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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벤처가 희망이다
‘미래 경제의 핵’… 재기를 꿈꾸며
2002년 11월 13일 (수) 00:00:00 윤길주 ykj77@joongang.co.kr


윤길주 / 월간중앙 기자

지난 1998년 가을 쯤으로 기억된다. 동료 기자 한 명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해 왔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터라 별 생각없이 식사 약속을 했는데 늘 활달하던 그 친구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속으로 “뭔가 할 얘기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근처 삼겹살 집으로 갔다.

그 친구는 내일 사표를 낼 예정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다른 회사로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벤처기업 이사로 간다는 것이다. 본인이 더 잘 알아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하고 이것 저것 따지듯 물었다. 그는 “연봉은 8천만원 가량이고, 스톡옵션(주식매수 청구권)을 받기로 했다”며 “조만간 몇 십억 챙기면 거하게 한턱 내겠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필자는 “아직 하룻 동안의 시간이 있으니 자신의 미래와 가족을 위해 한번 더 심사숙고 해보길 바란다”며 헤어졌다.

이후로도 많은 동료 선후배 기자들이 언론계를 떠났다. 그들은 앞서 말한 친구처럼 대박의 꿈을 안고 대부분 테헤란로로 향했다.

필자도 벤처기업을 취재하면서 많은 유혹을 받았다. 어떤 이는 거액의 선수금을 제시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주식을 싸게 주겠다고도 했다. 필자는 그러나 모두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곁에서는 큰 돈 벌 기회를 걷어찼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테헤란로로 수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이 제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과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우리나라에 벤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도 같은 ‘벤처 천하’였다.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 금광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 그것과 별반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금광을 실제로 발견해 떼돈을 번 사람은 과연 몇사람이나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그때 벤처에 뛰어들었다가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100명 중 10명? 아마 그것도 안 될 것이다.

벤처 열기가 한창일 때 필자는 미국의 벤처기업 사례를 조사해봤다. 그 결과 벤처기업이 생존할 확률이 5%도 안 된다는 점을 알았다. 100개 기업 중 95개 이상은 망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언론과 경제계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애써 침묵했다.

오히려 열기를 부추기기 위해 누가 대박을 터뜨렸고, 어떤 유망 벤처회사 주식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과 맞먹는다는 등의 들뜬 분위기를 계속 전파했다. 외환위기 이후 겨우 벤처 붐이 일어나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있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당시 벤처 굿판은 광란에 가까웠다.

이제 현실을 다시 보자. 그때 벤처로 떠났던 동료 기자는 가진 돈까지 까먹고 빈털터리가 돼 지금은 조그만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벤처를 직접 창업했던 또 다른 친구는 재산 다 날리고 지금은 실업자 신세다. 이들 뿐 아니라 당시 잘 나간다는 벤처기업인들 대부분이 지금은 쇠고랑을 차고 있거나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벤처기업의 집결지인 코스닥시장은 한때 지수가 200에 육박해 시가총액이 증권시장을 넘어서는 경이적인 기록을 내기도 했으나 지금은 지수 40선에서 허덕이고 있다.

왜 그렇게 비참하게 됐을까. 경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많은 벤처기업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건실하게 기업을 만들어 지금도 잘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기업의 첫째 조건은 누가 뭐라고 해도 수익성이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수익모델을 갖추지 못했다. 돈 버는 상품이 없다는 뜻이다. 그저 거창하게 ‘인터넷 사업을 한다’고 해놓고 비싼 사무실을 빌리고, 직원을 채용했다. 그리고는 팔 상품이 없으니 그럴듯하게 광고를 내 투자자를 끌어모아 돈을 긁어들였다.

모은 돈을 제대로 썼더라면 괜찮다. 일부 벤처기업가들은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서 그런지 투자자 돈으로 밤마다 호화 룸살롱을 전전하는 등 사욕을 채우는 데 물쓰듯이 낭비했다. 투자자의 눈물어린 돈을 제 지갑에 넣고 다니며 맘껏 뿌린 것이다.

대부분 벤처기업가들은 경영 마인드가 없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회사 경영이 방만하거나 사업주가 공금에 손을 대면 배겨나지를 못한다. 벤처 붐이 한창일 때 대다수 벤처기업들은 투자금을 모으거나 주가가 뛰어 살림살이가 넉넉했다. 이런 수익금으로 재빨리 신규 기술개발에 투자하거나 유망 사업에 나선 벤처들은 견실한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대부분 벤처기업들은 굴러온 돈을 모두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정부의 벤처 정책도 문제가 많았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굴뚝 산업’ 시대는 갔다며 벤처를 띄우는 데 열을 올렸다. 국가 예산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주고, 무차별적인 혜택도 따랐다. 한때 테헤란 밸리 주변 술집 마담들 사이에는 “국민 세금이 술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벌써 겨울이다. 올 겨울은 벤처기업들에게 유난히 춥고 혹독한 날이 이어질 것 같다. 벤처 업계에서는 연말 대란을 걱정하고 있다.
코스닥 벤처기업들은 현재 유난히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진 데다 세계적인 IT 산업의 불황으로 자금 순환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닥 벤처기업 351개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3%나 줄었다. 이중 40%인 141개사는 적자를 냈다. 또 코스닥 벤처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3.4%로 다른 일반 기업의 7.9%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필자는 벤처기업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벤처기업은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한다. 미래 우리 경제의 핵은 역시 첨단 정보기술이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은 말 그대로 ‘모험 기업’이다. 실패가 두려워 망설인다면 그것은 이미 벤처기업이 아니다.
다만 전제가 있다. 기본과 상식에 충실한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익성을 냉철히 판단하고, 경영을 엄격하고 투명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하는 게 살 길이다. 허황된 대박의 꿈을 좇아 간판을 올린다면 백전백패할 따름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이라고 한다. 벤처업계로 떠났던 친구들이 걱정이다. 그들이 약속대로 상 떡 벌어지게 한번 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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