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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삼 / 돈 이야기 ] 가난해야만 깨끗한가?
2018년 05월 08일 (화) 13:26:41 권영삼 목사 032kwon@naver.com

권영삼 목사 / 광교사랑의교회 담임

   

▲ 권영삼 목사

필자가 부교역자 시절에 겪은 일이다. 어느 날, 부목사 S가 설교 당번이 되어 금요심야기도회 설교를 했다.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였다. 제목이 가물가물해서 해당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았지만 현재 그 설교는 올라와 있지 않았다. 설교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 날, S목사는 본문을 비교적 열심히 주해해서 성도들에게 의미 있는 적용을 유도했다. 그런데 돈에 대한 관점에서 그만 오류를 드러내고 말았다. 가난한 나사로가 천국에 가고 인색한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돈에 대하여 인색하지 말고 나누며 살라는 의미로 설교한 것 같다. 특히, 이 세상에서 소유욕을 가진 채 자기를 높이는 데만 집중하는 부자 같은 사람에게 천국은 보장받을 길이 없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라고 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설교가 끝난 후 담임목사가 강단에 올라왔다. 보통 때는 설교가 갈무리되면 설교자가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등단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설교 내용을 수정하기 위한 나름의 보루(堡壘)였던 것이다. 담임목사는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 뒤 기도모임을 인도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돌아간 뒤 부교역자들을 따로 모아놓고 다시 본문의 의미를 성경적, 신학적으로 조명해 주었다.

돈과 관련해 볼 때 가난한 사람을 미화시키고 부자를 격하시키는 메시지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성도는 내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돈에 대한 청지기적 삶에 도전을 주는 조언이었다. 지금도 그날의 교훈이 여전히 필자의 뇌리에 남아 있다.

돈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기 위해 한 번쯤은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청빈(淸貧, poor but honest)이다. 청빈의 사전적 의미는 ‘성품과 행실이 곧고 탐욕이 없어 가난함’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가난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청렴과 가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청렴하면 가난’이라는 미덕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청렴하면 왜 가난해야 했을까? 청백리(淸白吏) 서기순의 일화를 보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단순히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하게 된 것과 달리,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는 가난을 선택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서기순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 5대에 걸쳐 세 명의 정승과 네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의 자손이다. 이러한 명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청빈의 한 예가 있다. 어느 날 궁궐에서 급한 공문을 전달하려고 집을 방문한 관리가 초 한 자루 없는 집이 안쓰러워 초를 사가지고 왔다. 하지만 이러한 초조차도 그냥 취하는 법이 없었다. 서기순은 평생 집이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 청렴을 인정받아 조선 순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청빈의 대명사는 한경직 목사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한경직 목사는 청빈하고 겸손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서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을 수상했다. 한 목사는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서양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기독교 계열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 99년 삶 가운데 집 한채, 땅 한평 통장 하나 가진 적 없이 살았던 한경직 목사

그 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평양숭실대학 이과에 입학하고(1922)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캔자스주에 있는 장로교 계열 엠포리아주립대학교(Emporia State University)를 거쳐 1929년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신학원을 졸업했다. 한 목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은 한경직 목사의 청빈한 삶이다. 영락교회 같은 대형교회를 일궜으면서도 한 목사는 작은 방 한 칸에서 양복 한 벌로 지낸 가난한 목회자다. 얼마든지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지만 소매 끝이 닳은 옷을 입고 버스를 타고 다녔다. 산꼭대기 20평짜리 국민주택에 머무르기를 자처했던 그를 세간에서는 ‘바보 목사’라고까지 불렀다. 평생 자기 이름으로 땅 한 평, 집 한 채 사본 적이 없었지만 늘 어려운 이웃과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노력한 목회자가 바로 한경직이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를 은퇴하고 나왔을 때 거처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재산이 전무했다. 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가난해야 한다는, 그래야 사욕 없이 복음 전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다는 평소의 지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런 삶으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한 목사의 아내 김찬빈 사모였다. 평생 남편이 가져다주는 사례비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김 사모의 손에 쥐어진 것은 빈 봉투뿐이었다. 한 목사의 사례를 받은 사람들은 보린원, 경로원, 모자원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교인들이 새로 해준 양복을 자신을 찾아온 개척교회 목사들에게 서슴없이 벗어주고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은 길거리 거지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고 올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청빈한 삶을 살라고 설교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이 차디찬 감옥에서 복음의 아들 디모데를 그리워하며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딤후 4:13)는 구절을 본문으로 삼아 목회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청빈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였다.

청빈한 삶은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궁상맞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에게 청빈한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역설해주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도 청빈한 삶을 산 이들이 있다. 느헤미야가 대표적이다. 느헤미야는 12년 간 총독으로 있으면서 마땅히 누려야 할 녹을 먹지 않았다. 나아가 총독이라는 권리를 남용하여 백성들의 것을 토색한 일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가능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 5:14-15).

세례 요한은 그야말로 청빈하고 정결하며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사역자였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마 3:3)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이런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마 11:7-14)라는 칭찬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의 청빈은 백성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왜 청빈해야 할까? 돈을 다스릴 수 있기 위해서다. 나아가 남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다. 돈이 남아 돌아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써야 할 것이 있지만 남겨서 돕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돈을 다스린다는 것은 극한 전쟁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빈을 미화하면 자칫 논리의 비약에 빠질 수 있다. 가난은 무조건 깨끗하며 반대로 부한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다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면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깨끗한 삶은 깨끗함 자체에 있지 절대로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깨끗하게 살기 위해 가난해지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가난해야만 깨끗하다는 인식으로 무조건 가난을 강요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가난을 지나치게 미화한 나머지 가난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다툴 때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 십중팔구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익을 따라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이나 가난하다고 그들의 편을 드는 것 모두를 책망하신다. 옳은 사람의 편을 들어야 한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3).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레 19:15, 새번역).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욥 34:18-19).
 

가난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로운 것도 아니다. 가난은 문학에서 아름답게 표현되지만 현실의 가정에서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또 가난은 설교를 통해 들으면 한없이 맑고 깨끗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 삶에서는 비참할 뿐이다. 우리는 돈에 굴복하여 찬양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돈을 추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돈은 추하지도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돈을 소유한 사람의 지혜에 따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돈이 없는 가난을 청빈으로 찬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 주시는 분은 아니다. 청빈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적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잠 10:15)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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