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목회·신학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
북리뷰/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2018년 07월 18일 (수) 14:22:24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기독교인은 분노해도 괜찮은가?’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럼 역으로 ‘기독교인은 화를 내면 안 된다는 말인가?’라는 것도 동일하다. 한 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간혹 기독교인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것은 그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인의 분노에 앞서, 일반적인 분노에 대해 언급해 보자.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도움을 준다. 꽤 유명한 책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1917년 생이다. 지금 생존해 있다면 나이가 101살이 된다. 이 책 <분노하라>의 초판 발생이 2011년이니, 저자가 90세를 넘겨 쓴 책인 셈이다.

저자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저자 스테판 에셀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7세에 프랑스로 이민을 가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저자는 프랑스를 위해 레지스탕스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진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 외교관으로 보낸다. 1948년 유엔에서 ‘유엔인권선언문’을 준비할 때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

스테판 에셀은 자신이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하게 된 동기에 대해 ‘분노’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프랑스인에 대한 독일군의 태도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분노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 된다고 한다. 반대로 분노하지 않는 것, 즉 무관심은 가장 나쁜 삶의 자세라고도 언급한다. 반드시 분노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분노를 표현한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분노의 표출 방식은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분노해야 할까?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삶의 수많은 일들에 매 순간 분노해야 하는가? 스테판 에셀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여 보자.

스테판 에셀은 크게 두 가지를 분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p.22). ‘빈익빈부익부 사회’와 ‘인권’이다. 오늘날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도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들 노동의 이익을 오히려 가진 자들이 챙겨간다. 개탄스러운 사회다. 시각을 우리나라로 한정시켜도 다르지 않다.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이 사회가 그렇다. 열심히 노동을 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잘 놀고 잘 먹을까’만을 고민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일에 분노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권이다. 어느 특정국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아직 어리다는 이유 등으로 자신의 존재가 무시 당하는 현상이 적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취급 받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떠한 이유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물론 그 인권이 우리네 삶의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인권 운운하면서 죄인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상황에 대해서도 바른 판단을 가져야 한다. 자칫 인권이 옳고 그름의 경계를 흐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노하라>의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하기 위해 옮긴이(임희근, 출판기획 ‘사이에’ 대표)와 스테판 에셀의 이메일 인터뷰가 진행됐다. 스테판 에셀은 이번 인터뷰에서 ‘94세 고령에도 열정적인 삶을 사는 비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 이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나는 그야말로 행복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pp.55-56)

분노가 사회 참여하는 길 이전에 ‘나의 나됨’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행복을 준다고 말한다.

‘분노’에 대한 이 시대의 석학, 스테판 에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 속에서 분노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때 우리는 분노해야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 분노를 해야 하느냐에 대해 스테판 에셀을 통해 도움을 받게 된다. 내 이익, 기분, 계획 등 개인적인 일을 넘어 좀더 큰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기독교인은 분노해도 괜찮은가?’

예수님도 크게 분노하셨다는 성경 본문으로 인해 ‘분노해도 되나, 안 되나’에 대한 답은 결정된 듯하다. 이제는 역시 ‘무엇으로 분노를 해야하는가’에 대해 접근해 보는 게 더 유익하리라 본다.

1. ‘성전’답지 못함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소위 ‘성전청결사건’이 있었다(요2:12-25 등). 복음서 전체를 통해 이 사건을 예수님 공생애 전반부와 후반부 각각 한 번씩 2차례 발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수님은 성전 안팎이 장사하는 이들로 북적거리며 마치 시장 한복판처럼 변한 것에 대해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며 크게 분노했다. 장사하는 이들을 호통쳤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내쫓고, 장사하는 상을 엎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통을 쏟았다. 예수님의 분노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무슨 의미인가? 성전을 성전답게 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아닌가? 즉 오늘날로 표현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노하신 것이다. 우리도 동일한 일에 분노해야 한다.

교회가 사교장으로 전락하는 일이 많다. 소위 수다 떨고 싶어서 오는 이들을 있다. 각종 자기 자랑이 오간다. 새 집, 새 차, 금은보석, 자식 자랑 등이다. 여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쉽게 교회를 옮기기도 한다. 교회가 보험 세일즈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다단계 판매원의 집합장소로 변하기도 한다. 정치인에게 교회는 얼굴을 알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이들에게 예배는 통관 절차에 불과한 일이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한 일에 분노해야만 한다.

2. 믿음 없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심한 말을 쏟아내신 적도 있다(마12:34). 오늘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거의 육두문자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분노하신 것일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이 안 보이고, 말을 못하는 지체장애인을 치료해 주셨다(마12:22). 이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있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귀신 쫓아내신 일은 그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귀신의 왕이라 불리우는 바알세불의 힘에 의존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을 잘 표현해준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훼방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심하게 분노하셨다. 마음 속의 ‘악함’에 대해서 호되게 질책하셨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은 일을 겪기도 한다. 마치 예수님으로 인해 나 자신의 장애가 치료된 것처럼 기쁘고 놀라운 일을 만나기도 한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말이다. 그때 종종 ‘재수가 좋아서’, ‘내 능력이 좋아서’ 등으로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머리카락도 세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우리네 삶의 일거투일투족을 사랑으로 간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믿음 없음에 대해, 마음의 악함에 대해 분노하셨다.

이외에도 하나님의 분노하심은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출32장) 등 성경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분명히 ‘분노’하셨다. 문제는 무슨 일에 분노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일에도 동일하게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기독교인’이지 않겠는가.

장운철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통합재판국원 김점동 목사 저녁식사
(24) 9월 총회에서 쓰나미처럼
김기동! 자네가 한 행정조치 모두
이재록 신매자 이희진 “(이씨 구
세습 인정받은 김삼환, 쓰나미 세
신사참배보다 치욕스런 명성 세습,
“명성 세습판결 바로잡고 교회다움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한국교회문화사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제호 : 교회와신앙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