겼다. 이 일을 시작으로 자신도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다고 말이다. 그 음성이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성경적, 신학적 검증을 했다는 노력은 그의 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홈페이지 화면 중에서

김 씨의 태아 성별 구별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행위는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태아 성별을 구별해 준다면서도 동일한 행위를 했다. 이때 “딸이라고 말씀하셨어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해 준다는 방식이다. 김 씨는 역시 그것을 직통으로 내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언급했다. 이쯤되면 태아 성별 구별 하나님 음성 듣기 전문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 내용도 역시 직접 들어보자.

[2000년 6월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던 J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목사님, 저희 둘째 생겼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내게 전화를 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둘째가 생긴 기쁜 소식을 전해줄 요량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과연 둘째가 아들인지 혹은 딸인지 은근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J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딸이네요, 하나님이 아주 좋은 딸이라고 말씀하셨어요”라고 받았다.
···
“목사님, 그런가요? 저희 부부가 4년 동안이나 둘째는 아들을 달라고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다시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 집사님 심정은 잘 이해가 됩니다만, 하나님이 딸이라니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 주신 아이가 정말 좋은 딸이니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꼭 아들 주신다고 하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랍니다.” ](김 씨의 책, p.97)

이런 게 소위 ‘지렁이의 기도’란 말인가? 다시 언급하지만, 김 씨는 자신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어떠한 검증을 하지 않았다. 그 음성의 내용이 성경과 어떻게 연결된다는 방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들은 음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너무도 쉽게 결정했다. 또 그때의 상황을 성령 체험이라고 했다. ‘내가 체험했으니 성령체험’이라는 식이다.

김 씨가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은 너무도 가볍게 우리네 사회의 규칙을 어겼다. 태아 남녀 구별은 불법이다. 그것에 분을 낸 김 씨를 마치 위로하듯 ‘아들이다, 됐냐’라며 들려주었다는 음성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음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의 사회 규범과 법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어 두려는 것 역시 옳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태아 남녀 구별뿐 아니라 그 이상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만유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러나 김 씨는 이렇듯 사회 질서를 막무가내로 무시해가며 들려왔다는 ‘아들이다, 됐냐’는 직통계시성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표현했다. 과연 옳은가?

필자는 약 30년 동안 다양한 사이비이단 종교를 직접 취재 보도해 왔다. 그중 소위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다. 이는 사이비이단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신앙 행위 방식 중 하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언제 결혼할 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지, 땅을 언제 팔아야 하는지, 아들인지 딸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비기독교인들은 점(占)을 잘 친다는 사람을 찾을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을 찾기 쉽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답을 말이다. 그러면 기독교 은사자라는 이는 방언, 통변, 환상, 입신 등의 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전달해 준다. ‘누구와 결혼해라, 어디에 땅을 사라, 대학에 붙을 수 있다’, ‘아들이다, 딸이다’는 등이다. 이러한 모습이 사이비이단 종교 단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기독교 간판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미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대해 분석 기사가 본 <교회와신앙>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려요” 참고,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701). 위 분석 기사는 시중 기독교 서점에 ‘하나님 음성 듣기’ 관련된 서적들이 팔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조이도우슨, 예수전도단, 2005)을 비롯해서 잘 팔리고 있다는 서적 10여 권이 선택되었다. 그 내용들을 모두 분석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번 <지렁이의 기도>가 만약 그때 출간되었다면 그 책들 중 하나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하나님 음성 듣는 방법도 저자마다 상이했다. 마음의 감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또 직접 귀로 들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각자의 노력도 다양했다.

‘하나님 음성 듣기’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인 접근은 무엇인가. 마음을 통해서건, 또는 직접 귀를 통해서건 어떤 신비스러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음성, 또는 성령의 체험이라고 판단하면 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박영돈 교수는 “자기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경계를 했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IVP, 2011, PP32-33). 자신의 생각이나 떠오르는 어떠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존 맥아더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느낌, 상상, 개인적 환상, 내적 음성, 개인적 조명 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행위를 신비주의라며, 그러한 자들은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각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지적했다. 그것을 즉 무모한 신앙(Reckless Faith)이라고 표현했다(존 맥아더, <무모한 신앙과 영적 분별력>, 생명의말씀사, 1997, pp 27-30). 진리의 기준을 성경이 아닌 주관적인 체험에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도 다르지 않다. 오늘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의사 소통하시는 핵심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통해서다. 성경은 기록 형태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에스겔과 바울과 다른 많은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에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을 하고 계신다(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음성>, IVP, 2001, P.74). 성경 말씀을 성령의 조명함으로 끊임없이 묵상함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란 뜻이다.

어디서부터인가 들려왔다는 ‘아들이다, 됐냐’는 음성을 어떠한 검증도 없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성령의 체험이다’고 주장한 김 씨의 직통계시성 행위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위험한 예언

김 씨의 ‘지렁이의 기도’에는 하나님 음성 듣기 외에도 ‘예언’이라는 행위도 들어있다. 김 씨는 자신이 예언을 한다고 직접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예언이란 사람들의 일상의 앞의 일을 미리 알려준다는 행위다. 그가 예언을 했다고 그의 책에 기록한 내용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일들이다.

하루는 김 씨 지인인 L집사가 그를 찾아 교회로 왔다. 그와 대화를 하는 중 김 씨는 그에게 조만간에 크게 아플 것이라고 말했다. 다소 황당한 소리다. 또한 그 재앙을 대비하기 위한 방법도 있다며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서울 관악산 주변으로 이사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특정 지역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 사건만 읽어보면 대화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인가, 또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기독교와 관련된 곳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김 씨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예언’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하루는 아무 예고도 없이 중학교 동창인 성악가 L집사가 교회를 찾아왔다. ... 그날 대화 중에 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불쑥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이 집사님 남편이 크게 아플 거랍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집을 서울대 부근의 관악산 주변으로 옮기는 게 좋다고 해요. 나중에 남편이 크게 아프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거랍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무슨 배짱으로 20여 년 만에 만나 동창에게 그런 예언을 대뜸 던졌는지 모르겠다.](김 씨의 책, pp.114-115)

김 씨는 자신의 행위가 바로 ‘예언’이며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그의 책을 아무리 꼼꼼하게 읽어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냥 자신의 체험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식이다. 위의 대화에서 ‘하나님’, ‘집사’라는 단어만 빼고 다시 읽어보자. 교회 밖의 여느 점(占)집에서 행해지는 내용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 ‘집사’ 등의 기독교 용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인가.

그의 예언이라는 행위는 책 곳곳에 잘 나타난다. 한 가지를 더 들어보자.

[새물결아카데미에서 ‘일터신학’을 강의하시는 L목사님이 예고도 없이 회사 카페에 들르셨다. ···그 순간 성령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너희 가정은 서울로 들어와야 길이 열리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활동의 폭이나 길이 막힐 수밖에 없으므로 성남을 떠나 봉담으로 이사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라.”

그래서 나는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일단 L목사님은 내게 성령의 예언적 은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런 기적 같은 이야기는 당신처럼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소유한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우리같이 성령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오?”

그러게 말이다. 나로서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했던 말씀을 다시 들려드리는 것뿐이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 ] (김 씨의 책, pp116-119)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이런 것을 ‘예언’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서울로 들어와야 길이 열린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활동의 폭이 좁아진다’는 말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예언이라는 것인가. 서울에 거주하는 게 활동의 폭이 넓고,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야 알 수 있는 말인가. 중학생도 알 수 있는 지혜(?) 아닌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안위와 성공을 위해 앞날의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자를 예언자라고 여기고 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크게 다르지 않다. 김 씨 같은 예언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언의 행위라면 딱 한 가지만 예언의 행위를 하면 만사형통할 것 같다. 모든 사람의 대부분의 기도제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한 가지 특별한 예언이 있다. 바로 로또 번호 맞추기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령께서 그것은 못하시는가? 그렇다면 ‘서울로 가면 길이 열린다’와 ‘로또 번호 맞추기’의 예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위 대화에서 김 씨 혼자서 재미있는 상상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 씨의 놀라운 예언(?)을 듣고 있으면 일반 사람들이 “우리같이 성령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오”라는 푸념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예언의 행위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신앙생활에서 허탈해 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김 씨의 반응은 이렇다. “그러게 말이다. 나로서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이다. 즉 자신에게는 그런 훌륭한 은사가 있고 당신에게는 그런 은사가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는 식이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대목이다. 혼자 북치고 장고치는 원맨쇼의 모습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신도 그런 예언의 은사를 얻고 싶으면 성경 말씀대로 따라 해라’며 고린도전서 14:1절의 성경 구절 하나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예언 행위도 바로 그 성경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의미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체험 행위에 성경의 근거를 살짝 스치듯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고전14:1절이 김 씨가 행했다는 그런 예언의 행위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일까? 도대체 김 씨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아무렇게나 성경구절을 사용하면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김 씨는 앞서 언급한대로 ‘새물결플러스’라는 출판사의 대표를 맞고 있다. 그 출판사에서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신학서적들이 연 40여 권 출판된다고 했다. 특히 이단사이비 문제를 대처하는 책들도 출간해 내고 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한 <성경 오해에 답하다>(권영진, 새물결플러스, 2015)를 살펴보자. 그 목차에 ‘예언’에 대해 간략하지만 깊이 있게 언급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김 씨의 그것과 무엇이 같으며 또 무엇이 다를까?

‘예언(預言) VS 예언(豫言)'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직접 살펴보자.

[예언자(豫言者)의 일반적인 의미는 “예언(豫言)을 하는 사람”입니다. 황홀경에 빠지든 도구를 이용하든, 어떤 식으로든 점을 치거나 신탁을 받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예언(豫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언자(預言者)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의 예언자들, 특히 예언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말씀(토라)을 바탕으로 그것의 의미를 다시 밝히고 전하는 “맡겨진 말씀”(預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권영진, <성경 오해에 답한다>, p.110)

예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앞날의 일을 단순히 맞추려고 하는 행위(predict)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행위(prophecy) 등이다. 전자는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것으로 직통계시, 방언, 통변, 환상 등의 행위를 이용해 주로 나타난다. 올바른 성경적인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것이 핵심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위 책의 저자(권영진)는 성경구절 고전14:1의 해설도 덧붙였다. 바로 김 씨가 자신의 예언 행위의 근거로 사용했던 구절이다. 직접 살펴보자.

[신약시대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경고나 예고가 아니라, 말씀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람을 격려하는 것이었으며,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고전14:1-5, 엡4:11). ](권영진, p.112)

고전14:1절의 의미는 결코 김 씨가 했다는 ‘서울로 들어와야 길이 열린다’는 등 예언이라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김 씨의 예언이라는 행위가 성경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김 씨는 자신의 예언이라는 행위의 성경적인 출처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 할 형편이다. 한 출판사 내에서 출판사 대표의 신학 사상과 그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낸 저자의 신학 사상이 서로 부딪히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예언, 성화인가 점술인가?’라는 글(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34 참조)에서 기독교의 예언은 앞의 일을 예고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고 일축했다. “계시로서의 예언은 그쳤다는 것이 개혁신앙의 입장, 성경 외에 계시는 없다”며 직통계시성의 예언의 행위를 부정했다. 한정적인 의미로써 예언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그 ‘한정’도 성경의 가르침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렁이의 기도>에 나타난 김 씨의 기도의 체험은 ‘하나님 음성 듣기’, ‘예언’ 외에도 ‘환상’, ‘방언통변’ 등 다양하다. 심지어는 ‘유체이탈’ 사건도 등장한다.

김 씨는 “아들이다. 됐냐”는 음성을 들었다는 내용을 기술한 직후, 소위 ‘유체이탈’이라는 현상을 경험했다며 소개했다.

급기야는 기도하는 순간에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실체가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 하늘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 후로도 이런 체험은 몇 번 더 반복되었는데, 나는 하늘 여행을 마친 어떤 모종의 실체가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오면서 둘이 합체될 때의 그 독특한 느낌-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김 씨의 책, p.33)

김 씨는 기도하는 어느 순간 자신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한 번만이 아닌, 여러 번 경험했다고 했다. 빠져나간 영혼이 다시 돌아와 육체와 도킹(docking)하는 체험도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소설이나 영화도 많이 본 모양이다.

김 씨는 <지렁이의 기도>를 통해 밝힌 자신의 기도 체험에 대해 성경적인 검증(설명)을 대부분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일까? ‘그냥 나에게는 이런 경험이 나타났다’는 식이 전부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체험’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기도’라는 일반적인 주제를 논할 때는 성경 분문 접근과 다양한 신학적인 접근을 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기도에 대한 성경, 신학적인 접근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 경험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그의 기도에 대한 이론과 경험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모양새다. 자신의 신비주의 체험을 신학으로 포장하려는 듯하다. <지렁이의 기도>에 나타난 김요한 씨의 기도의 경험들은 성경의 내용과 너무도 거리가 먼 위험한 신비주의 현상에 불과하다. 예장 합동의 '엄중 경고' 규정을 유념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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