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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김대옥 씨 반성경적 ‘이단’으로 규정
42회(2019) 총회, 동성애와 이슬람 옹호, 구원론 등 이단적 주장
2019년 10월 02일 (수) 13:15:00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총회장 장종현, 이하 백석) 총회는 지난 2019년 9월 2일부터 4일까지 진행된 제 42회기 총회를 열고 한동대 교목으로 재직한 바 있는 김대옥 씨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 김대옥 씨(사진 JTBC 뉴스룸) 

백석은 김대옥 씨에 대해 “전 한동대 교목으로 재직하였으며, 동성애를 죄라 하지 않고 옹호하고, 신론 구원론 등에서 이단적인 주장을 하며, 특히 이슬람에 관하여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며 “이에 김대옥 목사를 반성경적 사상을 가진 이단으로 규정하고 참여금지를 결의(한다)”고 밝혔다.

김대옥 씨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서 안수, 호남신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대학교(Th.M), 계명대학교 대학원(Ph.D) 등에서 공부했으며, 전 한동대 법률대학원 교목, 2017년 한동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은 김대옥 씨의 인간론, 구원론, 신론 등에서 이단 사상이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 “꾸란과 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인정”하는 등의 김 씨의 사상을 비판했다.

백석이 언급한 김대옥 씨의 이단 사상의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다.

[ 1. 인간론에 나타난 이단성
➀ 원죄를 부정한다.
➁ 인간이 죄인인 것을 부인하며
➂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2. 구원론에 나타난 이단성
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 구원론을 주장한다.
➁ 구약의 구원은 노예에서의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➂ 복음을 경제적 분배 차원으로 변질시키며 경제적 질서를 전복하는 희년 복음을 주장한다.
➃ 재산 분배에 의한 물질적 구원을 주장한다.
➄ 부자들은 재산을 나눠 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➅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약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➆ 성경의 율법을 경제 분배의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➇ 부자는 구원 얻지 못한다는 이상한 구원론을 주장한다
➈ 구약의 제사가 당대의 문화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3. 신론에 나타난 이단성
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신다고 주장한다.
➁ 하나님은 악과 지옥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➂ ‘진멸’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을 부족주의 세계관이라고 폄하한다.

4. 예배론에 나타난 이단성
예배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5. 성경의 권위를 부정한다.
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부정한다.
➁성경의 기적과 핵심 사건을 부정한다
➂ 성령의 잉태와 십자가 죽음과 재림과 부활을 문자주의 해석이라고 폄하한다.
➃ 오병이어, 칠병이어 사건에 대하여 인본주의적 해석을 한다. 기적이 아니라 나눔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➄ 기독교교리가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정의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한다.

6. 압제에 저항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➀ 한나의 노래가 저항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➁ 예수님의 사역을 압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➂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평화적 대응이었다고 주장한다.
➃ 과부의 기도 응답의 교훈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해석한다
➄ 십자가를 사회 저항의 시위라고 주장한다

7. 이슬람에 대하여 반성경적인 주장을 한다
➀ 꾸란과 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인정한다.
➁ 꾸란과 성경을 동일한 권위로 거룩한 문서로 인정한다.
➂ 꾸란과 성경을 동등하게 여겨,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부정한다.
➃ 성경의 목적이 “인간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렸다는 꾸란의 주장을 인정한다.
➅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꾸란의 주장을 인정하며,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다.
➆ 예수님을 보편적 구원자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부정한다.
➇ 이슬람과 기독교는 조상, 기원, 전통, 하나님이 같으므로 형제 종교라고 주장한다.
➈ 예수님과 무함마드를 동일한 개혁자로 동등하게 여긴다.
➉ 이슬람의 이단성을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주장을 ‘이슬람 포비아’라고 비판한다.

8. 김대옥 목사는 다음과 같이 동성애를 옹호한다
➀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문자적 해석을 비판하고 거부한다.
➂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➃ 성경을 가난한 자와 창녀와 같은 억압받는 자들 편에서 해석하는 것을 정당하고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➄ 정통신학은 여성을 혐오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➅ 성적지향(동성애)을 하는 자들이 폭력적 현실과 엄혹한 현실을 살고 있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진정한 자유와 회복들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➆ 김대옥 목사는 한동대 ‘들꽃’ 동아리 지도교수를 담당했다. ‘들꽃’ 동아리는 친 동성애, 페미니즘, 젠더이데올로기 단체다.

결론 : 김대옥 목사는 성경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이다. 

김대옥 목사는 ‘인간론’, ‘구원론’, ‘신론’ 등의 핵심적인 교리에서 크게 잘못된 사상을 가르치며 이슬람과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단이다. 김대옥 목사는 성경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부정하고 현실적 문제로부터의 현세적인 구원을 주장하며, 성경과 예수님이 이런 현실적인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김대옥 목사의 주장은 명백한 반(反)성경적 이단적 사상이므로 그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가르침을 받지 않도록 김대옥 목사와 일체의 교류와 참여를 금지하여야 한다. ]

다음은 김대옥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백석 교단의 연구 보고서 전문이다.

김대옥 목사의 이단성 조사보고서

1. 인간론적 이단성 

➀ 원죄를 부정한다. 

좀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첫 번째 죄 용서에 있다 라고 한다 할 때에, 만약에 죄 용서가 이 세상에 우리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그런 보편의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예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라고 하는 그 은혜의 복음이 여전히 우리에게 선포되고 적용되어야만 할 겁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가 원죄론이니 하면서 그렇게 정죄하기 익숙한 메시지를 예수님은 오히려 무색하다 할 정도로 “죄 없다”, “죄 사함을 받았다” “나도 너희를 정죄치 않는다” 하셨던 분입니다.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또 하나의 심각한, 아까 언급했지만 원죄의 굴레들 이예요. 이건 더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없네요. 어떤 학자는 지독한 연좌제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왜 한 적도 없는데 괜히 우리 조상이 뭐 했다고 그렇게 나까지 ..되고 말이죠. 결국 문자주의가 인도하는, 다섯 번째로 문자주의가 인도하는 창조사건의 해석의 결론이 뭐냐? 하나님의 실패, 무능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고귀한 인간이 타락해 버리잖아요. 하나님은 그러니까 실패한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죽음을 경험하게 되잖아요.

보시기에 그토록 좋았던 모든 피조물이 하루아침에 그것도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아버리잖아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날벼락입니까? 그렇게 아름답던 이상향이었던 에덴이 그 첫 번째 입주자였던 아담과 하와를 추방해 버립니다. 이게 뭡니까? 무슨 어마어마한 새 아파트 지었는데, 첫 번째 들였다가 그냥 쫓아내 버린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이 문자주의로 읽어질 때에 생겨날 수 있는 폐해. 하나님을 결국 실패자라고 밖에 몰아붙이는 격이 되고 만다라고 하는 것이죠. <김대옥 설교, 건강한 신앙을 위한 성숙한 성경읽기 2017. 9. 17.>

비판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원죄를 말씀하신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원죄를 부인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➁ 인간이 죄인인 것을 부인한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성경대로 하자면 죽임을 당해야 할 여인에게도 “나도 정죄치 않는다” 선언하시면서, 그를 보호하시고 자유케 평안히 가라 하셨던 그 예수님. 오늘날 교회는 이상하게 그 죄 용서의 복음의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교회가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보호하시고 자유케 보내신 그 여인들을 뒷골목에서 돌로 쳐 죽이는 일을 비일비재 행하고 있어요. “이거는 죄야, 동성애가 죄야, 뭐 낙태가 죄야, 뭐가 죄야” 왜 그렇게 교회가 죄에 사로잡혀 있는지. ‘죄론’에 사로잡혀 있는지. 예수님이 그토록 죄 없다 하기를 애써 탄핵까지 받아가면서, 신성모독이라는 탄핵까지 받아 가면서 까지도 죄없다, 죄없다 죄없다하면서 사유하고 계시는데, 그 예수를 믿는 교회가 여전히 정죄의 초점으로 성도들을 다루고 있다면, 교회는 다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진짜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의 신학을 바꾸고, 교회의 메시지를 바꾸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바꿔 주셔야만 합니다.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비판

김대옥 목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에게 죄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명확하게 ‘구원파’와 같은 맥락의 이단 사상이다.

죄 용서는 철저히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눅18:14)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자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➂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더더욱 중요한 얘기는 그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의 죄와 관련해서 성도들의 삶을 보십시오. “성도들, 당신들 죄인입니다”라고 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오히려 그 죄의 현실의 희생자들입니다. 네?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의 성도들이 실제로는 죄인들이기 보다는 죄의 현실의 희생자들이예요. 오히려 용서가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더불어 섬’이 필요한, 정죄가 아니라, 그러니까 정죄가 아니라 용납하고, 더불어서 그 죄의 현실과 악의 현실에 맞서 연대해야만 하는 그런 현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비판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게 되면, 구원에 대한 개념도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구원이 필요하겠지만, 인간이 죄의 피해자라 전제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 없게 되고, 구원이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세상과 환경을 바꾸는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구원론적으로 심각한 이단론이다.

2. 구원론적 이단성

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 구원론을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이 땅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의 죄와 그 파급 효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는 회복의 메시지로서, 그것은 바울처럼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각을 가진 성도들의 누룩 역할을 통해 확산됩니다. 또한 그것은 한국인, 기독교인, 장로교인 등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 지구인들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심지어 불교도나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무속신앙인과 같은 타종교인들이라도 그 기쁜 현실로부터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회복하도록 초청하는 엄청나게 좋은 소식입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38-39쪽>

비판

성경은 예수를 믿는 길 외에 구원 얻는 다른 길은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이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이단설이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➁ 구약의 구원은 노예에서의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가만히 생각해 봐요 구약의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거든요.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 구원의 반석, 심지어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 우리를 구해 주세요 라고 간구할 때 ‘구원’이라는 이미지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매해마다 기념하는 구원의 사건이 뭔가요? 출애굽입니다. 자 출애굽이 뭐로 부터의 구원인가요?
죄로부터의 구원인가요? 노예 됨으로부터 자유와 해방됨이죠. 즉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지금도 유월절이라고 하는 연례 명절을 통해서 지금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구원 사건에 대한 그 이미지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예요.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애굽의 노예 된 것이 아니었잖아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예요. 바로 외부적인 악이 실제로 그들을 노예되고 종 삼았던, 그래서 그 고통에서 아우성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노예였던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구원해 버리는 건저내시는 바로 그런 그림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시다”라는 선언 속에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함께 느끼고 공유하고 있는 구원의 실체가 바로 그런 종 됨, 여기서 말하는 포로됨, 눌림, 눈멈, 그렇죠? 그리고 상함. 기타. 모든 것들로부터의 구원을 기억하고 있어요.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두 번째 어마어마한 사건이 포로 귀환이잖아요? 그 때는 성경은 그건 죄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결국은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가고 멸망당하죠. 그러나 그 멸망 상황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들을 포로로부터 귀환하게 하시죠. 그러니까 구약성서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마다 전제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실제적이고 현세적이고 구체적이예요.
그리고 삶의 총체를 아우르고 있어요. 단순히 개인이 “나 죄 때문에 구원이요”를 말할 것도 없고, 온 민족과 더불어서 공동체와 더불어서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총체적으로 제시해 주시는 온전케 함의 현실이란 말이지요.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비판

김대옥 목사는 출애굽 사건을 들어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구원의 개념은 죄로부터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악한 것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며, 또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피하고 구원 얻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김대옥 목사가 이것을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로 해석하는 것은 출애굽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구원을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➂ 복음을 경제적 분배 차원으로 변질시키며

경제적 질서를 전복하는 희년 복음을 주장한다. 예수님이 그 얘기를 다시 꺼내들고 계시는 거예요. 아까 포로 됨의 정치적인 맥락 사회적인 맥락이었지만, 여러분, 희년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구체적인 경제적인 현실이잖아요. 기울어진 빈부격차에 의해서, 아니면 경제적 제도와 질서에 의해서 기울어져 버리고 망가져 버린 현실에 원위치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각 가정마다 원래 분배해 주었던 자기의 땅 기업 다 돌아가게 하는거예요.
어마어마한 현실 아니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복적 복음이라고 해요. 뒤엎어버리는. 다 뒤틀려 있고 왜곡되어 있는 질서를 다시 온전케 회복시켜 주는 전복적 복음이라고 그래요.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희년과 같이 경제적인 회복에 있다면, 오늘도 적어도 모든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현실에서 구원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적어도 성서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아 오신 이유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팔복에서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하신 분입니다. 심지어 반대급부에 있는 부자에게 화 있다 선언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겨우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에게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선언하신 분입니다.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그 의미는 부조리와 악으로 창궐한 이 세상 질서가 곧 끝난다는 사실을 반영했습니다. 불의하고 억압하는 현실 속에서 죽으면 천국 간다. 조금만 인내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46쪽>

비판

예수님은 메시야의 사명을 경제적 분배나 현실적 가난의 해결이라고 설명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은 재산의 분배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눅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서신서에서 사도들 중에 아무도 ‘희년’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물질적인 재분배’와 아무 상관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➃ 재산 분배에 의한 물질적 구원을 주장한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나눠 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변질된 복음을 주장한다.

어마어마한 부자였지만 자기의 가진 것을 온통 가난한 자들에게 절반을 떼어서 나눠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를 갚겠다 했던 당대의 매국노로 여겨졌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당연히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희년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 삶 속에 구현되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김대옥 설교, 예수께서 오신 이유 2017. 12. 10.>

비판

삭개오가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말한 것은 구원의 결과로 나타난 행위인 것이지, 재산을 나눠 줌으로써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➄ 부자들은 재산을 나눠 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 어떻게 동시에 부자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부자들의 특별한 방식의 결단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 말씀하신 ‘희년’을 즉각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가 부자인 것은 (곧 토지와 노예와 자본 등) 그가 하나님의 희년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레25장).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 하나님 나라를 사야만 합니다(19:21, 10:21, 18:22). 그 소유한 것들을 내어 가난한 이들에게도 자신이 누리던 복이 되는 현실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부유하게 살아가는 동안 가난을 세습해 오던 가난한 대중들에게 희년이 기대하던 분배적 평등 현실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47쪽>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의 특성을 요약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부유한 자들에게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적용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팔아(나누어) 가난한 자들이 현재 직면해 있는 지옥의 현실천국의 현실로 변화시킴으로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들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에 나 있던 거대한 간격은 해소되는 것입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54쪽>

비판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써 복음이 부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는 주장은 바꿔 말하면 부자들이 재산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복음이 부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며, 이것은 부자들이 재산을 가나한 자들에게 나줘 주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잘못된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복음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김대옥 목사의 주장은 복음을 고작 재산 분배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이다.

➅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약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러분 복음은요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예요.. 중략.. 누가 안식일을 못 지킬까요? 여러분, 여러분의 공동체가 유대교라고 생각해 봐요. 여러분 공동체가 안식일을 위반하면 사형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엄한 규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못 지키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서 1세기 팔레스타인으로 한 번 돌아가 봐요. 누가 안식일 날도 일해야 할까?
저 같은 사람은 오늘날 안식일 날 주일날 일하지 않아도 돼죠. 그래서 오늘도 예배에 와 있어요. 주중에만 일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누가 오늘날도 주일날 이른 새벽부터 노동 현장으로 나갈까요? 나가야만 할까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죠. 가난한 노동자들인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누가 음식법을 위반할까요?
하나님이 분명히 더럽고 가증한 음식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음식 먹고 싶겠어요? 가증한 음식이라고 우리 문화가 규정하고 있는데? 그러나 누구는 그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역시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 누가 여러분 그런 부정한 자들을 성결법에 의해서 부정한 자들로 치부되었을까요? 가난하면 먹지도 제대로 못하고 위생을 제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더 병들고 더 고통을 받게 돼요.
누가 십일조나 제물을 드리지 못할까요? 역시 가난한 자들이예요. 누가 자기 스스로의 몸을 팔며 그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창녀의 삶을 살아가야 했을까요 그 옛 시대에도? 가난한 자들이예요. 결과적으로 성경은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책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 역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들 편에서 또는 약자들 편에서 쉽게 말하면 억압 받는 자들 편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고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김대옥 설교, 예수님의 성경읽기를 배운다 2017.10.23.>

비판

김대옥 목사는 ‘가난한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산이 없는 자’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복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➆ 성경의 율법을 경제 분배의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이 땅의 고난 받는 이들의 현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 준수를 통해 고아와 과부, 나그네(외국인), 레위인과 가난한 이들을 보살필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탐욕스런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고스란히 내팽겨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 차원에서 해답을 제시한 것을 넘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제자들’의 본과 전형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소외된 땅, 흑암의 땅이라는 대명사로 불리며 배척되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곳, 나사렛’이란 소읍에서 가난한 노동자(목수, 석수-건축노동자)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51쪽>

비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지,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➇ 부자는 구원 얻지 못한다는 이상한 구원론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단연코 부자들에게도 동일한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에 의하면,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진술에 당혹스러워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았던 이들은, 구원이 ‘예수 믿음’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부자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선언으로 변조하고 위무했습니다<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47쪽>

비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하신다. (롬3:23) 가난한 자도 부자도 다 죄인이며, 가난한 자도 부자도 모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을 가르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은 복음을 심각하게 변질시킨 이단 사상이다.

➈ 구약의 제사가 당대의 문화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볼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우리 구약성서의 유일한 길은 동물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죠. 오늘 현대 사회에서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동물 희생제사가 필요하다 라고 말한다면 누구도 그 종교를 우리 현대 사회의 합당한 종교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고대 사회에는 유대종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대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신께 나아가는 길로서의 동물 희생제사나 심지어 인신제사까지 그건 매우 당연한 하나의 종교적 제의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서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로서의 동물 희생제사가 전제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당대의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했고 또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에게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등등의 모든 길들은 바로 그러한 길로서 이해되어 있었구나 라고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김대옥 설교, 예수님의 성경읽기를 배운다 2017.10.23.>

비판

구약 시대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었으며,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하는 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누렸다. 신약시대에 들어서 제사가 폐지된 것은 사회적인 문화나 인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히브리서는 제사가 폐지된 것이 사회적 문화나 인식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로 인하여 폐지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김대옥 목사가 구약의 제사를 당대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해석한 것은 ‘제사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사실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다.

3. 신론적 이단성

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신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이 부딪히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 편에서 해석하냐면 인간 편에서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좀 위험하게 들릴지 몰라요. 여러분, 안식일이 사람 위해 있는 거예요? 그 말이 바로 그 말 이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 같은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 각자를 위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란 말이예요.
기독교가 우리 위해 존재해야지, 우리가 기독교 위해 존재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더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위해 존재하시지 우리가 하나님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예요. 잘 생각해 봐요. 우리가 하나님 예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의존해서 존재하고 의존해서 살다가 결국. 온통 하나님이 그렇게 행해 주심으로 우리가 살고 기동하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그걸 다 아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자유롭게 허락해 놓으셨는데도 간혹 성서해석이 그릇되면 우리는 종교 위해 존재하고 우리가 신앙 위해 존재하고 뭐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를 오히려 자유케 하기보다 도구화 하죠.
우리를 저주하려 들고 이런 일들이 우리 종교 아니면 정치 무대, 경제 무대에서 우리 사회 무대에서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김대옥 설교, 건강한 신앙을 위한 성숙한 성경읽기 2017. 9. 17.>

비판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김대옥 목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성경에 없는 참람한 주장을 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인간 위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라는 망령된 이단적 주장이다. 결국 성경은 인간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편한 대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하고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성경을 보게 만드는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사상이다.

➁ 하나님은 악과 지옥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악’과 ‘지옥’에는 상관도 없으시다. 그분이 관심하고 제시하며 초청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요, 그 잔치다. <김대옥 저서, 갈릴리로 오라 234쪽>

비판

성경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시며, 성경은 분명하게 지옥의 형벌에 대하여 강하게 경고하신다.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➂ 진멸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을 부족주의 세계관이라고 폄하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적어도 초창기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리가 그것을 ‘부족주의적 세계관’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주 제한된 우리만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즉 그 말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지 옆에 있는 블레셋 민족의 하나님은 아닌거예요.
그들에게는 다곤신이라고 하는 신이 또 있어요. 모압이나 암몬 같은 몰렉 그모스 같은 그들의 신들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모든 민족 모든 세계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세계관이 점차 나중에 발전하지 초창기에 이를테면 유대인들이 우리 하나님이야 라고만 붙들고 있던 그 신앙 가운데서 그들은 언제든지 바로 저 이민족 즉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저 이민족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멸이 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 오늘도 우리와 생각을 달리하고 종교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거하고 정복전쟁을 펼칠 수 있다”고 하는 모종의 신학적 전개를 한다면, 그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김대옥 설교, 예수님의 성경읽기를 배운다 2017.10.23.>

비판

‘진멸’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창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신9: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도 같은 죄악을 범하면 그와 같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신8: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진멸’ 심판을 부족주의 세계관이라고 해석한 것은 김대옥 목사가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 예배론적 이단성 

우리의 예배가 개혁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가 늘 개혁되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하나님의 존전에 모인 공동체가 이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상기하며, 회복하고 강화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이 나라의 비전을 따라 부름 받았다!’는 선언을 확인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고백과 선포와 성찬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고, 구체화하고, 갱신하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우리의 삶의 자리, 곧 일상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다짐과 더불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확인하며, 서로 헌신을 다짐하며, 그 현장으로 보냄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269쪽>

비판

예배의 본질과 핵심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념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김대옥 목사는 예배와 성찬을 이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5. 성경의 권위를 부정한다.

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 자체는 결단코 이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서는 곤란한 부분이 너무 많아 보여서 그런 거예요. 왜냐? 이 책은 물리적으로는 그냥 일반 책과 다름이 없어요.
물리적으로, 잘 들어요. 오해하시면 곤란해요. 이 책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는 성도들에게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이 책 자체가 아니라. 이 말이 여러분이 이해하기가 좀 곤란할 것 같아서 한 말씀 더 드릴께요. <김대옥 설교, 예수님의 성경읽기를 배운다 2017.10.23.>

비판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진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는 사상은 하나님의 권능과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명백한 이단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➁성경의 기적과 핵심 사건을 부정한다. 

오늘날 신실한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우리는 성경적인 믿음 성서적 신앙 성경대로 산다라고 하는 성경대로 라고 하는 표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현실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이와 같은 문자주의적 사고 방식에 본의 아니게 많이 매몰되어 있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라고 지금 오늘 말씀에서 나눠보는 겁니다. <김대옥 설교, 건강한 신앙을 위한 성숙한 성경읽기 2017. 9. 17.>

비판

정통 기독교의 신앙을 문자주의 사고 방식에 의한 잘못된 교리를 믿는 것으로 폄하하는 주장이다.

➂ 성령의 잉태와 십자가 죽음과 재림과 부활을 문자주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일점 일획 오류가 없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든지, 예컨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과학 시대 등장 이후로 예수님이.. 어 성령의 잉태,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했다 라고 하는 것은 과학주의적 사고 방식에 의해서는 상당히 이해가 쉽지 않은 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수 있는가 라고 하는 도전을 교회는 받게 되었고, 그 도전의 위협을 경험해야 했던 교회는 그 문자 그대로 사실이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견고하게 붙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잉태라고 하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했다 라든지 육체적으로 승천하셨고 심지어 육체적으로 재림해 오실 것이다 라든지 와 같은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소위 과학주의적 사고 방식이 손쉽게 극복할 수 없는 모든 진술들을 모두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라고 하는 그런 주장들이 바로 흔히 우리가 문자주의 라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김대옥 설교, 건강한 신앙을 위한 성숙한 성경읽기 2017. 9. 17.>

비판

김대옥 목사는 문자주의 해석이 정통 기독교 교회의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정녀 잉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을 모두 문자주의적 해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적인 주장이다.

➃ 오병이어, 칠병이어 사건에 대하여 인본주의적 해석을 한다.

그것은 이 사건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웃들의 결핍상황에 대해 자신이 가진 보리 떡물고기를 내어 놓으므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한 천국적인 현실은 기적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것을 나눌 줄 모르던 이들이 그 가진 것을 기적과 같이 나눔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 나눔 자체야말로 서로 자기 것 움켜쥐고 사는 세상 나라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아닌가? <김대옥 저서, 갈릴리로 오라 261쪽>

비판

오병이어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 오병이어 사건이 의미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참람한 주장이다. “천국이 자기 것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인간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➄ 기독교교리가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정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슨 얘기냐면, 사도신조가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 형태로 고백되고 기록되었던 바로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예수 그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였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정확하게 그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진술해줘야 될 역사적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교리가, 제가 사도신경을 예로 들었지만, 특정 영역에 대한 교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그 때 당시에 그 사람들은 그런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그 사안을 그렇게 결정하고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왔구나.
중세 때에 생겨났던 카톨릭 교리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얘기한다면, 오늘날 개신교인은 누가 긍정하겠습니까?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러므로 교리 또한 그 상황에 맞게 끊임 없이 비판되고 재해석되고 재규정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비판

김대옥 목사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죄와 구원 복음에 대한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변질시켰다. 기독교의 교리는 성경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시대적 상황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김대옥 목사의 주장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변질시킨 이단 사상이다.

6. 압제에 저항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➀ 한나의 노래가 저항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한나의 노래는 당대 땅의 현실에 대한 저항의 노래입니다. 거기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가진 자들과 권력을 쥐고 백성의 삶을 유린하는 악인들에게의 비판과 저주가 서려 있습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113쪽>

비판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권력을 쥐고 백성의 삶을 유린한 자에게 어떤 비판과 저주를 했는가? 이것은 성경의 문맥과 전혀 동떨어진 자의적 해석이다. 한나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것이지 현실에 대한 불만, 비판과 저주의 노래가 아니다.

➁ 예수님의 사역을 압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여 공생애를 시작한 그는(눅4:1,14,18) 당대 로마 식민치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과 사회 문화적으로 핍절한 세상에서, 게다가 혁명의 도시 갈릴리의 가난한 민초들의 비참한 삶을 보시며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성령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박해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르라‘고 소환했던 것입니다. 개혁자들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나 저항하게 한 것도 이 성령 충만합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214쪽>

비판

예수님께서 언제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저항하시거나 저항하라고 가르치셨나? 오히려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회 변혁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저항하라고 선동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➂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평화적 대응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용 말’이 아닌 평화의 나귀 타고 평화의 왕이 임하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을 통해 평화의 복음이 이방 사람들에게 전달될 것이요, 온 세상에 평화가 임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10절). 하지만 ‘제국의 평화’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제국의 평화 방식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로마를 압도하는 신적 메시아를 보내어 폭력적 심판행위로 로마를 전복시켜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거대한 폭력의 당사자들에게 대응 폭력을 중지함으로써, 나아가 그들에게 ‘보복’ 대신 ‘사랑’과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그 폭력의 고리를 소멸시켰습니다. 열두 여(legion)도 더 되는 천사들을 호령해서라도 로마의 군대를 전복시킬 수 있음에도(마26:53), 그는 전쟁대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놓음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종식시켰습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229쪽>

비판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의 의미도 아니고 압제자에 대한 평화적 대응을 하신 것도 아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김대옥 목사는 이처럼 성경의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을 간과하고 임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➃ 기도 응답의 교훈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해석한다. 

(과부의 기도에 대하여) 사정을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거나 그 과부의 형편에 무관심한 사라들은 심지어 그녀가 재판관을 찾는 것까지 조소하고 비난합니다. 그녀와 아픔을 같이 하거나, 연대하여 자신들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하며 싸우며 원한을 풀기 위해 직접 나서서 저항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 아니라며 비난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의 고통의 실제엔 무관심하면서도 무조건 기도만이 해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며 ‘기도하라’하지만 해답 없는 과부의 외롭고 힘든 씨름은 하릴없이 지속되기만 합니다.
앞서 살펴 보았 듯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평강 속에서 안연히 거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요, 자신의 독생자였습니다. 그 예수님은 호소할 데 없는 원한 가진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성육신이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면, 원한 있는 자들은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이미 그 복음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해방의 날은 왔고 또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248쪽>

비판

눅18장의 ‘과부의 기도’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성경이 명백하게 그 의미를 설명한다.

(눅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눅18: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눅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이처럼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에 그 의미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하셨는데, 왜 성경과 다른 해석을 주장하는가?

➄ 십자가를 사회 저항의 시위라고 주장한다.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죄악과 불의에 분노했고, 또 저항하며, 시위하고 탄핵하며, 결국 로마에 저항한 반체제인사로 십자가형을 당하였습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공생애 자체가 곧 불의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시위였습니다‘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기름 부어 보내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들에게 놓임을, 눈먼 자들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눅4:16-19). 그는 이 사명선언을 하면서 압제하고 불의하고 위선에 가득 차 있는 현실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선포하며 시위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은 그 시위의 절정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메시아의 입성을 하는 장면은 시위의 압권이었고(9:9성취입니다). 성전 정화를 통해 성전 권력자들을 성토하고(21) 그 성전에서 사두개인과 율법사들을 공개적으로 탄핵했습니다(마23장).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와 폭력에 대해 죽음으로 대항한 가장 역설적인 시위가 되었고,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저항과 시위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대옥 저서, 땅 위에 하늘을 짓다 194쪽>

비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시위를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처럼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것”이며,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지 ‘압제와 폭력에 대한 시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시위를 하신 것이라면, 그 시위에 누가 동조하거나 선동을 당한 사람이 있는가?

7. 이슬람에 대하여 반성경적인 주장을 한다.

➀ 꾸란과 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인정한다. 

구약성서와 꾸란은 서로 다른 맥락,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역사 현실 속에서 선포되고 전승되고 또 기록되었다. 동일한 하나님의 의도가 상이한 맥락 속에서 각기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어 온 것이다. 이것을 수평 비교함으로 서로의 차이를 대립을 위한 촉매처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진리 탐구와 수행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경전의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이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05쪽>

구약성서와 꾸란은 서로 다른 맥락,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역사 현실 속에서 선포되고 전승되고 또 기록되었다. 동일한 하나님의 의도가 상이한 맥락 속에서 각기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어 온 것이다. 이것을 수평 비교함으로 서로의 차이를 대립을 위한 촉매처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진리 탐구와 수행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경전의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이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30쪽>

➁ 꾸란과 성경을 동일한 권위로 거룩한 문서로 인정한다. 

구약성서든 꾸란이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온 거룩한 문서들이다. 물론 그것이 ‘천상에 선재’한다는 선언은 신앙전통 내부의 경건한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그 선언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려 한다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05쪽>

전승은 구전과정에서 변화를 겪게 마련이며, 따라서 계통상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나아가 전승은 특정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의도적으로 변형되고 수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이야기는 전달자와 청중에 따라 조금씩 상이하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동알한 예수 사건을 두고도 복음서 네 권이 각각 서로 다른 표현들로 소개하는 이유이다. 앞 세대는 공동체 내부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후세대에 전달했는데, 특히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신적 행동들이 후대를 교훈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달되었다. 그것은 곧 신앙공동체의 공동고백이 되어왔고, 공동체의 특징을 형성해 왔다. 그것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오늘날 구약성서와 꾸란이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11쪽>

➂ 꾸란과 성경을 동등하게 여겨,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부정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양 경전이 의도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노력에 함께 경주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경전 간 불일치에 대해 성서는 진리이며 꾸란은 비진리이다라거나 꾸란은 오류가 없으며, 따라서 성서가 변질되었다라는 상호 배타적 주장들을 철회해야 한다. 이미 양 경전이 각 종교의 권위적 규범서로 각기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다른’ 경전인 한, 그 차이를 가지고 갈등의 통로로 사용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차이는 각 경전의 고유한 특징임을 상호 인정하는 수용적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양자가 갖는 그 동일 주제와 본래 기록 목적을 가지고 ‘공동의 진리’를 추구하는 적용 노력을 함께 기울여 가야 할 것이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36쪽>

➃ 성경의 목적이 “인간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이 근본적으로 인간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평적인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조화와 상생의 삶을 고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47쪽>

비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인간의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렸다는 꾸란의 주장을 인정한다.

노아 내러티브의 비교를 통해 살펴본 바도 있지만, 가령 아브라함 내러티브의 경우를 보자. 양 경전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 예컨대 그가 번제하려던 아들이 이삭인지 이스마엘인지의 여부나 이스마엘을 데리고 아라비아에 갔는지의 여부와 같은 차이는 양자 간의 대화를 위한 논의에서 부차적 사안이 되어야 한다(또는 배제되어야 한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29쪽>

➅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꾸란의 주장을 인정하며,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다. 

특별히, 양 종교 간 신학적 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예수의 신성에 관한 문제 또한 이러한 거대 문맥적 관점을 적용한다면 서로 수긍 가능한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꾸란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부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해 애초에 문자적이며 생물학적인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신약성서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그 칭호를 문자 그대로 정의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삼위일체 대한 이슬람의 오해 역시 상호 조화를 위한 경전읽기의 경험을 갖지 못한 데서 근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52쪽>

➆ 예수님을 보편적 구원자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부정한다.

또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에 강력한 토대를 제공해 주는 본문이라고 믿는 요한복음 14장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14:6b)는 구절은 다른 종교들을 부정하는 일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편적인 구원자로 긍정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볼프의 해석과 같이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a)는 주장에 따라오는 결과이지 그 반대, 즉 다른 이를 통해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으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명제가 아닌 것이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53쪽>

➇ 이슬람과 기독교는 조상, 기원, 전통, 하나님이 같으므로 형제 종교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와 이슬람은 동일 조상, 동일 기원, 동일 전통, 동일 하나님을 섬기는 친적 종교요 형제 종교임을 강조해야 한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70쪽>

➈ 예수님과 무함마드를 동일한 개혁자로 동등하게 여긴다.

역사적 예수와 무함마드는 모두 당대 현실 사회의 근본적 세계관을 혁파했던 개혁자들이었다. 대중을 우민화하고 교조적 율법으로 민초들을 억압하던 기득권 세력에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듯을 선포하던 이들이었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70쪽>

➉ 이슬람의 이단성을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주장을 ‘이슬람 포비아’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들에서 보이는 맹점은 바로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전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즉 미디어나 종교계의 특정 의견만을 반영한 표면적 이미지에 의해 형성된 대중적 이슬람 포비아그 실체와 상당한 이격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특히 보수적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이슬람 확산에 대한 이 포비아를 과장하면서, 편향과 적대감에 입각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대옥, 구약성서와 꾸란의 대화 276쪽>

8. 김대옥 목사는 다음과 같이 동성애를 옹호한다.

➀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문자적 해석을 비판하고 거부한다.

오늘날 최근에 기독교 내부에서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성애 또는 뭐 여성혐오 또는 성차별 그 다음에 뭐 이슬람 혐오 등등의 그런 이슈들 속에서 약자들에 대한 그런 차별 혐오 배제와 같은 것들이 오히려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하는 그런 경향들이 바로 문자주의에서 나오는 그런 이해라 하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유독 그와 같은 차별과 배제나 혐오 현상에 성경을 신실하게 믿고자 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것이 오늘 저로 하여금 이 주제로 설교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 와서 얘기하는 그 중요한 기회에 하나님의 사랑 자비 얘기하면 얼마나 좋은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 주장이 그리고 그들의 이해와 성서 해석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우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틀릴 수 없다. 그래서 이건 절대적인 해석이다 라고까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김대옥 설교, 건강한 신앙을 위한 성숙한 성경읽기 2017. 9. 17.>

➂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성경대로 하자면 죽임을 당해야 할 여인에게도 “나도 정죄치 않는다” 선언하시면서, 그를 보호하시고 자유케 평안히 가라 하셨던 그 예수님.
오늘날 교회는 이상하게 그 죄용서의 복음의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교회가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보호하시고 자유케 보내신 그 여인들을 뒷골목에서 돌로 쳐 죽이는 일을 비일비재 행하고 있어요. “이거는 죄야, 동성애가 죄야, 뭐 낙태가 죄야, 뭐가 죄야” 왜 그렇게 교회가 죄에 사로잡혀 있는지. ‘죄론’에 사로잡혀 있는지. 예수님이 그토록 죄 없다 하기를 애써 탄핵까지 받아가면서, 신성모독이라는 탄핵까지 받아 가면서까지도 죄없다, 죄없다 죄없다 하면서 사유하고 계시는데, 그 예수를 믿는 교회가 여전히 정죄의 초점으로 성도들을 다루고 있다면, 교회는 다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진짜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의 신학을 바꾸고, 교회의 메시지를 바꾸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바꿔 주셔야만 합니다. <김대옥 설교 2017-12-10 >

성경을 가난한 자와 창녀와 같은 억압받는 자들 편에서 해석하는 것을 정당하고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여러분 복음은요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예요. . 중략.. 누가 안식일을 못 지킬까요? 여러분, 여러분의 공동체가 유대교라고 생각해 봐요. 여러분 공동체가 안식일을 위반하면 사형이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엄한 규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못 지키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서 1세기 팔레스타인으로 한 번 돌아가 봐요. 누가 안식일 날도 일해야 할까?
저 같은 사람은 오늘날 안식일날 주일날 일하지 않아도 돼죠. 그래서 오늘도 예배에 와 있어요. 주중에만 일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누가 오늘날도 주일날 이른 새벽부터 노동 현장으로 나갈까요? 나가야만 할까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죠. 가난한 노동자들인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누가 음식법을 위반할까요? 하나님이 분명히 더럽고 가증한 음식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음식 먹고 싶겠어요? 가증한 음식이라고 우리 문화가 규정하고 있는데? 그러나 누구는 그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역시 가난한 사람들인 거예요. 누가 여러분 그런 부정한 자들을 성결법에 의해서 부정한 자들로 치부되었을까요? 가난하면 먹지도 제대로 못하고 위생을 제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더 병들고 더 고통을 받게 돼요. 누가 십일조나 제물을 드리지 못할까요?
역시 가난한 자들이예요. 누가 자기 스스로의 몸을 팔며 그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창녀의 삶을 살아가야 했을까요 그 옛 시대에도? 가난한 자들이예요. 결과적으로 성경은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책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 역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들 편에서 또는 약자들 편에서 쉽게 말하면 억압 받는 자들 편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고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김대옥 설교 2017-10-23>

➄ 정통신학은 여성을 혐오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보다도 역사 속에서 진짜 심각한 피해는 아까도 잠깐 언급해 드렸던 것처럼 성차별의 근거로 삼았다는 거예요. 즉 여성을 억압하고 인간 실존이 경험하고 있는 그 고통의 문제를 여성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거예요. 심지어 그것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디모데전서 2장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등등을 얘기하면서 너희가 나중 지음 받았잖니. (미안해요 여기다 손짓을 해서) 그리고 너희가 너희가 먼저 타락을 했지 않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그렇게 대우 받는게 당연하다는 논지를 신약성서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때문에 여성이 인간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우 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여성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다. 범죄 있는 곳에 언제나 여자가 있더라 이런 얘기 들리잖아요 그죠? 남자는 없어요?
남자들이 오히려 범죄를 막 저지르면서 거기 여자가 있잖아 그러면서 오히려 여성을 겁박하는 혐오하는 그런 근거로 사용한단 말이예요. 남자는 결국 돕는 배필이라는 말도 곡해해 가지고 남자는 주체요 여자는 언제나 수동적인 존재 억압 받는 존재 등등의 적용이 되어 왔습니다. 성서를 해석하면서 성경대로 살자 하면서 여성 억압의 하나의 근거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하는 겁니다. <김대옥 설교 2017-09-17>

➅ 성적지향(동성애)을 하는 자들이 폭력적 현실과 엄혹한 현실을 살고 있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진정한 자유와 회복들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적지향이 다르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출신이 다르고 경제능력이 다르다고 장애가 있다고 등등으로 폭력적 현실 속에 엄혹한 현실을 살아내야 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회복들이 뒤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김대옥 설교, 예수님의 성경읽기를 배운다 2017.10.23.>

➆ 김대옥 목사는 한동대 ‘들꽃’ 동아리 지도교수를 담당했다.

‘들꽃’ 동아리는 친 동성애, 페미니즘, 젠더이데올로기 단체다. ‘들꽃’ 동아리 행사에는 ‘동성애 지지 옹호자’, ‘동성애 옹호 정치인’, ‘낙태 지지자’ ‘윤락녀(성노동자)’, ‘패미니스트’, ‘폴리아모리(난교, 다자성애)’, 젠더 이데올로기를 선동하는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한동대 ‘들꽃’ 동아리 행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장되었다.

행사 주제 [흡혈사회에서, 환대로](성노동과 패미니즘 그리고 환대)
강연에 나온 홍**은 윤락녀로서 학생들에게 충격적인 강의를 했다.
자신이 “다자연애 난교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진행자 홍 모씨, “꼭 1:1일 아니어도, 여러 사람과 사랑할 수도 있고, 여자와도 사랑할 수 있고”라고 말하는 홍 모씨, “생물학적으로 고증된 남성, 여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메인 강사 임 모씨등이 발언을 했다. <출처, 한동대의 동성애 성매매 세미나 들꽃 we-week 강의 영상>

행사 주제 [호모포비아와 함께한 성 노동강연]
초청강연자 폴리아모리(비 독점 다자성애자,난교)를 하는 홍**은 이렇게 심경을 그의 SNS에서 밝힌다. "아직도 학교에서 ‘혼전순결 서약’을 하는 한동대학교에서 성노동, 폴리아모리, 임신중절, 다양한 섹스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대하며 대담을 준비했다" <강연자 홍** SNS 글에서>

홍** 작가는 폴리아모리(비 독점 다자성애자, 난교)를 하는 여성이며 현재 2명의 애인과 동거하고 한동대에 “뉴담(한동대 언론)”운영자(동성애 옹호자)와 동거하고 있다. 홍**의 강연 중에 “난교”를 언급하였다.

이런 초청 강사들이 동성애를 넘어 심히 음란한 강연을 지속하다가 한동대의 문제 제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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