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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해서는 안 된다!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7)
2020년 06월 08일 (월) 14:01:39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7. 믿는 자들의 영적 현주소(엡 2:1-10)

사람들은 흔히 “과거는 묻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자”라고 말한다. 이는 과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통스럽고, 들추면 들출수록 상처가 커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영적 측면에서 믿는 자의 현재상태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상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믿는 자가 자신의 과거상태와 현재상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미래의 삶을 어떻게 개척해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자신의 현주소에 대한 위치 인식과 함께 회고적 측면과 전망적 측면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려면 몇 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본문이 속한 큰 문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다고 한 진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우리의 본문 첫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리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큰 틀에서 하나님의 “힘의 위력”(엡 1:19)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믿는 모든 자들도 살리셨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여기에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 소망이 있다.

   
 

둘째, 바울은 1세기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에베소서를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밖의 교회 내에는 크게 현지인(헬라인) 개종자들과 흩어져 사는 유대인(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인) 개종자들이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 양상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1세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처럼 상대방에 대해 서로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멸시하였고, 이방인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오만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을 증오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기독교로 개종한자들의 교회 생활에도 은연중 이어지고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양대 그룹 간의 반목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바로 앞의 포인트와 관련하여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와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희는 거의 예외 없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때는 믿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독자들은 “너희”에 해당된 내용이든 “우리”에 해당된 내용이든 구별없이 자신에게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자신을 “이방인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동일시하고, 과연 내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 구원 받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럼 바울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무어라고 진술하는지 주목해 보자(1-7절).

첫째,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서 살리셨다(1-2 절). 믿기 전에 그들은 죽은 자들과 다름이 없었다. 인간은 몸이 움직인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가 진정으로 산 자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영적 죽음이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참조. 창 2:17).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처럼 그들을 또한 영적 죽음에서 살리셨다. “허물”과 “죄”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단지 “허물”이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모든 행위 즉 위법, 불법, 반칙, 과실을 가리킨다면, “죄”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의 진리를 거슬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이방인들을 소생시키시기 전에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 한마디로 그들은 “이 세상 풍조”를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 그들이 허물과 죄의 낙을 누리는데 세상 풍조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세상 풍조는 “남들도 다 그러는데 나만 유별날 필요가 무엇인가”라는 편리한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믿는 자는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좇아가서는 안된다. 믿는 자는 돈의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휩쓸고 다녀서도 안된다. 권력의 바람 따라 부화뇌동해서도 안된다. 명예의 바람 따라 위선과 기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려 해서도 안된다. 믿는 자는 세상에 부는 바람이 북풍인지 남풍인지, 강풍인지 미풍인지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방인들이 세상 바람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행했던 삶의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가 안긴 참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연장전이라고 착각하고 이 기간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하여 마귀는 여전히 불순종의 아들들가운데 잠입하여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무저갱으로 던져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귀가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 삶을 이끌어 가는지, 아니면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 안에 침투하여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감지할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은 지금 나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가 성령에 의해 조성된 생명 가득한 공기인지, 마귀가 예수 이름을 팔아 기만전술로 깔아놓은 독성 가득한 공기인지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이 온갖 허물로 인해 죽어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3-5절). 3절에서 “우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할례로 그 징표를 받은 자기들은 죄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릇된 의식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는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여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행함으로 육체의 정욕 가운데 넘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들 역시 그때에는 이방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직구를 던진다. 바울의 뜻은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 가운데는 자기 스스로 정해 놓은 몇 가지 신앙의 척도를 가지고 “나 정도면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자기로써 자기를 재면 언제나 만점일 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상의 권위 있는 척도는 없다.

바울이 보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거에는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육체와 마음의 소욕을 따라 행한 자들이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 가장 진솔한 행동이라고 부추기면서, 육체와 마음의 소욕을 지성소 안의 법궤라도 되는 것처럼 두둔하고 보호하려 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본적 질문은 “나”란 존재를 내 육체와 마음의 소욕에 믿고 맡겨도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고 지적한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을 산출한다고 지적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부패한 마음과 육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충실한 것 이전에 무엇이 나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져 살면서도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뻔뻔함으로 단련돼 있던 과거의 유대인들에 대해 바울은 그들도 이방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그들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지적은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이라고 하는 동일한 토대 위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다른 방식으로 의(義)에 이를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진노의 대상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의 크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그들을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선언한다(4-5절). 구원의 원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아버지로부터 끊김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끝까지 참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와 함께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리셨다. 바울은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는 말로 이 사실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은혜에 의한 구원”은 바울 복음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6-7절).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믿는 자들의 현위치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이다. 6절의 “함께 일으키사”는 5절의 “함께 살리셨고”를 변형시킨 것이다. 바울의 요지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그의 승귀와 연합하여 이미 하늘에 함께 앉히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믿는 자들은 이미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主) 되심과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곧 시들어 버릴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에 걸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라지고 수치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 지성소로 끌어 올려져 그리스도의 승귀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영적 현주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난과 부활과 승귀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실에 대한 앎의 문제이며, 확신에 관한 문제이며, 그에 바탕을 둔 삶의 문제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인식하고, 확신하고, 영적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을 수는 없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까지 끌어 올리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자비 안에 나타난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에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7절). “오는 여러 세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 올 수많은 세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인지해야 할 존재들이다.

이제 바울은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 가운데 한 중요한 테마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면서 1-10절 단락 전체를 마무리한다(8-10절). 그는 앞에서(5절 하반절) 이방인들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진술의 독특한 점은 바울이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단지 “은혜”만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믿음”도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당신의 의(義)를 받기 위해 믿음의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참조. 히 4:2). 바울은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그 어떤 오해도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구원의 출처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 구원이 인간의 협력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서 “이것은”은 원문상 앞에 나오는 “은혜,” “믿음,” “구원” 중 한 단어를 가리키지 않고 이 세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앞 문장 전체를 받는 지시대명사로 보인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으신 것은 인간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적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설계하셨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 일의 본질적 의미와 목적에 대해 언급함으로 단락을 마무리한다. 죽은자들의 영적 소생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비교. 갈 6:15).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와 동일한 솜씨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셨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부어주신 새생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들을 이루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 “너희”(이방인)와 “우리”(유대인)는 동일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토대 위에서 구원받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누구를 대하든 교만하거나 비굴해서는 안된다. 단지 우리는 과거의 배경과 상관없이 서로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며,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 승귀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들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신 새로운 피조물임을 깨닫고, 그가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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