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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담패설과 그루밍 성범죄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7)
2020년 08월 18일 (화) 14:05:07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새 사람의 일반윤리(엡 5:3-14)

바울은 “새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윤리 문제를 더욱 확대시켜 나간다. 그가 앞 단락에서 주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실천해야 할 기본윤리를 강조하였다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일반윤리를 가르친다.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새 사람의 윤리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음담패설을 삼가고 감사의 말을 하라(3-4).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대화가 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를 둘러싼 실존 상황은 언제나 수많은 대화의 주제들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삶의 주변에는 언제나 고급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대화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며, 안다고 해도 실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로 대면하여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란 희소(稀少)하고, 그런 기회를 얻어 나누는 대화란 중요한 의미를 함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대화가 비지니스에 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의 진솔한 표현일 때,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발설은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듣는 사람의 내면에도 파고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주제 선정을 적절히 할줄 알아야 하고, 자기가 말할 기회를 얻었을 때는 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지식을 다 쏟아 놓으려는 듯이 말하는 것이나,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나, 듣는 사람을 학생 취급하며 교만한 태도로 말하는 것은 좋은 대화법이 아니다. 대화란 문자 그대로 나도 말하고 상대방도 말하는 것이다. 대화에서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선입견을 가지고 억지 논리를 펴며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최악의 화법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1세기 사람들의 성적 타락상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믿는 자들이 교회 밖에서 온갖 음담패설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그런 대화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다반사가 되면 경건한 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언어생활을 버리고 ~한 언어생활을 하라”(3-4절)라는 형식을 빌려 수신자들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3절)라고 교훈한다.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음행”에 관한 말, “온갖 더러운 것”에 관한 말, “탐욕”에 관한 말은 화제로조차 삼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 여성 단수로 표기되고 있는 “음행”(포르네이아) “온갖 더러운 것”(아카싸르시아) “탐욕”(플레오넥시아)은 각기 다른 것을 뜻하는 단어들이 아 니라 다 성적 타락을 묘사하는 개념들이다. 포르네이아는 말할 것도 없이 성적으로 부도덕함을 나타내고(참조. 고전 5:1; 6:12-20; 7:2; 10:8; 고후 12:21; 갈 5:19; 살전 4:3; 비교. 골 3:5), 아카싸르시아 역시 성적인 죄를 가리키고(이 단어는 종종 포르네이아와 함께 등장함. 참조. 고후 12:21; 갈 5:19; 골3:5; 살전 4:3, 7), 플레오넥시아 또한 통제되지 않은 성적 탐욕을 의미한다(참조. 살전 4:6). 이러한 사실은 수많은 유대교 문서와 고전 문서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A.R. Lincoln, Ephesians, WBC 42[Dallas: Word Books, 190], 321-22를 볼 것).

우리 주변에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의 문화가 범람하고 있다. “음행”은 음란 행위들을, “온갖 더러운 것”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성적 문란행위들을, “탐욕”은 색(色)을 탐하는 사악한 욕망을 가리킨다. 부패한 성 문화가 거센 흐름을 이루고 있는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염된 성을 화제로 삼고 그것을 마치 즐기는 듯이, 마치 동경하는 듯이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류(類)의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단호히 삼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적 부패를 자극하는 부도덕한 노랫말과 홍보 언어, 시, 수필, 소설에 대해서조차도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믿는 자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 가운데 수많은 문화와 예술 등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비판의식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것들 속에 매몰되어 자기 속에 장착된 사법기관인 양심조차 무디어지고 사물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의 활동조차 회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또 다른 3가지 종류의 언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말들은 성도에게 마땅치 않으니 오히려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한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4절). 여기서 “누추함”은 누추한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은 앞 절에서 거론한 3가지 음탕한 말들을 새로운 3가지 단어(모두 여성 단수)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성적 음란 행위(“음란”)에 관한 말들은 추하기 이를 데 없고, 성적 문란행위(“온갖 더러운 것”)에 관한 말들은 어리석기 그지없고, 색을 탐하는(“탐욕”) 말들은 성희롱의 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저급하고 음탕한 말들을 삼가고 오히려 감사의 말이 우리의 언어생활의 핵심 내용이 되게 해야 한다. “감사의 말”(유카리스티아)은 여섯 개의 부정적 언어로 이루어진 사막 한가운데 나타난 오아시스 같다(Lincoln, Ephesians, 324). 감사는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간과 자연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의 말로 자신이 “새 사람” 곧 새로운 본성의 소유자인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둘째, 색욕을 좇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명심하라(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이 단순히 믿는 자의 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신학적 주제와 관련된 문제임을 역설한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절). 여기에 3절에서 사용되었던 동일한 의미의 3개 단어가 다시 등장 하는데, “음행하는 자”(포르노스) “더러운 자”(아카싸르토스), “탐하는 자”(플이이오넥테스)가 그것들이다. 3절의 세 단어가 모두 여성·단수인데 반해, 5절의 이 단어들은 모두 남성·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두 절 각각에 나오는 단어군 간에 보이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의미상 큰 차이가 없고, 단지 이 단어들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뉘앙스를 줄 뿐이다. 특히 “탐하는 자”에 “곧 우상 숭배자”라는 설명어가 따라 나오는데, 이 말은 구문론적으로 “탐하는 자”를 꾸며주는 것이 사실이다(비교. 골 3;5). 하지만 “탐하는 자”를 포함하여 세 단어가 모두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를 가리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상 숭배자”는 “탐하는 자”에게만 해 당된 것이 아니라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R. Schnackenburg, Ephesians: A Commentary[T & T Clark: Edinburgh, 1991], 219-20). 유대교 문서들 가운데는 “음행”(포르네이아)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Schnackenburg, Ephesians, 220).

그럼 더러운 색탐(色貪) 행위는 왜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나? 불신 남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성적 욕망은 그로 여성을 신격화하는 경향성을 갖게 하고(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신’[女神]이라는 말을 남발는가), 신격화된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는 자신을 위대한 신격(神格)으로 만들어 준다는 왜곡된 성의식(性意識)을 갖도록 부추긴다. 따라서 호색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할만하다. 그릇된 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온갖 신(神)들을 숭배하듯이 성적 욕구 충족을 갈구한다.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탐색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음행에 빠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부도덕한 성적 탐닉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택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성경의 가르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로서 그것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나라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소유자이며 동시에 미래적 소유자이기도 하다. 음란을 추구하는 자는 현재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을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종말의 때에도 그 나라의 영광과 부요를 상속받을 수 없다. 참으로 불편하고 부끄럽고 끔찍한 진실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존경받는 유명한 목회자가, 그토록 경건해 보이는 사제가, 해탈의 표상 같은 승려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교수가,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선행으로 감동을 선사한 고위 공직자가, 뛰어난 식견과 리더십으로 주목받는 정치지도자가, 한없이 친절하고 정의로워 보이는 전도사가, 자상하고 사랑 가득해 보이는 아버지가, 목숨이라도 줄 것 같은 친구가, 선량해 보이는 동네 아저씨가, 스타강사 소리 듣는 학원 선생이, 실력을 인정받는 과외선생이, 호기로워 보이는 직장 상사가 어찌 자기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폭행과 성희롱, 그루밍 성범죄, 부도덕한 음란 행위들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성적 부패란 너무도 전면적이어서 손바닥만큼의 안전지대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어찌 인간이 그토록 음탕한 생각을 가슴에 숨겨둔 채 뻔뻔스러운 얼굴로 사는 것인가? 어찌 그리 자기 몸을 가려주는 가림막만 쳐져 있다고 생각되면 인절미 한 조각을 훔쳐 먹듯 음란한 행동을 하려는 것일까?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음란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다면 그의 믿음은 헛것이다. 믿는 자가 그 나라를 잃는다면 한 평 누울 공간도 갖지 못한 빈털터리나 같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그 나라를 누리려면 성령 안에서 성적 정결을 유지해야 한다.

셋째, 헛된 말에 속지 말고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의 행위에 동참하지 말라(6-7).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속이는 자들의 행위에 동참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6-7절).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 두 절을 원문으로부터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6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느니라. 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동참자들이 되지 말라.” 앞 절들의 내용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바울은 모든 음란 행위가 발생하는 곳에는 고도의 기만이 작 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단들은 음란 행위를 거룩한 종교의식(宗 敎儀式)의 일부인 것처럼 기만전술을 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헛된 말들로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신이 헛된 말들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사악한 자들에게 속지 않는 것도 지혜다. 그리스도인은 특히 이단사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성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헛된 말들은 결국 현혹된 자들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를 거스르도록 만든다. 헛된 말들 곧 비진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비교. 롬 1:18).

그러므로 이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불순종하는 자들의 행위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오만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약화되고, 사명감이 희미해지고, 진리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자는 예리한 분별력 없이 비진리와 타협하고 돈과 명예와 권력과 색욕을 따라가기 쉽다. 진정한 새 사람은 과거의 관록에 의지하지 않고 오늘의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넷째, 빛의 자녀들로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라(8-14).

바울은 주 안에서 빛이 된 성도들이 이방인들처럼 부끄러운 일에 참여하지 말고 빛의 자녀들답게 살라라고 권면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바울은 어두움과 빛의 대조로 믿는 자의 과거와 현재를 묘사한다. 이 상반 개념은 요한복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바울 역시 이 대조를 즐겨 사용한다. 믿는 자들이 전에는 어둠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바울은 믿는 자들이 주 안에서 빛이 된 자들임을 확인시켜 주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당부한다. 믿는 자의 정체성은 “빛”으로 묘사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온통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항상 빛을 정복하려 한다. 빛이 물러가지 않는 한 어두움은 자체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빛과 어두움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상호간 대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는 이 팽팽한 긴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다. 그는 빛과 어두움의 격전장에서 결코 어두움에 의해 떠밀리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전가를 불러야 한다.

이제 바울은 믿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때 따라올 열매들에 대해 거론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절). 믿는 자가 선한 행실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의 문턱에 걸터앉아 돌처럼 굳어버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그 자체 역동성을 가진 것이어서 안팎으로 놀라운 변화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빛의 열매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10절). 이 거룩한 고민 없이는 주와 친밀해질 수도 없고 빛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주와 친밀한 영적 교감의 단계에까지 오르려면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믿는 자는 결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는 도리어 그것을 책망해야 한다(11절). 어둠의 일은 헛되고 무익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어둠의 일에 가담하거나 동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일에 각을 세우고 호통쳐야 한다. 어둠의 일들은 은밀히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은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럽고 거북하다(12절). 특히 3-5절에서 언급한 음란한 일들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 묵인하거나 방관하기 쉽다. 하지만 믿는 자는 그러한 행위들에 대해 책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어둠의 일들에 대해 과감하게 책망을 하면 그것들이 빛에 의해 드러나고 빛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13절).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14절; 비교. 사 26:19; 60:1-2)고 선언한다. 이것은 1세기 세례의식 중에 사용되었던 찬송문이다. 이 말은 어둠의 세계를 박차고 나와 그리스도의 빛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권면이다. 잠자는 자와 같은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부도덕한 이방인의 습성을 버리고 빛의 자녀들다운 삶을 살라는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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