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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소식
‘가계저주론’ 이윤호 목사의 반론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반박(1)
2003년 06월 11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본지는 ‘계저주론’비판에 대한 반론 성격의 이윤호 목사의 글을 4회(39호∼42호)에 걸쳐 게재했다. 이에 대해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가 반박 글을 보내와 동일하게 4회 연재한다. 정 교수는 월간 <교회와신앙>(99년 8월, 10월, 2000년 3월호)에서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에 나타난 비성경성에 관해 기고한바 있다.    <편집자 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가운데 “주님이 모든 민족들 앞에서 자신의 팔을 나타내실 것이고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구원을 볼 것이다”(사 52:10)고 말한 적이 있다. 750여 년이 지나서 예수님의 삶과 수난, 죽음에서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누가는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부분에 이 말씀을 인용해 놓았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현실로 나타났다.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들이었다. 오래 동안 계획되고 준비된 일들, 선지자들이 멀리서 보며 기대하며 예고했던 일들이었다. “때가 차매”(갈 4:4)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각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은 이렇게 시작된 복음(시대)의 축복과 영광을 여러 가지 형태로 찬양하고 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눅 1:68).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눅 1:7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말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 2:30). 예수님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구원을 이루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는 말씀을 읽으시고 “이것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선언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신약성경의 강조점을 하나하나 살펴갈 때 이윤호가 말하는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 안에 설 곳이 없다. 신약시대는,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우리 시대는 복과 저주가 대비되거나 저주나 심판이 사람을 위협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 사랑, 은혜가 나타난 때이다.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신 것과 함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는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니 이제 저주는 없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이 세상을 정죄하려는 데 있지 않고 용서하려는 데 있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었고 나타났으며 이 땅에서 실체가 되었다.

이 영적 풍성함을 젖혀 두고, 저주의 결과로 병이 생기고, 불행이 일어나며, 건강을 해치고 사업을 망친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멀쩡한 사람들에게 그 치유를 독촉하는 발상은 도무지 기독교적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도 아니고 기독교적 기대나 체험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욕심에 뿌리를 둔 현세, 물질적 축복관과 그 짝이 되는 개념으로서의 현세, 물질적 저주관을 마치 기독교적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신약에서 아무런 구실도 못하는 유전자, 가계, 가문, 족보, 혈통을 신앙과 삶의 주도적 개념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 족보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가정의 기초인 결혼까지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신약성경이 아니던가? 신약성경이 가정을 주목하는 것은 가계나 혈통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가정이 가진 언약 공동체의 기능 때문이다.

이윤호는 “가계의 복과 저주”를 붙들기 위하여 이 위대한 복음의 특색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구약시대/구약성경으로 돌아가 신약과 기독교 복음까지도 구약적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교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는 아니다. 아니 필자가 이미 여러 번 지적한 대로(“이윤호의 가계 저주/치유론 비판”, <교회와신앙> 1999년 10월호,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 하나님. 이윤호의 가계 저주/치유론 비판 2”, <교회와신앙> 2000년 9월호,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있는 사람들”, <목회와신학> 1999년 12월호, “하나님의 사역인 축복과 저주”, <목회와신학> 2000년 3월호) 이윤호는 구약성경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 “복과 저주”란 단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적당히 연결했다고 해서 이것이 성서적 진리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윤호는 성경에서 복과 저주란 단어가 같은 절에 38번이나 등장한다는 사실을 그의 주장의 성서적 기초로 삼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성경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논리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성경연구 초보원칙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십 명의 인간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들은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 살았으며 다른 상황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누가 썼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이 다른 단어로 표현될 수도 있고 같은 단어에 다른 개념을 담았을 수도 있다.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한 개인이 자기 생각, 자기 언어 체계를 따라 이해하고 마구 짜맞추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당시 저자나 독자들이 그들의 상황에서 사용하던 단어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 시대의 언어로 재생하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이다. 한 단어나 개념이 시대나 장소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이러한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는 바로 이러한 발전, 아니 큰 도약이 있었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를 단순히 시간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설명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흘러가는 것이어야지 신약시대에서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구약에 대한 신약적 해석은 가능하지만, 신약에 대한 구약식 해석은 모순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 된다.

이윤호의 가계의 복과 저주의 이론은 이 모든 원칙들을 무시하였다. 신약을 구약적으로 해석한 것이 치명적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설명할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개념에 대하여 구약에서 신약으로 발전한 과정을 추적하지 않고 신약의 내용을 구약적 범주 안으로 몰아넣은 것이 과오였다. 그 결과 가계의 복이 존재하고 따라서 가계의 저주도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가계, 혈통, 민족, 나라 등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데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심으로 그의 피부색, 그로 인해 만들어질 가문과 혈통, 나라가 함께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까지도 민족적, 국가적 색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국가의 기본 개념은 가계, 혈통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윤호가 주장하는 그런 가계의 저주, 가계의 축복은 - 위에 소개한 글들에서 밝힌 것처럼 - 구약성경에도 없다.

신약시대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로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심으로 모든 국가적, 민족적, 혈통적 경계선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가계, 가계의 축복, 가계의 저주란 신약시대에는 아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그런 용어조차도 생소하다. 신약시대에는 혈통으로서의 가계, 가족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로서의 가정이 중요시된다. 이 과정을 이윤호는 오히려 역행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가끔 나오는 가족적 회개의 장면들을 - 잘못 이해한 - 구약적 가계 축복/저주로 환산해 버린 것이다.

복과 저주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즉 상호보완적 개념이라는 설명도 잘못된 것이다. 둘은 상호보완개념이 아니라 반대개념이다. 복이 있는 곳에는 저주가 없고, 저주가 있는 곳에는 복이 없어야 한다. 이윤호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에는 하나님의 통치행위로서의 복과 저주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지만 - 사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비성경적 개념이다 - 하나님의 축복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용서와 화해, 대속과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하면서 더 이상 저주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주와 심판의 끝을 뜻하기 때문이다. 복과 저주는 함께 가는 개념이 아니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사탄의 나라는 이미 정복되었다.

이윤호의 가계저주론/가계치유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이 이미 오셨는데 이미 사라진 어둠을 있는 것으로 보게 하고 착각에서 나온 그 어둠을 있는 힘을 다해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새 시대에 이제 저주는 없다. 영적 저주도 없고, 육적 저주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쓸데없이 내뱉는 욕설이 있을 뿐이다. 가계를 타고 내려오는 그런 저주를 신약성경은 알지도 못한다.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마련하신 용서와 은혜와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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