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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말론 해석학적 원리 제안
정홍열 교수(ACTS)의 종말론 강의 2
2018년 11월 28일 (수) 11:38:58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홍열 /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정홍열 교수

I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리사를 보면 조직신학의 다른 주제들에 비해서 종말론은 치열한 논쟁의 역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기독교 신학은 논쟁을 통해 발전되고 정립되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5세기까지 진행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논쟁은 바로 그러한 논쟁의 역사 없이 성서의 진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운동은 당시의 기독교 신학의 왜곡을 자행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에 맞서 복음의 순수함을 되찾고자 했던 개신교와의 싸움으로 그 핵심에는 비단 이신칭의의 구원론만이 아니라 참교회의 모습을 밝히려는 교회론과 성례전에 관한 논쟁까지 포함되었다. 이 논쟁의 결과로 기독교 신학은 구원론뿐만 아니라 교회론과 성례론에 있어서 결정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기독교 신학의 수많은 교리와 주제들은 이처럼 교회 밖의 세속사상 및 이단들, 그리고 교회 내의 이견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오늘날 그 최종적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신학형성에 수많은 논쟁들이 동반된다는 것은 성서의 말씀이 지닌, 그리고 신학적 진술에서 각각의 용어와 설명이 지닌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성서의 의도에 맞는 가장 정확한 의미를 엄격하게 찾고 선별해내는 작업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의 과정없이 쓰여지는 단어들은 각자의 주관적 의도 하에 사용되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사용자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전제하에 그 의미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종말론에 등장하는 ‘영혼불멸’ 이란 단어이다. 이 말은 쓰는 이가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으로부터 일반종교에 등장하는 보편적 내세신앙은 물론 기독교의 부활신앙까지 그 의미가 지극히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결코 기독교만이 사용하는 배타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한 그 쓰임새를 엄격하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신학적 논의의 과정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말론의 주제들은 거의 교리적 논쟁의 전면에 등장한 유례가 없고 언제나 무관심과 무지의 영역에 갇혀 왔다. 오히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열광주의적 천년왕국운동가들과 이단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최근 20세기에 들어와 요한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종말론은 “예수의 선포의 중심 메시지”로 알려지게 되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중요한 틀로 회복되었다. 그 이후 신학계 안에서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논쟁과 “종말론과 역사해석” 등을 통해 종말론이 20세기 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의 각 주제들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아직도 종말론은 일반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까지 접근하기 힘든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종말론에 관한 논의의 과정이 빈약했던 까닭에 그 결과물들이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종말표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구약성서의 이해로만 접근한다거나 문자적 이해에 얽매여서 전체적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종말론의 수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성서 안의 종말론적 진술에 대해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전체 종말사건들 안에서의 연관성을 해명해 주는 신학적 안내가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

종말론이란 그 내용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시는 하나님의 완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의의는 창조론과 구원론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완성과 결과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완성 행위의 라스트 신에 해당된다.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과 그 무게를 고려한다면, 종말론 없는 창조와 구원은 마지막 장면이 없는 영화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종말론이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종말론을 구성하는 해석학적 틀의 부재 내지는 그 미숙성이라고 판단한다.

성서를 신학의 자료로 삼고 교리의 내용과 지침을 성서로부터 발견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나, 그렇다고 기독교의 교리가 성서의 전체적 맥락을 추구하는 해석이 배제된 성서 구절의 단선적 나열은 아닐 것이다. 이는 종말론의 경우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종말사건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 행위의 전체적 시각에서 각각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기보다는 단지 성서에 소개된 단편적 사실들을 순서에 따라 단선적으로 배열해 놓는다고 해서 종말론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열은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의 단편적 사건들의 전시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종말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틀의 부재는 곧 종말론에 있어서 일관성의 결여로 나타나게 된다.1) 비록 우리가 종말사건들의 모든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신학자의 종말론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종말에 대한 진술이 그 신학적 의미와 현상적 의미 그리고 그 사건이 전체적 종말과의 관련성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적 완성 역사의 시각 안에서 일관된 체계 안에 위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종말론적 진술들은 단지 개별적 사건이 지니는 의미만이 고립적으로 설명되고, 그 설명된 결과는 더 이상 다른 종말론적 사건들과 관련해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당면한 종말론의 과제는 각 사건의 의미를 밝혀줄 뿐 아니라 전체적 종말론의 무대에서 상호간의 연관성을 일관되게 설명해줄 종말론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일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 편으로는 기존의 종말론적 문제점을 분석해 나가면서 다른 한 편, 성서가 말씀하는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II. 인간론적 전제: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한 종말론

인류는 원래 죽음에 직면하여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상체계(신앙)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중심이 된 부활신앙과 헬레니즘 및 그 이전의 힌두교에서 볼 수 있는 영혼불멸론이 그것이다. 기독교가 서구에 선교되기 이전에 이미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은 영혼불멸론을 통해 자신들의 죽음을 초월하는 소망을 지니고 살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장면을 전달해 주고 있는 플라톤의 “파이돈”의 내용처럼, 이미 헬라인들은 영혼불멸 신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복음이 낯설고 무모하게까지 들려졌을 것이다(비교: 고전15:12)

그런데 그들의 영혼불멸론은 단지 죽음만을 이기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그 안에는 인간론과 우주론이 다 포괄되는 통일된 존재론뿐만 아니라 인식론까지도 함께 용해되어 있는 총체적 패러다임인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서되었고(파이돈,79), 죽음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파이돈,64), 그에게 있어서 철학의 모든 수고는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에 집중된다(파이돈,65).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이 진리를 인식하는 고정에서 장애로 등장하기 때문에(파이돈,66) 진리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파이돈,62). 그 결과 인간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불멸하는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인간(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영혼불멸론이다(파이돈,80, 105, 106.).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인간과 죽음과 내세에 관한 패러다임은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도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2) 플라톤 연구의 대가인 하인리히 되리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원 후 약 300년이 지나면서 플라톤주의는 유일한 철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성행하던 모든 종교의 정신적 현상까지도 포괄해 버리는 체계가 되었다. ... 모든 종교활동은 오직 플라톤주의와의 유비적 관계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3)

이 분석은 정확하여서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떠나서는 신학적 진술, 특히 인간론과 종말론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모든 신학진술들에서 언급되는 인간은 언제나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은 예외 없이 영혼과 몸의 분리로 묘사된다.4)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영혼불멸론은 기독교 종말신앙의 결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진술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곧 기독교 이단자로 간주될 정도이다.5)

기독교 신학은 종말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뼈대에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적 내용을 옷 입히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인간이 된다고 이해하고(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준 것은 생기이지 영혼이 아님!)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 순수한 인식에 이르는 일에 장애가 되었던 몸은, 바로 인간의 죄의 자리로 연결되고, 플라톤에 의해 영혼과 몸의 분리로 설명되었던 죽음은 죄의 심판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자리는 몸이 되고 그 몸이 심판을 받으므로 영혼으로부터 분리되게 된다는 완벽한 설명의 틀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종말론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중간상태에 관한 이론들도 결국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을 위한 설명이며 이 분리된 영혼이 부활을 기다리는 기간에 속한다. 이에 해당되는 영혼수면설이라든지 로마 가톨릭의 연옥설 등은 모두 몸을 떠난 영혼을 중심으로 구축된 종말론의 한 단편인 것이다. 여기에 사도신경에서 고백해 왔던 가장 중요한 종말신앙인 부활은 죽음에서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마지막날 새 몸을 입는 것으로 완벽하게 설명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신학의 뼈대는 물론 그에 대한 해설의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플라톤은 오히려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이방의 익명의 기독교의 선지자로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기독교 종말론의 뼈대에 플라톤주의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기독교 신학의 왜곡화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히려 플라톤주의가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들의 완전한 의미를 밝혀주는 충실한 보완자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며, 나아가서 이러한 이해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해석하는 전제로 다시 계속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다.6)

그 결과로 인간 창조기사를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전제 하에서 읽고, 성서에서 소개되는 죽음의 장면들이-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7:50),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아무런 주저없이 몸과 영혼의 분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윙엘의 다음 지적은 앞으로 기독교 신학, 특히 인간론과 종말론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를 정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죽음에 관한 플라톤적 설명은 고대 이후로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플라톤적 시도를 알지 못하는 신학, 혹은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거나 자신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특별히 죽음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고려할 때 더욱 타당하다.7)

윙엘의 이러한 주장은 결코 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공헌한 점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킨 결과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플라톤주의화된 기독교로부터 탈플라톤주의(Entplatonisierung)를 신학의 과제로 역설한다.8)

그렇다면 이제 플라톤주의로부터 벗어난 기독교 본래의 성서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어떤 내용을 가질 것인가? 우리는 이를 성서의 인간에 관한 진술에 주목함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명칭들은 주로 다음의 네 단어가 사용되었다: 네페쉬, 바사르, 루아흐, 렙 등이다. 이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네페쉬는 원래 식도나 목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생명을 중심으로 인간을 표현했고 주로 70인역의 헬라어에서 영혼으로 번역되었다. 바사르는 육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헬라어로는 몸이나 신체로 번영되었다. 루아흐는 바람이나 영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곤 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 인간에 관한 표현들이 언제니 단독적으로 인간 자신을 지칭했다는 데에 있다. 이들 단어가 서로 만남으로 합일체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을 서술하는 상황에 따라 네페쉬(생명을 중심으로 인간을 표현할 때), 바사르(인간의 육체성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루아흐(인간의 초월성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렙(인간의 의지를 중심으로 표현할 때) 등이 개별적으로 전인(whole man)을 의미했다는 사실이고 이 점에 있어서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헬라의 인간관과 전혀 다른 전제와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9)

신약성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약성서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주로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도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단어가 개별적으로 인간을 지칭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소마), 육(사르크스), 영(프뉴마), 영혼(프쉬케) 등은 모두 제유법적(Synekdochisch)으로 전인(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0) 그런 점에서 불트만은 “인간이 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라고 주장한다.11)

따라서 성서의 인간론은 플라톤의 인간론과 달리 인간을 영혼과 몸이 만나서 구성하는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고 인간 자신을 때로는 영혼으로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몸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인간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서의 인간론은 인간을 몸과 영혼의 합일체로 보지 않고 인간을 몸이면서 동시에 영혼, 동시에 영 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마치 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규정이 인간을 그 구성에 있어서 구분함으로 “영혼은 의인이나 몸은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현재에 있어서는 “전인이 죄인이나 장래에 있어서 전인이 의인이다”(peccator in re, iustus in spe)라는 사실을 주장한 것처럼,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부분적으로 나누는 것은 성서의 인간 이해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의 인간론은 인간 안의 두 실체(이원론)나 세 실체(삼분설)를 인간의 구성 부분으로 말하지 않고 전인 안에서 다양한 실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죽음을 몸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했던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성서적 죽음관을 순수하게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 전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성서는 죽음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인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창2:17; 롬3:23;6:23). 그리고 그 심판의 내용을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성서의 죽음으로 이해한다(마27:46).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성서의 죽음관과 몸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플라톤의 죽음관은 유사한 듯 보이나 실상은 그 핵심에 있어서 정반대이다. 성서의 죽음관은 죽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실체로서 인간에게 두렵고 원수가 되는 것이지만 플라톤의 죽음은 영혼에게는 자신의 감옥이었던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구원의 순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 안에서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목도하게 되는가? 죄에 대한 심판을 죽음으로 보았는데 인간의 죄의 자리는 플라톤의 주장처럼 몸이란 말인가? 성경은 인간의 죄의 자리를 오히려 몸에 두지 않고 인간의 마음, 중심에 두고 있다(마15:19: 시14:1).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은 침해되지 않고 무조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을 부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인간의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실들을 성서적 진술에 따라 재구성하고자 제안하는 것이다.

성서의 인간 이해에 의하면 인간은 다양한 차원과 관련맺는 유기체로서의 전인이다. 그 중에서 성서적 인간 이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창1:27)으로 표현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이다. 인간을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보는 실체적 인간론이 아니라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는 관계적 인간론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전인으로 서 있다(Coram Deo)는 것이다. 이 현실은 결코 인간의 영혼만이 독단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의 전인이 서 있게 된다. 따라서 죄에 해한 심판의 결과도 나 전인이 맞게 되고 죄로부터의 구원의 완성인 부활과 영생에 초대되는 것도 영혼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전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5장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표현한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은 나의 몸이 아니라 옛사람으로 표현되는 죄에 갇힌 나의 전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죽음에서 침해당하지 않는 나의 영혼이 아닌 새사람으로 표현되는 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전인이다. 이를 클라우스 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죽음은 한 편으로는 하나의 정점이다. 지상의 삶의 종점, 이 세사의 삶과 이별하는 순간이다. ...다른 한 편 죽음은 또한 오랜 과정이다.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처럼, 겉사람, 보이는 사람은 나날이 후패해 가지만, 이와 함께 우리의 속사람, 보이지 않는 새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12)

그러므로 죽음에서 나의 옛사람, 겉사람이 죽으면서 이 죽음은 또한 나의 새사람, 속사람이 살게 되는 순간이요 그러한 과정의 전환점이다. 이미 그리스도인의 세례에서 시작된 이 과정은 우리의 죽음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그리고 죽음 이후의 부활에서 그 완성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 겉사람과 속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은 단지 몸이나 영혼만을 언급하지 않고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루터가[갈라디아서 주석](1519)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전인이 있고 또 한 전인이 있다”(Sunt duo toti homo et unus toutus homo)는 말은, 한 편으로는 옛사람과 새사람, 혹은 겉사람과 속사람의 두종류의 전인과 그러나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한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과 그의 죽음을 영혼과 몸이라는 용어가 아닌 성서적 용어와 사고에 따라 이해할 때, 플라톤주의에 근거한 이원론적 인간론의 틀을 극복하고 성서적 인간론과 죽음 이해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한 기존의 종말론의 틀을 극복하는 길은 탈플라톤화를 통해 성서의 인간론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III . 영혼불멸론의 문제: 칭의론적 동기가 결여된 종말론

종말론과 칭의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마지막 일들과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교리는 언뜻 보기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종말론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진술이라면 종말론은 구원론의 종결부에 해당된다. 따라서 구원론에서의 신학적 원리는 종말론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개신교 신학은 칭의론을 가장 중시하는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루터교에서는 칭의론은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신앙의 조항”(articuc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소중히 여기면서 신학의 모든 진술들을 칭의론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단지 구원론뿐만 아니라 창조론과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 및 모든 기독교 교리의 영역을 칭의론적 동기인 “오직 하나님의 행동만”(Gottesshandeln allein)이라는 전제하에서 서술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며,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구원의 이유와 근거를 “인간 밖에서”(Extra nos) 찾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우리는 이미 앞 문장에서 영혼과 몸의 이원론적 인간론이 지닌 인간 및 죽음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본 장에서는 그러한 전제 위에서 형성되는 영혼불멸론 자체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독교적으로 정착된 영혼불멸론은 글자 그대로 인간이 죽을 때 몸은 땅에 묻히므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13)고 진술한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이 죽은 후에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점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바로 영혼불멸론에 대한 모든 비판의 초점이 모아진다.

원래 플라톤주의에서는 영혼이 죽음을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인 것처럼 영혼불멸론도 진리이며, 따라서 영혼불멸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속성으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영혼불멸은 모든 인간이 창조에 의해 지니고 있는 본래적 속성으로 보았고 죽음 이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헬레니즘에 근거한 영혼불멸론이 기독교 신학 안에 쉽게 자리를 잡게 된 이유는, 특별히 기독교 변증가들에 위해 기독교 안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원인은, 영혼불멸론이 인간의 죽음 이후의 운명을 말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기독교 신학 안에 정착한 영혼불멸론은 죽음 이전의 인간과 죽음 이후의 인간의 정체성을 인간의 영혼으로 설명했고 이는 또다시 심판을 주장했던 기독교 종말론에 심판의 대상자를 설정해 줄 수 있는 근거를 영혼에서 발견하게 되었다.14)

그로 인해 인간의 영혼이 자연스레 죽음 이후의 인간의 실존을 대변하게 되었고, 영혼의 계속적인 실존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에 의해 의심없이 인정되게 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영혼이 불멸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언뜻 보기에 영혼불멸론의 근거를 심판에 두는 것처럼 들리므로 개신교 신학의 특징인 칭의론적 성격(extra nos)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심판이 영혼불멸론의 근거가 아니라 영혼의 불멸성을 위해 심판이 보조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 안에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에 침해당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사실은 개신교 신학에서는 낯선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에 개신교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영혼불멸론을 강하게 부정하는 소위 “전적 죽음이론”(Ganztod - Theorie)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의 운명이 죽음으로 완전히 종료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인간의 본래적 성향인 영혼의 불멸성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 행동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영혼불멸론은 개신교 신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가톨릭 신학자들에 위해 더 많이 대변되어왔다. 최근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한 가톨릭교회의 영혼불멸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있는 추기경인 요셉 라칭어는 “대화적 영혼불멸론”(Dialogische Unsterblichkeitslehre)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앞에서 이르게 된 인식은, 고립적인 자기 자신이 인간을 불멸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계, 하나님을 향한 관계의 능력이 그를 불멸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이 존재의 개방성이 그것과 무관한 채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부과된 추가물이 아닌 인간의 심오한 본질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다.15)

라칭어의 주장에 전통적인 심판이라는 단어 대신에 관계라는 새로운 단어가 들어갔을뿐 영혼불멸론의 본래적 성격은 변화된 것이 없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영속성을 부인하는 기독교 신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관계의 영속성이 과연 라칭어의 주장대로 영혼불멸이라는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영혼불멸이란 본래 인간의 소여성을 말하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용어가 아니가. 이 단어는 인간에 관계된 것이지 하나님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혼불멸론의 계속적 주장을 위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요리문답”(1993)을 보면 영혼불멸론의 근거를 사후에도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불멸적 실체(주체)로 변함없이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가르치기를, 모든 영혼은 부모로부터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며, 이 영혼은 불멸적이다. 죽음에서 영혼이 몸과 분리될 때, 영혼은 죽지 아니하고 부활시에 새로운 몸과 연합될 것이다(366번).16)

더욱이 1979년에 교황청에서 발표한 “종말론의 몇 가지 질문에 관한 신앙론을 위한 회중서신”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영혼관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는 사후에 영적 요소를 지진, 의식과 의지를 갖춘 실체의 지속을 확고히 인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는 계속 존재하며 이는 중간상태에서 그의 완전한 신체성은 결여하고 있다. 이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교회는 성서와 전통의 용례에 의해 영혼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 .17)

로마 가톨릭 내에서 한 편으로는 영혼을 대화적 성격으로 이해하나, 다른 한 편에서는 여전히 영혼의 본래적 실체적 성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혼의 불멸성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영혼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기존의 영혼불멸론에서 조금도 벗어난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영혼불멸론을 관계 안에서 설정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더 규명되어야 할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영혼불멸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불멸성이다”18)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멸적 관계를 강조할 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대목은 이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상대자로 등장함으로 인간 편의 불멸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칭의론적 동기에 근거한 종할론은 철저하게 거부한다. 불멸적 관계의 처음과 끝은 오직 하나님 안에 (solus Deus)만,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extra nos)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의 요르그 바우르의 주장은 영혼불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비판을 제공해 준다.

창조하시며 의롭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은-롬4:17과 롬4:5-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즉 일차적 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의미에서, 인간과의 상호교환적이거나 동반자 관계에 서 계시지 않는다.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시고 역사하시며, 더욱이 무(Nichts)에 대해서 그렇게 행하신다. 이 무는 하나님의 행동의 전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없는 자로부터:역자 주) 있는 자로 부름받을 것이며(롬4:17), 경건치 않은 자로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것이며(롬4:5) 종말론적으로 죽은 자들이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롬4:17).19)

우리는 기존의 기독교화된 영혼불멸론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동에 상관없이 불멸적 인간의 영혼이 전제됨을 보면서, 인간의 사후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동에 근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의 사후의 존재는 인간의 본래적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은사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몰트만은 “영혼불멸론을 인간 안의 불멸적인 것에 대한 자기 신뢰로, 그러나 부할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20)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서는 인간의 사후의 존재에 대해서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어떤 행동에 의해 사후의 존재로 부름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는가?

영혼불멸론과 달리, 즉 죽음을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로 보지 않고, 전인이 맞게 되는 운명으로 볼 때, 죽음과 부활에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정체성의 자리를 인간 안에 두지 않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해 매우 독특한 언어를 제시해 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억”을 형상화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책이나 문서(말2:16)와 생명책(계20:12-15)으로 소개된다. “하나님의 기억”은 부활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단12:1-2), 심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계20:12-15).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미래와 전망이 상실된 상태이며 계속 존재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21) 바르트는 이런 상태의 죽은 자를 “존재했던 존재”(das gewesene Sein)로 표현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존재했던 존재자가 되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자가 되어 주신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안”22)이라는 말의 참 의미다.

바울이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찬송한 바처럼, 현재나 장래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시면, 우리는 존재했던 존재자에서 존재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억은 우리의 영원한 존재의 근거가 되신다. 즉 하나님의 기억은 존재했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로운 창조행위가 되신다(롬4:17).23)

우리가 인간 사후의 존재의 근거를 인간 안에서(영혼) 찾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하나님의 기억행동) 찾는다면, 이는 정확하게 칭의론적 동기에 부합되는 종말론적 진술로 평가될 수 있다.
 

IV. 성서해석학의 문제: 단선적인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종말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완성하실 종말의 실체들을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이 현실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여러 모양으로 묵시와 비유와 상징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성서의 진술들을 가지고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죽음에 관한 수많은 다양한 성격과 내용을 담은 진술들을 만난다.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창2:17)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입구(빌1:23)로도 표현되고 잠으로 묘사(요11:11)되는가 하면 죄와 연결된 권세(롬5:12)로도 서술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성격 규정과 함께 죽음은 두 가지의 사건으로도 설명된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과 20장6절에서는 둘째 사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는 첫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서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둘째 사망을 통해 죽음을 두 번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는 다시 앞 장에서 다루었던 영혼과 몸의 이원론 및 죄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어서, 첫째 사망은 몸의 죽음이며, 이는 원죄로 인한 사망으로서 모든 인간이 당연히 경험하는 사건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의 죽음으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으로 맞게 도는 영원한 심판으로 이해한다. 첫째 사망은 인간의 지상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한 번 죽을 수도 있고 두 번 죽을 수도 있게 된다.

성서는 죽음이 하나님께 불순중한 인간이 맞게 되는 심판의 운명으로 선포한다. 성서가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하는 듯한 표현(머10:28)을 하는 것이 사실이나, 전체적으로 보아서 죽음 자체를 나누고 있지는 않는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다. 죽음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난 후에 또다시 영혼에 대해서 심판을 하셔야 할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함으로 영혼의 심판의 저주로부터 벗어났다면 왜 몸은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일까? 역시 몸이 죄의 원인자이어서 몸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려없이 기존의 종말론은 두 번의 죽음을 성서의 표현대로 단순히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둘째 사망이 지니고 있는 심판적 요소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두 번의 사건으로 단선적으로 배열하기보다는 성서의 전체적 의도에 따라, “한 번의 죽음이 가진 두 가지 심판의 결과”를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죄인에 대한 죽음의 운명은 전인인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심판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으로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는 첫 번째의 사망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경험하게 됨으로 이것이 곧 둘째 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째 사망을 두 번의 죽음의 배열이 아닌 한 번의 죽음 안에 동시적(simul)으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 가지 현실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부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두 종류의 부활을 소개하고 있다. 즉 악인과 의인의 부활(단12:2; 요5:28-29: 행24:15)을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부활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가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부활이 심판의 전제가 된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서는 “첫째 부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역시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구분되는 두 번의 사건인가? 판넨베르그는 이에 대해 부활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에서 소망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심판의 부활을 제외한 영새의 부활을 우선적으로 부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4)

부활사건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의 영생에 이르는 소망의 관점 하에서 봄으로, 심판의 전제로서의 부활을 일방적으로 부인하는 판넨베르그의 시도는 성서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이번에도 우리는 두 번, 혹은 두 종류의 부활을 한 번의 부활 사건이 지닌 두 가지 동시적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소망의 대상이다. 의인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은 영생에 이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죄인이 맞이하는 부활은 소망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영원한 심판의 전단계가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완성행위를 통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라는 두 종류의 가능성을 한 전인에게 내리신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이것이 의인에게는 소망이 될 것이고 죄인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성서 안에서 소개되는 심판에 대해 살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구약에서는 일관되게 심판의 주체를 하나님(여호와)으로 고백한다.(욥8:3; 시7:8).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성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으로 소개된다(요5:22).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재림 주”로 고백된다. 이것을 최후의 심판이라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성부의 심판이 성자의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있다거나 이전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성자의 심판은 그 최종적 성격에서 성부의 심판을 대신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서 맞이하는 심판과 최후의 심판과의 관계이다. 최후의 심판을 죽음에서 맞는 심판과 구분하기 위해 “최후”라는 수식어가 부가되었는지, 아니면,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분해서 죽음을 통해 맞이하는 심판을 최후의 심판으로 명명했는지 구분이 모호하다. 만일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마지막 날의 심판, 즉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이 있다면, 죽은 자는 두 번에 걸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서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문들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문57은 “몸의 부활이 당신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은 “이 세상에서의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나의 영혼은 그것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올리워질 것이고, 이 나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부활함으로 나의 영혼과 다시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된 몸을 닮게 될 것입니다”라고 진술된다. 또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제26장은 “몸이 떠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신자들이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2장 “사람의 죽음 이후의 상태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창 3;19; 행13:36).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는다)은 그것은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눅 23:43; 전2:7). 이신칭의를 얻고 완전히 성화된 영혼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간다. 이들은 여기에서 광채와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육신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히12:23; 고후5:1,5,8; 빌1:23; 행3:21; 엡4:10; 요일3:2). 사악한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어지며 이들은 여기에서 큰 고통과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눅16:23,24; 행1:25; 유6,7; 벧전3:19). 성경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가야 된 곳은 바로 이 두 장소 이외에는 없다고 가르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문들이 죽은 자들을 향해 최후의 심판을 말로는 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미 사후에 곧장 심판의 결과를 맞이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다시 번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 결과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사후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해 있고, 제2스위스 신앙고백의 경우에도 죽은 자들이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아무런 예배와 기도가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경우도, 말로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사후에 곧장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지는 운명을 선언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죽음 직후에 이미 모든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을 맞이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최후의 심판의 의의는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효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죽음에서의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두 번의 심판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은 죽음에서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나 산 자들은 아직 죽음에서 맞이할 최후의 심판이 임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쓰여지는 “이미와 아직 아님”(already not yet)을 “죽은 자들에게는 이미 임한 최후의 심판으로, 그러나 산 자들에게는 아직 임하지 않은 최후의 심판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부의 심판과 성자의 심판을 각기 다른 두 번의 심판으로 판단하지 않듯이, 죽음에서 맞이하는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두 번의 심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성서가 말씀하는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죽음에서 주님 앞에 설 때 맞이하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서술방법에 따라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심판으로 표현할 수 있다(히9:27). 죽음 이후의 심판이 죽음에서의 심판과 분리된 또 하나의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천년왕국론의 견해들을 분석해 보자.

천년왕국론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근거한다. 그런데 사실은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나 천년왕국을 독립적인 시간으로 보는 견해들은 요한계시록 20장7-10절까지의 천년 후에 사탄이 잠시 놓임받는 장면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본문을 제외한 성서 전체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본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구분된 천년왕국론을 주장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이후에 또다시 사탄의 놓임을 강조하면서, 그 이후에야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은 성서의 전체적 맥락과 어긋나는 사실이다. 성서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궁극적인 완성 이전의 것으로 언급되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지양되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문자적 천년왕국론 이전에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해서 소망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죽음’과 ‘부활’, ‘심판’ 그리고 ‘천년왕국’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일관된 원리가 작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성서를 단순히 문자적으로 반복함으로 종말의 사건들을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의도된 목적과 원리들을 성서의 전체 맥락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기존의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로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의 근원에는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eschata)로 보려는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적 진술을 일방적으로 연속적인 사건들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시키게끔 만든 결정적 원인제공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말론의 진술의 대상은 이러한 구성적인 종말론적 장면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말 완성 행동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역사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위”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 근거를 “궁극적인 것”(eschaton)이라는 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먼저 “궁극적인 하나님의 완성행동”(eschaton)의 시각에서 “마지막일들”(eschata)의 진술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25) 성서가 일관되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적 완성행동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다양한 종말의 사건들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틀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전체적 종말의 빛에서 개별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연관성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가 있다.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종말론적 사건들인 부활, 영생, 심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등에는 반드시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을 통해 서술되는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마치 신약성경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종말론적 노래들 안에 고정된 멜로디(cantus firmus)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없이 진술되는 법이 없다.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나 심판, 그리고 이미 초림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완성(때로는 이를 천년왕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소망으로 받아들여졌다.26)
 

V. 시간의 논리 안에 갇힌 종말론: 연장된 시간으로서의 영원 이해

사실 앞 장에서 다루었던 종말사건의 병렬식 전개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해석학적 오류가 숨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말론을 연장된 시간의 논리 안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종말론에서 취급되고 있는 모든 개별적인 주제들은 한결같이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 안에서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이해되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한 마르쿠바르트의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 종말론은 죽음과 심판, 부활 및 영생 등 하나님에 의해 전개되는 엄청난 사건이라는 사실보다 단순히 먼저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뒤따라 일어나는 시간 속에서의 순서와의 관련성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로써 종말론은 세계 역사 과정의 종착점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운행시간표처럼 취급되고 있다.27)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두 번의 죽음 대신 한 번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동시적 두 성격으로, 두 번의 부활 대신 한 번의 부활 안에 있는 부활의 동시적 두 결과로, 두 번의 심판 대신 한 번의 심판의 궁극적 성격으로, 하나님 나라와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천년왕국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주장하면서 시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두 번의 사건 대신 하나의 사건이 지닌 동시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한 편으로는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배열된 종말론을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편으로는 더 힘든 과제를 맞이하고 있다. 죽음과 부활과 심판과 영생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및 하나님 나라의 실현 등, 서로 다른 종말론적 개별적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는 중대한 과제에 당면해 있다. 이는 기존의 종말론이 단순히 개인의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으로 구분하여 양자의 연결을 포기한 채로 남겨 두었던 영역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단순히 시간적 선후관계로 배열해 놓고 만 주제들이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음, 부활, 심판, 영생,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죽음, 심판, 부활, 영생,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서는 논리적 귀결로 형성된 순서이지 시간적 순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이 죽음보다 앞서서 올 수 없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순서이다. 그러나 부활과 심판과 영생이 모두 죽음의 순간에 집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 지배하는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으로서의 영원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시간적 선후관계로 얽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일 먼저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중간상태”에 관한 종말론의 진술이다. 중간상태라 함은 개인의 죽음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시간까지의 미완서의 상태를 말하며, 이 기간 중 이미 죽은 자들은 중간상태에서 종말의 완성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중간상태는 칼빈이 말한 바대로 불완전의 상태, 기대의 상태, 잠정적 축복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개혁교회 신앙고백문들을 분석해 보면 죽은 자들의 운명은 부활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됨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들의 천국과 지옥의 운명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의 문제이다.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성서의 증거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과 일반적 의미에서 그리고 특별히 산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의미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동안 간접적으로 만났던 그리스도의 임재의 경험이 재림을 통해 완전히 직접적으로 성취되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그때에는” 이미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결정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의미는 한가지로 모두 그리스도와의 결정적 만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죽은 자들이 이미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까지 부활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죽음 이후의 시간에 과연 세상에서와 같은 의미에서의 “기다림”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있는지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기다림이란 지상에서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의 자아가 무덤 속에 있지 않고 주님께 이르렀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다려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서의 선포대로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부활과 주의 재림의 의미는 그 근본적 의미에 있어서 주님과의 만남없이, 즉 주님의 결정적 간섭없이 부활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으로 실현된다고 이해하여도 성서의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28)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상상력 넘치는 종말의 예언적 진술로부터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로핑크는 그의 논문 “죽음”이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에서 다음의 7가지 주제를 소개한다:

1. 죽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만나게 된다.

2. 이 만남은 우리에게 심판이 될 것이다.

3. 이 만남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주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체험 하게 된다.

4. 몸과 영혼의 전인이 죽음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신의 전 삶과 인격적 세계 그리고 바꿀 수 없 는 그의 삶의 전역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5. 이 세상의 남겨진 세계와 전체 역사는 우리(죽은 자들)의 고유한 역사와 함께 연결된다. 그러 므로 죽음 안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남아 있던 전체 역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6. 죽음에서 모든 시간은 침몰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성취 뿐만 아니라 세계의 완성을 경험한다.

7. 우리와 하나님의 결정적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29)

이상과 같은 로핑크의 종말론적 진술에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론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은 자들에 관한 종말론적 진술이 산 자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로핑크의 진술대로 모든 것이 죽음 안에서 (혹은 죽음 이후에) 완성되었지만, 산 자들에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열려져 있는 상태이다. 성서의 진술대로 그들에게는 아직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유효하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에게 함께 적용될 수 있는 시간의 논리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주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우리는 종말론에서 “이미와 아직 아닌”으로 표현한다. 이를 단순히 시간의 역사에만 단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복합적으로 적용하여서, 죽은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종말의 완성과 산 자들에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로 설명한다면, 산 자들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시간의 논리를 죽은 자들에게 까지 강제로 적용하여서, 죽음 이후의 기다림의 시간을 설정하였던 논리적 결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산 자들에게는 다른 시간이 적용되고 있는 다른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종말론은 산자들이 경험하는 시간을 일방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적용하여서 죽은 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상의 산 자들이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모순이 있었으나 “이미와 아직 아닌”의 시간을 죽은 자들과 산 자들에게 함께 적용한다면, 시간의 논리에 갇힌 종말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종말론에 적용될 시간의 논리를 “영원”(죽은 자들)과 함께 “미래”(산 자들)를 적절히 사용함으로 종말론을 시간의 연장으로만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의 모든 사건을 영원으로 설명함으로 이 땅의 역사와 아직 남은 인간의 미래를 함몰시키는 잘못30)을 극복할 수 있다.
 

VI. 나가는 말

어느 한 신학자가 말했듯이, 기독교의 종말론 전체를 논한다는 일은 주제넘는 일이고 지난하기 그지없는 작업이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여야만 한다. 종말론이 우리의 구원의 결론이며 우리의 소망의 내용이 된다면, 우리는 종말론을 미지의 영역에 가두어만 둘 수는 없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기존의 종말론이 지닌 해석학적 문제점들을 소개하면서, 이를 극복할 틀로서: 1. 이원론적 인간론의 극복으로서의 전인적 인간이해, 2. 자연신학에 근거한 영혼불멸론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을 강조하는 부활신앙, 3.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병렬식 종말론 전개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위의 시각에 기초한 포괄적 성서해석, 4. 시간의 연장으로 해석된 종말 이해 대신, 시간과 영원의 적절한 적용을 통한 종말론 등을 제안했다.

필자가 제안한 종말론적 해석의 내용들이 이미 한국의 몇몇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줄로 안다. 필자도 신학교 시절 이 같은 내용을 처음 접하고 충격과 함께 황홀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종말론은 필자의 신학적 관심에서 항상 중심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아직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신학교에서의 종말론과 교회에서의 종말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 졸고가 한국교회와 신학교 사이의 종말론에서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졸고를 통해 종말론에 관한 본격적인 많은 논쟁들이 계속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미주>
1)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의 분리를 제시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말론 교과서들은 이 두 영역을 논의의 편의상 구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각각의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서술에 국한되어 각 사건들이 전체 종말론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언급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러서 죽음에 대한 서술은 단지 그 주제에 국한될 뿐이어서 그 이후의 부활과 영생과 나아가서 이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체 종말적 완성행위와의 관련없이 배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개인의 종말사건들이 전체 역사에 대한 종말사건과 어떠한 연관성 없이 단지 개별적인 서술들로 일관되어 있다(Vgl. Christofer Frey, Dogmatik, 1987.80).
2) 필자는 이 논문에서 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성서 자체에 여향을 주었다고 보지 않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플라톤주의는 우리의 성서를 읽는 전제에 영향을 줌으로 성서의 본래적 의도를 떠난 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성서를 읽도록 하는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인간과 종말에 관한 성서의 본래의 메시지를 찾는 것을 종말론의 해석학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3) Heinrich Doerrie, Art ."Platonismus" ,RGG3. 5,414
4)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제7장 “인간에 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 역시 인간의 한 인격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하나는 불멸의 영으로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자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할 육체로서 최후 심판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니 살아 있는 때이든 죽어서든 간에 전인(全人)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여기에서 말로는 전인이라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성서의 전인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성서적 전인은 몸과 영혼의 두 실체가 만나서 이루는 전인이 아니라 인간은 한 인격이며 그 인격 안에 서로 대립하는 나, 바울의 용어를 빌면 속사람과 겉사람 혹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말하지 영혼과 몸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안고백서에서도 제32장 1항에서,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창3:19; 행13:36)고 되어 있다.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는다)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눅 23:43; 전 2:7)...여기에서도 인간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었으며 죽음에서 이들이 분리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내용상의 특징은 영혼 수면설과 영혼 멸절론을 부정하는 데에 치중되고 있다(참고 이형기 편저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1991).
5)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Pietro Pomponazzi(1462-1525)의 “Tractatus de immortalitate"(영혼불멸에 관한 진술)에서 그가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함으로 이 책이 출판된 1562년 이 책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는 이 책을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고 사후에야 겨우 출판했다.
6) 이러한 점에서 니이체는 “기독교를 민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로 평가하였다(Friedrich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1994,7)
7) Eberhard Juengel, Tod, 1985,60.
8) Ibid,,73.
9) 이에 대하여 한스 발터 볼프,[구약성서 인간학](분도출판사, 1991),28-116dmf 참조하시오.
10) 참조. Rudolf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2. Aufl., 1954, 188-205
11) Ibid.., 191
12) Klaus Berger, Ist mit dem Tod Alles aus?, 1997,32
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4장의1.
14) Hong-yul Chung, Totus homo in der christlichen Auferstehungshoffnung und Eschatologie, Erlangen, 1997,66.
15) Joseph Ratzinger, Eschatologie, 130.
16) Katechismus der Katholischen Kirche, 1993.
17) Sekretriat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nz(Hrg.), Schreiben der Kongregation für die Glaubenslehre zu einigen Fragen der Eschatologie, 1979. 5.
18) Paul Althaus, Die Letzten Dinge, 1961, 110
19) Joerg, Baur, "Die Rechtfertigungslehre in der Spannung zwischen dem evangelischen 'Allein' und dem römisch-katholischen Amts- und Sakramentsverständnis", EvTh 58,Jg.1998,144
20) Jürgen Moltmann, Das Kommen Gottes, 1995,82
21) Karl Barth, KD III/2, 716
22) Karl Barth, KD III/2, 770
23) Hong-Yul Chung, totus homo, 117-120.
24)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d. 3, 1993, 612
25) 이에 관하여는 Sigurd Hjelde의 방대한 박사학위 논문이 “Das Eschaton und die Eschata"를 참조하시오(BEvTh, 102,1987,특히 24-26)
26) 정홍열,“소망에 대한 조직신학적 접근-인류의 참소망이신 그리스도‘,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편, 1999),277.
27) F. W. Marquardt, Was dürfen wir hoffen, wenn wir hoffen dürfen?, I, 1993, 21.
28) 필자는 여기에서 요11:23 이하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의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믿나이다”(24절)라고 이해했으나 주님의 행동은 사실상 이를 부정하신 것이다. 주님의 의도는 마지막 날만이 아닌, 지금 에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부활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마지막 날데 주님이 오심으로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날(주님을 만나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되는 것이며 그때가 부활의 때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에수 그리스도는 “시간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29) Gerhard Lohfink, "Was kommt nach dem Tod?”,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QD71, 1986, 208-223.
30) 이 점에 관해 판넨베르그는, 최근에 발달된 “개인의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사상”으로 인해 역사의 종말을 강조하는 종말론(endgeschichtliche Eschatologie)이 무시된 채 개인의 운명과 인류 전체의 운명을 마지막 날의 부활에서 함께 인식했던 기독교 종말론의 중요한 특징이 상실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Die Aufgabe christicher Eschatologie",ZThK 92, 1995,79-80). 이러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영원과 함께 미래를 동시에 종말론의 해서의 틀로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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