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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3)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3)
2020년 05월 15일 (금) 15:47:37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큰 무리에 대한 언급으로 볼 때, 우리가 7:1-4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에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도 요한이 진노의 한 복판에서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드라마는 단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사천‘에 관한 음성을 천사로부터 들은 후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더 크고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두 무리를 7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7:4-8에 나타나는 ‘144,000’의 그룹이고, 둘째는 7:9에 나타나는 ‘큰 무리’의 그룹이다. 이 두 그룹에 관한 사 도 요한의 설명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들은 것’과 ‘본 것’의 차이가 있다. 7:4-8에 나오는 그룹, ’십사만사천‘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단지 들었을 뿐이라고 증언하다.40) 그러나 7:9 이하에 나오는 ’큰 무리‘(οχλος πολυς) 그룹에 관한 것은 그가 친히 본 것이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이 ’들었다‘고 한 것과 ’보았다‘고 한 것의 차이는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인 맞은 자들의 수는 144,000으로 셀 수 있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 요한이 보게 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많은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하였다. 데이비드 온(David E. Aune)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7장에서 ‘144,000’이라는 숫자(4절)와 ‘셀 수 없는 숫자’(9절)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셀 수 있는 숫자’와 ‘셀 수 없는 숫자’의 차이점은 엄청난 것이다. 비슬리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이스라엘의 십사만 사천이 각 나라에서 온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대체되었다"고 하였다.

   
 

셋째, 구성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7:4-8에 나오는 ‘144,000’의 그룹은 오직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았던 '큰 무리'의 그룹(9절)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모여 온 무리였다“고 했다. 사도 요한이 9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나오는 중요한 표현이다. 우선 ‘각’이라는 단어 ‘πας’는 ‘모든’(all)이라는 뜻이며,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네 단어 모두를 수식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는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백성’ ‘모든 방언’에서 온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선교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7장 초두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십사만 사천'을 다루다가 그 초점을 ‘큰 무리’의 비전으로 향하게 된 것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7장 초두에서 다루고 있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수주의적 관점’(particularistic viewpoint)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오는 ‘큰 무리’의 비전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이 고, 선교적인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은 유사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차이가 많이 나는 개념들이다. 먼저 나오는 ‘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트노스'(εθνος)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국토나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진 '국가'의 개념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선교는 무엇보다 인종적인 장벽을 넘어가야 하는 사역임을 암시한다. 선교 사역을 통해 유대인이 혐오하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일어날 것이다.

또한 '족속'이라는 단어는 '훌레'(φυλη)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종족’(tribe, clan)이라는 개념이다. 선교는 다양한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가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문화가 아닌 수많은 이방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구원받는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라오스’(λαος)라고 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을 총칭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그는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백성'이라는 단어가 바로 '라오스'이다. 예수님이 구원하실 대상으로서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은 단지 특정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언'이라는 단어는 '글로사'(γλωσσα)라고 하는데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 전 세계의 언어의 숫자가 7,100개 정도로 보고 있다. 선교는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7,100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여기 사도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단어들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큰 무리라는 보편성이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의 사중적인 구분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특정한 백성, 특정 한 민족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구성된 민족 교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권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9절에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의 비전은 언제 완성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두 찾게 될 때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는 그 목표를 향하여 역사의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고 언젠가는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 가운데 모든 족속’(παν τα εθνη)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선교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민족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선교는 쉬지 않고 진행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진행 되었던 선교가 이제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가 완성이 되고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구원함을 받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1)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된 큰 무리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어떤 인종이든지 상관이 없이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9절). 여기 ‘흰 옷’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보좌 앞에 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정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종교적인 정결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스스로의 어떤 수양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했다(14).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환난과 고통을 겪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의 피가 그들을 보좌 앞에 설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에 관하여 “사람들이 적절한 예복을 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죽으심이 그 근거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특징은 그들이 모두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 린 양에 서있다”는 것이다(9).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도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다”고 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외침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구원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섰을 때에도 그들은 모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이 만왕의 만주의 주가 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9절). 사도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적인 교회는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함을 받아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선교 그 자체가 아니다.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교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전 세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선교의 가장 큰 열매는 열방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우상 숭배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참된 예배자로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가 무너진 곳에 선교가 존재하고, 예배가 회복된 곳에는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사도 요한은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원하심을 받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소리로 찬양을 드리게 것이다(9절). 이 장면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온전히 회복이 된 하늘에서의 종말론적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선교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여 온 우주적인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드리는 찬양의 내용은 무엇인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10절). 이 무리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찬양을 드린 것이다.

3) 하나님만 영원히 섬기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의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큰 무리의 비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15절)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선교도 중단되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중 단 되지만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 ‘섬긴다’는 말은 ‘라트류오’(λατρευο)라고 하는데 마태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신명기 6:3을 인용하시면서 사탄에게 명령하시는 말씀 속에 사용하였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은 ‘하나님만 높이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밤낮 섬긴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이상 우상이나 땅의 어떤 것을 섬길 수 시간이나 기회가 따로 없을 것이다. “밤낮”이라는 시간은 휴식이나 중지가 없는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시도하거나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4) 영원토록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언제나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에게 선한 목자가 되심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구약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자주 사용되는 은유이다. 사도 요한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었다.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은 양들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는 성도들을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 또한 “어린양에게 속한 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떠나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선한 목자이신 어린양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7:17에 보면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은 큰 무리에 대해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샘으로 인도하시고...”라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16절). 어린양의 인도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선교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하나님의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 타락하고 동산 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므로 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는 한 번도 좌절되지 않고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찾으시고 그들을 모두 예배하는 자로 세우실 때 하나님이 시작하셨던 선교는 완성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러한 선교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뛰게 한다. 하나님의 선교적인 비전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삶의 현장을 뚫고 나가는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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