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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르트, 일부다처? … 한 묘비 아래 셋 같이 묻혀
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2018년 02월 13일 (화) 10:30:00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노스캐럴라이나 샬럿에 있는 커버넌트장로교회에서 12년간 목회했던 좐 B. 라저스 2세 목사는 바르트 탄생 120주년을 맞던 2006년의 5월 14일에 한 기념 설교에서, 현대에 복음의 의미를 한껏 되살린 바르트를 '하나님의 은혜의 전령'으로 부르며 찬하했다.1)

라저스는 바르트를 현대 뿐 아니라 "개혁시대 이후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본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동하게, 자유롭게 한 사람"이라고까지 극찬하고, 바르트를 "이 선하시고 관대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길 선택하셨음"을 노래한 '음유시인'(troubadour)으로 비유한 뒤,2) 바르트의 생애를 집중 조명하면서 흥미로운 일화도 여럿 곁들였는데, 그 가운데는 바르트의 전쟁사 탐독 취미와 미국 방문 당시에 쓴 남북전쟁 유적지 기행도 일부 포함됐다.


집안 전쟁사?

바르트는 어릴 적부터 전쟁놀이에 관심이 많아, 주요 전쟁사에 관한 독서를 하던 취미가 평생 지속됐다. 물론 미국 남북전쟁사도 탐독했다. 그러니, 바르트의 삶에서 전쟁은 중요한 의미성을 갖는다고 할 만하다. 그의 독일 친구였던 본회퍼처럼, 나치에 대한 자신의 레지스탕스적 정신도 이를 반영한다.

   
▲ 미 남북전쟁 격전지를 방문, 당대 소총을 발사해 보는 노년의 바르트 / 출처: http://kbarth.org/gallery/nggallery/karl-barth/united-states/

바르트는 은퇴 후인 1962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자신의 76회 생일을 맞았다. 그 기념으로, 5월 제임스 강변에 있는 황폐한 옛 남북전쟁 요새에서 실제로 이 전쟁에서 남군이 사용했던 긴 소총(머스킷)을 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내가 그 싸움 최후의 총 발사를 했다"고 조크했다.3) 사진을 보면, 그가 쏜 이 총은 .577 구경인 1853년 패턴의 머스킷-라이플인 '엔필드(P53)'였을 가능성이 높다.4)

그는 이렇게 썼다:

"제임스 강변에 있는 폐허화된 남북전쟁 요새에서 100년 묵은 소총을 쐈는데, (자신이 한때 입대해 있던) 스위스 군대에 영예롭게도, 표적까지 맞추었다."5)

훗날 바르트는 노년의 그가 발사 표적까지 맞춘 이 '선의'(善意)를 "여타 능력과 성공의 상징으로 풀이"하며 좋아했다.

이에 대하여 타임 매거진은 "이상야릇하게도, 바르트는 전쟁터 구경을 자신의 동료 신학자들과의 토론만큼 재미있어 한다."며 "자신의 이 여행에서 게티스버그 전적지도 들러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썼다. 전적지 방문뿐 아니라 전쟁 자체에 대한 전문가적 면모를 보였고, 자신을 초청한 인사들에게 남북전쟁을 소상히 설명해 주면서, "신학자가 아니었더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 2차 대전 당시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에서였으니까) 실전 경험을 갖지는 못했으나, 바르트는 군복에 군모를 갖춰 입고 경비병의 임무를 다한 데 대해 퍽 만족했다. 그는 젊은 목회자 시절, 견진 교인들을 두 패로 나눠 눈싸움을 시키면서 "서로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 스위스 경비병이 된 한 때의 바르트. 

바르트는 평생 전쟁사를 즐기던 나머지 결국 자신의 가족전쟁사까지도 즐기게 된 것인지, 두 여인을 평생 끼고 살면서 서로 더불어 함께 이 전쟁의 고통을 감내(?)하다 끝내는 모두들 개선한 장엄한 전사들을 닮아 무덤까지 함께 갔고, 묘비까지도 나란히 나누게 된 것. 어느 날 셋이 나란히 걸어가면서, 그가 자신의 양손으로 각각 두 여인의 손을 쥐었던 것처럼. 바르트가 양손에 각각 다른 여인의 손을 쥔 순간은 키르쉬바움에겐 어떤 짜릿한 쾌감(?)을 주었는지는 모르나, 넬리에게는 엄청난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포고의 신호탄과 다름없었다.

전쟁사를 탐독하다 보니 바르트는 전쟁을 좋아한 것일까? 그래서 집안에 그런 '전쟁'을 끌어들이고도 한편으로는 평화를 원한 것일까? 바르트 집안의 '내전' 같은 정신적 갈등은 바르트와 아내 넬리, 비서이자 연인인 키르쉬바움 사이에도 치열했고, 각자의 내면에서는 더구나 그랬다. 더구나 법적인 아내인 넬리는 남편과 자신 및 가족의 '이스라엘' 사이에 끼어든 이방여인 같은 존재인 키르쉬바움 탓에 이루 표현할 길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감정 속에서 다년간 살아야 했다.

바르트가 사실상의 '두 아내'와 함께 한 여정은 어찌 보면 구약의 일부 가장들이 일부다처의 삶을 산 것과 비교된다. 그렇게 본다면, '은혜의 전령사'로 걸맞지 않다고 딱히 말하기도 어렵겠다. 대표적인 예로 한나와 브닌나-두 아내를 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들 수 있다.6)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경건한 한나를, 브닌나는 단지 자식을 먼저 낳았다는 이유로 정신적으로 날마다 지속적으로 학대했다. 오히려 그랬기에 한나가 아들 출산을 더욱 더 갈망하는 계기가 됐지만.

자식이 퍽 많았던 넬리가, 자녀가 전혀 없고 정상적으로라면 있을 수도 없었던 키르쉬바움을 학대한 '브닌나' 같은 면모를 발견하기 어려우나, 서로의 고통은 엘가나의 가정 이상으로 심했다. 앞의 딴 글에서도 비쳤듯, 이 같은 바르트 가내 '전쟁사'는 자녀들에게도 간접적으로나마 큰 고통을 나누게 만들었다.

넬리는 나중엔 체념한 듯 도리어 이 '운명'을 받아들여 바르트의 말에 순응했고, 마침내는 셋과 자녀들이 더불어 함께 갔고, 말년에 치매 걸린 키르쉬바움이 지내던 요양원을 찾아 그녀를 돌보기까지 했다. 바르트의 바람을 따라, 무덤과 묘비까지 함께 나누는 것을 최종적으로 허용한 쪽도 넬리였다. 심지어 자녀들의 일부조차도 이 상황을 모두 받아들여, 바르트와 넬리는 물론, 키르쉬바움의 합법적인 상속자까지 됐다.

결국 바르트는 이 오랜 가족 내전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인가? 아니면 그 전쟁을 승화시켜 자신의 조국 스위스처럼 자기 집안까지도 '영세중립'으로 이끈 것일까? 위대한 신학자이기에 사실상의 이런 '일부다처' 양상이 용납된 상황인가? 아니면 가족의 성경적 도덕성을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일까?

물론 이 모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린 것일 터이다. 세 사람이 한 묘비 아래 나란히 묻힌 무덤에서는 마지막 날 세 부활체가 일어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노출될 것이다. 우리 모두들처럼.


분명히 아는 것들

캐나다의 바르트 학자, 데이빗 거레츠키 교수(David Guretzki, 브라이어크레스트 대학교 신대원)는 지난 2006년 이래 매 학년도마다 칼 바르트 독서그룹(KBRG)을 이끌어왔다. IVP 발행 '탐사 가이드' 문고의 일환으로 그가 쓴 <칼 바르트 탐사 가이드>(AEGKtB) 앞부분에서 그는 바르트에 관한 흔한 질문(FAQ) 몇 가지를 다루었다.7) 일부를 간추려 소개해 본다.

   
▲ 거레츠키의 책 표지 / 출처: IVP

질문: ... 그녀(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와 칼 바르트가 가장 좋게는 부적절한 관계, 최악으로는 통간(adulterous) 관계를 지탱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그의 신학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답: 칼과 샬로테의 관계를 검증한 사람들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하여 서로 다른 해석들을 해 왔다. 내가 어느 한편을 거들 만큼 충분한 통찰을 했다고 할 수 없지만, 거의 확실한 것은 어느 수위의 내밀한 부적절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령 (우리는 확실히 모르지만) 서로 전혀 성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칼과 아내 넬리는 평생 함께 했다. (2) 샬로테가 집안에 머물면서 부부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었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3) 칼과 넬리 부부는 훗날 화해했다. (4) 부부가 함께 샬로테가 말년에 머물던 양로원을 방문하곤 했다. (5) 칼, 넬리, 샬로테 모두는, 넬리의 승인에 따라 한 가족 무덤에 묻혀있다. (6) 20세기 초와 중엽에 스위스-독일 가정의 생활양식은 현재의 우리와는 매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딱히 무엇이 부적절했고 무엇은 괜찮았나라는 답에 대한 기대감 속에 그들의 삶을 되읽어내려고 하는 데는 큰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이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갖는 의미성은 뭔가? 그 누구에게도 쉬운 답변을 줄 수 없지만, 바르트의 도덕적 실패를 갖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신학자로서 그를 '부적격'이라고 간주할지 어쩔지는 각자가 결정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한 가지 위안은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야곱 같은) 속임쟁이들, (모세 같은) 허겁쟁이들, (다윗 같은) 간음자들, (사도 베드로 같은) 배신자들, (사도 바울 같은) 살인자들도 쓰시되, 심지어 성경 기자로도 사용하셨음을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나도 바르트가 도덕적으로 의문나는 행동에 연루됐다는 사실에 난감해 하는 한 사람이지만, 나 자신의 부족한 도덕성에 더욱 난감함을 느끼곤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온정을 바란다. 내가 그저 기도하기는, 나의 도덕적 실패와 주님의 제자로서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르쳐온 수많은 학생들, 나의 글과 책의 독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배우고, 삶 속에서 그 분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를 이뤄가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바르트는 우리 모두처럼 예수님의 한 제자였고, 그의 제자됨에 있어 불완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변명이 아니라, 단순히 나의 생각이 실제적이라는 진술서이다.

거레츠키의 답변 대부분에 우리도 동의하지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지 의문은 과연 바르트를 성경 기자들과 비교할 수 있냐는 점이다. 성경 속 인물들은 모두 회개한 사람들이었지만 바르트에게서는 회개한 흔적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8) 그가 회개했다면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양해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라도 책임성 있게 샬로테와 헤어져야 했고, 마땅히 아내와 가족만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거레츠키 자신이 서슴치 않고 바르트와 동일시할 정도인, 자신의 도덕적 부적절성과 제자로서의 결점이 무엇인지 누구나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속사정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바르트의 중대한 과오를 일반화하는 듯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바르트와 다름없으니 바르트를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덮어 두자는 것에 진 배 없기 때문이다.


각주

1) Scribd doc.: Rogers, John B., Herald of God’s Grace
2) '음유시인'이라는 비유는 라저스가 Allen McSween 목사의 설교에서 빌린 표현. idem, Troubadour of God’s Grace.
3) 참고, Rogers, 같은 문서, 5.
4)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Pattern_1853_Enfield
5) 다음에서 재인용. http://danielsilliman.blogspot.kr/2013/08/karl-barth-civil-war-buff.html
표적물은 코카콜라병이었다. 당시 시카고 대학교 교수이면서 바르트의 여행을 주선한 장본인인 그의 아들 마르쿠스(마커스) 바르트는 "아버지는 남북전쟁터를 그저 여기저기 방문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시지 않았다. 전쟁 국면을 일일이 설명해 안내자들을 놀라게 했다. 또 남군의 소총을 두 발 쏘셨는데, 두 번째 발사는 표적을 빗겨가지 않았다." 참고: Rumscheidt, Martin, Footnotes to a Theology: The Karl Barth Colloquium of 1972 (Wilfrid Laurier Univ. Press, 1974), 77.
6) 사무엘상 1장 참조.
7) Idem, An Explorer's Guide to Karl Barth (IVP Academic), 29,30.
8) 시리즈 지난 회에서 가졌던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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