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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바르트..음악가 아내를 두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바르트-샬로테, 육체 사랑도 했을까?⓷
2018년 07월 10일 (화) 13:20:42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김정언 기자】 필자의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칼 바르트는 1920년대 중반까지 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고 한다1. 바르트 관련 저술가들이 한결같이 이 점을 강조하곤 한다. 일종의 절대고독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에겐 평생 친구들과 동지들, 제자들, 시쳇말로 '광팬'들이 따랐는데도 그랬다니, 어찌 보면 좀 화려한 외로움이었다고나 할까? 더구나 사춘기엔 안나 히어첼(Anna Hirzel), 청년기엔 뢰지 뮝어(Rösy Münger) 등 예쁜 아가씨들이 그를 따라 주었다2. 비록 둘 다 맺어지지 못한 슬픈 사랑이었지만. 맺지 못한 사랑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 것일까? 도대체 어떤 천재적 '외로움'이었던 것인가?

   
바르트의 아내인 바이올리니스트 넬리 호프만의 1906년 모습(13세). 1911년에 약혼을, 1913년에 결혼을 했다.

◈ 아내의 음악도 그는 불만? 혐오?

그는 자녀를 다섯이나 낳아주고 길러준 아내 넬리 호프만과의 사이에도 늘 외로움을 느꼈단다. 넬리가 누구던가? 재능 있는 수준급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바르트와의 결혼을 위해 그 이상의 음악 학업은 접어야 했다. 그래선지 바르트 주변담에서 약혼 당시 외에는 그녀의 바이올린 이야기나 연주에 관한 언급은 거의 전혀 없다.

그런데 실상은 마치 음악을 포함한 넬리의 전부가 바르트의 거대한 명성과 삶 속에 완전히 용해된 채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음악을 그다지도 사랑했다는 바르트에게 넬리의 음악만은 철저히 배제(?) 또는 희생됐다면 얼마나 불행한 역설인가! 넬리가 이 때문에 서러웠다면, 아마도 친정어머니와도 같은 이름인 시어머니 안나의 전적인 지지 때문에 그나마 많이 상쇄됐을 것이다. 자식들도 대부분 그녀를 지지해주었다.

돌이켜보면, 바르트는 어려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무척 사랑했다. 특히 모차르트를 애호했다. 그는 심지어 베토벤을 '계시의 한 원천'으로 꼽기도 했다3. 바르트는 어릴 적에 아빠 프리츠가 피아노로 들려주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법의 피리' 중 이중창, 'Tamino mein, o welch ein Glück!(나의 타미노, 오, 이 기쁨!)'4를 들으며 처음으로 "위대한 음악"과 조우했던 감흥을 술회했다5. 감수성이 매우 일렀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트는 이 음악이 자신을 "철저히, 속 깊이 전율하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가 대여섯 살 때 들으며 전율했다는, 처음부터 화려한 고음역인 이 노래마저도 두 연인 타미노와 파미나의 사랑과 최종적 재결합에 관한 내용이다. 어쩌면 칼은 어릴 적, "위대한" 음악을 대한 첫 순간부터 잠재적으로 미래의 궁극적인 연인과의 합일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어서 바르트는 열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핸델과 모차르트를 연주했다. 그러나 자신의 바리톤 저음으로 노래하기를 더 즐겼다. 괴팅엔 대학교 교수 시절, 학생들의 열광 파티에서도 직접 피아노를 치며 걸걸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 노년에 죽을 때까지 정신요양원에서 지내야 했던 사랑하는 샬로테를 매 주일 찾아가 코랄을 불러줄 정도로6 평생 루터교 코랄을 즐기면서, 아울러 코랄 가사의 신학을 자랑스레 인용하곤 했다.

◈ 바르트는 '모차르트 광'

바르트는 루터의 후예답게 음악을 지극히 높였다7.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한 편의 강력한 설교'라고 하는가 하면, "모차르트나 바그너 같은 천재의 음악 속에서 신적인 영감을 발견한다고 안될 게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8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얼마나 사랑했느냐면, 그의 서재 벽에는 칼뱅과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서로 마주 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의 모차르트 사랑은 노년기로 갈수록 더해 갔다. 바르트는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이밴스에서 열린 개신교 행사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서 모차르트의 가톨릭 의식 음악인 '대관식 미사'(Missa Brevis K.317)가 연주되길 바라기도 했다. 그가 모차르트에다 열정적으로 신학적 의미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같은 1954년에 '칼 바르트 신학 속의 모차르트 음악'(The Music of Mozart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라는 행사가 열려, 바르트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바르트와 넬리가 제대로 살림을 시작했던 시기인 자펜빌의 목사관

1956년은 바르트 자신의 70회 생일이자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 되는 해였다. 그 해에 그는 바젤에서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에 관한 기념 연설도 하고, 스위스 모차르트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강의도 하고, 언론에 글도 쓰고, 200주년 기념 음반들을 다량 구매했다. 그가 얼마나 죽도록 모차르트를 사랑했는지 입증해주는 일화가 있다. 바젤 음악홀(Basel Musiksaal)에서 열린 한 음악회에서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바(F)장조(K.413)를 연주하는 동안, 문득 모차르트가 피아노 앞에 서 있는 '또렷한 환상'을 보고 "거의 울기 시작했다"고, 아들 마르쿠스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다. 그는 이 체험을 음악에 관한 신비체험이 많았던 가톨릭 친구 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에게 토로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 신학자로서 별로 바람직한 체험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나누지 못한 공통분모

이런 바르트가 맞이한 아내, 넬리 호프만은 누구였던가? 바르트가 제네바의 마들레이느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할 당시 그의 첫 견진반에 등록해 있던 호프만 양은 그곳 컨서버토리(음악원)의 17세 소녀로, 거의 프로페셔널 음악가였다! 넬리는 견진반을 성실히 다닌 결과 1910년 승천주일에 바르트에게 견신례를 받았다. 말하자면 넬리는 아내이기 이전에, 사역자 바르트가 그녀의 신앙고백을 들어주고 견신례를 베풀어준 한 성도였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얼마 후 키르쉬바움을 만나고 나자, 성도이자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들의 어머니인 넬리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너랑 나랑은 안 맞는다"는 식으로.

넬리는 본래 1893년, 변호사이자 장트 갈렌 마을의 서기였던 로버르트 호프만과 어머니 안나 엘리자벳 사이의 5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바로 이듬해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양육받았다9. 전술한 대로 호프만 양은 바르트와 약혼하게 되면서 자신의 음악 학업도 포기했다. 

자, 아무러나 둘 다 바이올린과 모차르트를 좋아한다면, 우선 정서적으로 함께 행복할(?) 만한 공통분모 요소가 아닌가? 그런데 바르트 말마따나 "우린 처음부터 잘못 엮인 만남"이었다면, 신혼 때부터 프란치스카, 마르쿠스, 크리스토프, 마티아스, 한스 야콥 등 5남매를 줄줄이 낳을 동안마저도 자신은 전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인지? 그런 가운데도 불행감이 더 넘쳤다는 것인지? 딴 전기에 따르면 둘 사이는 "내내 행복"했고, 특히 첫 10년간은 그랬다고 한다10. '외로움' 운운한 말이 얼핏 거짓말로 들린다.

도대체 어느 쪽, 어느 전기가 맞는 것인가? 아니, 한쪽 전기 말마따나 행복했다면 왜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는지, 왜 그 행복한 가족과 지내면서도 외로움이 지속되다 오로지 예쁘고 상큼한 샬로테를 만나자 외로움이 그쳤다는 것인지, 독자는 이해가 되는가? 


아내의 음악적 이름도 무색!

사실 '호프만'이라는 이름 자체가 얼마나 음악적인가! 더구나 한 개의 이름 뜻을 중시하는 바르트가 아니었던가11? 모차르트와 동시대 사람으로 같은 나라인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한 레오폴트 호프만이라는 작곡가/연주가가 있었고, 바르트와 같은 19세기에도 독일 작곡가 하인리히 호프만, 리히하르트 호프만 등이 있었다. 심지어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의 최후작인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Les contes d'Hoffmann) 중에 나오는 명(名) 이중창 '바르카롤레'(일명 '호프만의 뱃노래')도 바르트 이전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러니 음악을 아는 이라면, 호프만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면서 음악이 절로 흐를 지경 아니겠는가? 그리고 음악이 얼마나 사람의 정서를 지배하는가?

그런데도 넬리 호프만의 괄괄한(?) 성격상, 바르트에게 외려 과거의 외로움에 외로움을 보태어 주었단다. 아내의 음악적인 이름과 바이올린 음악으로도 그의 외로움은 달랠 길이 없었나 보다. 그의 외로움이란 그렇게도 값비싸고 도도한 감정이었던가. 그런데 음악 전공과는 상관이 없던 키르쉬바움이 나타나니, 바르트의 오랜 외로움은 팍~! 하고 사라졌단다. 그 정도로 그의 외로움이 가벼웠던가! 키르쉬바움의 존재 앞에는 다섯 자녀를 낳은 조강지처도, 그녀의 바이올린과 음악도 거의 의미성을 잃어버렸다. 넬리가 없었더면, 마르쿠스 바르트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도 없는 것 아니었나?
 

   
다정해 보이는 바르트와 넬리 부부

다윗과 솔로몬은 자신들의 화려한 왕궁 하렘 또는 침궁에서 수많은 왕후, 후궁들과 함께 성생활은 물론, 궁중음악도 즐긴 것이 확실하다(사무엘하서 19:33~35, 시편 45:8하, 전도서 2:8 참고). 그처럼 바르트의 결혼 초기에 아내 넬리 호프만의 음악이 둘의 성생활을 포함한 깊은 정서생활 내지 서정적 친밀감을 돋우어 주지는 않았는지? 그래도 그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는지? 다섯 자녀를 낳을 동안의 침실 생활은 외로움을 참고 의무감에서 지낸 것인지? 물음이 그치질 않는다.

◈ 3인공동체...성생활만은 예외?

시리즈 9회 끝에 언급된 호주 저술가 롭 율(Rob Yule) 목사는 바르트 관련 서신들과 관련 서적들을 섭렵하고 난 뒤, 키르쉬바움은 바르트-넬리-키르쉬바움, 셋의 특유한 '삼각관계'에서 "커다란 고통과 끔찍함을 느꼈다"고 서술했다12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넬리는 남편의 노골적인 배신에 대한 자신과 가족의 커다란 손상감을 느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키르쉬바움은 넬리를 더 잘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애를 썼고, 어떤 대안을 갈구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이 3인비상공동체(Notgemeinschaft zu dritt)였다13

그런데 [남+2녀]의 이 공동체 삶 속의 공동 사안에서 유독 성생활만은 제외됐었나? 다행히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부부인 바르트와 넬리에게만 국한됐었는가? 이에 대해 율은 말한다. "누구나 알기 원하는 물음은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이 육체적으로도 친밀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긴가민가하다"14. 그렇다면 율은 역사적 크리스천들의 성에 관한 책은 왜 썼으며, 거기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의 자리는 왜 만들었는지 애당초 저술 동기가 의아스러워진다. 그냥 호기심으로 손댔을 뿐인가? 대다수의 바르트-키르쉬바움 관련 저술가처럼, 결과적으로 나머지는 그냥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 것인가?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의 관계에 관하여 가장 많은 양의 글을 썼고 가장 많은 성 개념을 다룬 수잰 셀린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그녀의 답은 한 마디로 "성적 관계라고 할 만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이 문제만큼은 유보적인 것이다. 그 대목에 대한 추가 자료는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숨은 이유로 그런 노력을 중단하고 짐짓 결론을 내린 것인가?

◈ 프린스턴에서 한 방 썼다

그런데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이 1962년 미국 여행 중 프린스턴 신대원을 방문했을 당시 놀랍게도 둘이서 같은 방을 썼다15! 물론 동숙(同宿)이 곧 동침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순 없다. 그러나 유부남과 미혼녀가 대담하게, 더구나 신대원에서 그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둘 사이는 모든 것에서 부부 이상으로 친밀하다는 근거가 아니겠는가? 이유와 정황이야 어떻든, 키르쉬바움의 자리는 당연히 넬리의 것이어야 했다. 알고 보면, 사실 이 어이없는 상황은 과거 1920년대말부터 둘이 함께 장기 휴가를 보내곤 하던 때를 포함한, 둘의 오랜 관행이었던 것이다16그리고 이 관행은 둘과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반감을 자아내면서 가십거리로 회자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아들인 신약학자 마르쿠스 바르트17가 아버지와 '롤로 아줌마'의 서신들 일부를 공개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녀가 바르트의 '정부'(mistress)였다는 루머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본래의 진실을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의 발상처럼 어정쩡하게 당사자들의 서신 일부를 공개한다고 해서 쉽사리 루머가 잠재워질까? 사실적인 정보는 루머를 잠재울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루머를 더 리얼하게 만들어 줄 수도 없지 않다. 바르트의 경우 어느 쪽일까? 루머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의 것이었나?

   
미국 프린스턴 방문 당시의 바르트

아니 그보다도 목회자와 신학자적인 양심으로, 마르쿠스는 그 누구보다 둘과 가까웠던 가족의 일원으로서 내심으로도 키르쉬바움이 결코 아버지의 정부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그냥 순수하고 경건한 학적 도우미였을 뿐이라고 믿었을까, 아니면 단지 아버지와 그녀, 가족의 명예를 위해 루머를 잠재우려는 시도를 하다 만 것일까? 그 서신 공개로 루머가 잠재워진다고 확신했을까? 솔직히 궁금한 이슈들이다. 만약 마르쿠스의 기대대로 루머가 잠재워지고 결과적으로 둘의 결백이 확인됐다면, 2000년대의 추가적인 서신 공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셀린저는 "칼 바르트가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에게 한 것 같은 그런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 헌신했다면, 그것은 간음"이라는, 바르트와 동시대인인 미국인들의 견해를 인용한 바 있지만, 정작 성적 관계의 증거는 없다는 입장을 굳혔다18. 하기야 바르트의 어머니인 안나 자신이 아들의 행동을 '간통'이라고 표현했으니 오죽하랴19. ​그런데도 실재는 정말 별 자리 주위에 아른거리는 성운처럼, 부연 안개 속처럼 몽롱하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각주>
1. 본 시리즈 이전 회들, 특히 제 8회를 참고하라.
2. 시리즈 3, 5회 참조.
3. 바르트는 '기독교 신앙과 역사'(Die Christliche Glaube und die Geschichte)라는 긴 글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미켈란젤로와 함께 베토벤을 '계시의 원천들'로 나열했다. Busch, 57. 제레미 벡비와 스티븐 구트리의 '울림의 증인-음악과 신학의 대화(Jeremy Begby and Steven Guthrie, Resonant Witness-Conversations between Music and Theology), (Wm. B. Eerdmans Publishing, 2011), 245. 그러나 1914-1915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경원과 환멸, 그리고 고별 이후 음악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자신의 경향을 조심하게 됐다. 루돌프 불트만과의 1934년 토론에서는 과거 음악과 문화를 '자연신학' 또는 계시의 한 형태로 여긴 점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과 음악을 결부시키는 경향은 만년까지 지속됐다. 자세한 관련 내용을 Begby & Guthrie의 위 책 바르트 부분(244쪽 이후)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4. 타미노 역시 연인인 파미나의 이름을 부르며 똑 같은 찬탄을 한다.
5. 바르트의 '모차르트에게 바치는 간증'에서. Barth, Karl, Wolfgang Amadeus Mozart, Clarence K. Pott 옮김(Grand Rapids: Eerdmans, 1986), 15. 부쉬, 같은 책 15. 본문의 이하 문단에서 같은 책의 같은 쪽 상당량 참조.
6. 나중엔 가족의 다른 일원에게 맡겼다.
7. 바르트의 음악관은 루터의 그것과 대동소이했다. '음악신학'을 구축하다시피 한 루터는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최고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 "나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에 최고의 위치와 최고의 영예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하나님 말씀=신학>음악]이라는 논리가 된다(사실은 모순된 논리다). 그는 또 "음악은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이며, 따라서 마귀를 온전히 적대한다. 음악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위안이다(Die Musik ist die beste Gottesgabe und deshalb dem Satan völlig zuwider. ..Musik ist der beste Trost für einen verstörten Menschen…)"라고 주장했다. 문장상 보편화된 이 주장은 논리적/범주적으로 상당히 어폐가 있는 단언 아닐까? 예수 크리스토와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최고의 선물 아니던가. 또 가령 '마법의 피리' 등 (프리메이슨들이 가장 존중해온, '비엔나 라지' 단원이었던) 볼프강 모차르트의 후기 음악이 마귀를 적대하는가, 반대로 마귀를 위하는가? 레이디 가가 등 극도로 타락한 현대의 음악은 또 어떨까? 루터의 음악 예찬들은 시대를 내다보지 못한, 매우 나이브(naive)한 주장들이다. 위인들은 나름 선언에 앞서 우선 그 선언의 논리적/범주적 조정부터 선결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8. Begby et al, 244f. 이하에 같은 책 같은 쪽 참고.
9. 부쉬, 59쪽. 

10. 예를 들면, https://postbarthian.com/2018/04/18/life-karl-barth-early-life-basel-geneva-part-1 아니면 이것은 사실이 아닌데도 짐짓 그렇게 주장한 것인지?
11. 전체 시리즈 제 8회 참조.
12. Rob Yule, A Terrifying Grace: Sexuality, Romance and Marriage in Christian History, 제7장 참조.
13. 얼스킨 대학의 성경종교학 교수, 윌리엄 이밴스(William B. Evans)는 이를 '필요에 의한, 그러나 셋인 만큼 문제가 더 많은 연합'이라고 옮겼다.
14. Yule, 같은 책, 같은 장 참조.
15. 셀린저, 12. 바르트학 학자인, 프린스턴 신대원 '촬스 하지' 조직신학 (명예)교수, 대니얼 밀리오어(Daniel Migliore) 박사는 당시 미국에 온 바르트가 키르쉬바움과 둘이서 방 한 개만 요청했다고 상기한 바 있다. 밀리오어 제자의 트위터
http://bitly.kr/D8Sz 참조.
16. 예컨대 1929년 베르클리에 있는 페스탈로치의 산장에서 둘이서 한동안 휴가를 가졌던 것 등.
17. Markus Barth(1915~1994). 바르트의 맏아들. 스위스 신학자로, 베른과 바젤, 베를린, 에든버러 등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롤로 아줌마'의 관계에 대하여 다른 형제들보다 이해적, 긍정적이었다. 1940~1953년 바젤 부근 부벤도르프에서 루터교 목사로 사역하면서 1947년 괴팅엔 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3~1972년 미국 (아이오와주) 두뷰크, 시카고, 피츠버그 등의 신대원에서, 1973~1985년엔 모국, 바젤의 신약학 교수를 지냈다. 주된 관심 분야는 세례와 주의 만찬에 대한 성례적 이해, 바울 서신 신학과 유대인-기독교 대화 등. '앵커(닻) 성경주석 시리즈'의 골로새/빌립보서 주석을 쓰기도 했다. (이상 위키피디어 요약).
18. 셀린저, 13.
19. 티츠 소논문 참조. 바르트의 어머니 Anna Katharina Sartorius(자르토리우스) Barth는 아들과 키르쉬바움의 교제를 처음부터 맹렬히 반대했으며, 거의 언제나 넬리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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