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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논문 ] 바울의 율법관
- 로마서를 중심으로
2018년 02월 05일 (월) 13:42:54 김경식 교수 webmaster@amennews.com

김경식 교수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신학

1. 서론

   
▲ 김경식 교수
ⓒ<교회와신앙>

율법은 신약신학에서 매우 난해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신학과 관련해 다양한 주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바울의 율법관은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바울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율법관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논의가 되어 왔다. 예수께서 당시에 공격하신 것은 율법인가 아니면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인가로 부터 시작해 예수께서 구약 율법을 아직도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윤리적 가르침으로 제시하고 계신가, 아니면 구약율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는가의 논쟁은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이다. 또한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 연속성과 통일성이 있는가도 중요한 연구주제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이 글에서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에 제시된 바울의 율법이해를 분석해 보고, 이를 개혁신학과 비교해 보고, 바울의 율법관이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2. 바울서신의 혼란한 주제, 율법

우리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것은 단지 신약성경을 대하는 해석자로서의 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약성경 특히나 바울서신이 보여주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율법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예들은 바울서신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진술이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잘 보여준다. 우선 로마서에 나타난 모순되어 보이는 율법에 대한 진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위에서 살핀 바울의 진술들만 보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율법은 의롭게 되는 수단도 아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통로이고, 따라서 성도들은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이런 진술들은 갈라디아서 본문을 보면 더욱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율법은 우리를 가두는 것이며(갈 3:23), 믿음이 올 때까지만 역할을 하는 초등교사이고(갈 3:25),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드는 초등학문(갈 4:3)이다.

하지만, 바울의 율법에 대한 진술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들이다. 다음과 같이 율법에 대한 대표적인 긍정적 진술들 또한 바울서신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 율법에 대한 긍정적 진술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바울은 로마서 3:31에서 믿음 때문에 율법을 폐기할 수 없다고 피력한다. 로마서 7장은 율법 자체가 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한다. 로마서 7장에는 ‘율법’과 ‘계명’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율법은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다고 주장하며 율법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결국, 바울서신에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과 긍정적 진술이 동시에 등장한다. 물론 로마서에 비해서 갈라디아서에는 더 강한 어조의 부정적 진술문이 등장한다.


(3)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견해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일면 모순되어 보이는 율법에 관한 진술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먼저, 바울이 유대교와 유대교의 율법을 오해했다고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H. J. Schoeps가 이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1) 그는 유대교에서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의 율법관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7:10에서 율법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Schoeps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인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견해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Heikki Räisänen이다. 그는 바울의 율법 관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긍정적 진술과 부정적 진술의 공존은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면 “모순과 긴장은 바울의 율법관에 있어서 지속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contradictions and tensions have to be accepted as constant features of Paul's theology of the law.)”고 주장한다.2) 하지만 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진술을 하기도 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진술을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 이유는 로마서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서신서에 모순되어 보이는 율법에 관한 진술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울의 율법관에 모순과 긴장이 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 모순되어 보이는 부정적 진술과 긍정적 진술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노력으로 보인다. 바울사도가 모순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바울사도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우리들의 무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세번째 견해는 바울의 신학에 발전이 있다고 보는 Hans Hübner의 견해이다. 그는 초기의 바울 신학과 이후의 바울 신학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바울의 신학이 발전하고 변하고 있다고 본다.3)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오는 율법관을 비교한다. 이 후 내린 결론은 갈라디아서의 율법관은 매우 부정적인 반면에 로마서의 율법관은 긍정적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 반영된 바울의 초기의 부정적 율법관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비난 때문에 이 부정적 율법관을 다시 고민하게 되어 균형을 잡게 되고 이렇게 균형 잡힌 율법관이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관이라고 본다.4) 그의 의견을 좀 더 살펴보면 그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은 천사가 준 것이라고 설명한다고 지적한다.(3:19). 하지만, 이때 천사는 악한 천사다(범죄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갈 3:19). 결국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기원은 악한 천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율법은 신령한 것이고, 죄를 깨닫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롬 3:20, 7;7).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으로 부터 자유롭다고 설명하지만,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떠날 수 없음을 가르친다(롬 3:31). 이러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비교를 통해 볼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바울의 율법관이 초기 서신인 갈라디아서에서의 부정적 율법관에서 출발해 이후 로마서에서 균형잡힌 율법관으로 발전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근거가 된다. Hans Hübner의 주장의 장점은 바울서신 사이에 율법에 관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비교를 통해 갈라다아서에 표현된 율법관이 매우 부정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준 것이며, 동시에 로마서에는 부정적 진술과 긍정적 진술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휘브너의 견해는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율법에 대한 긍정적 진술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바 되었다고 한다(갈 3:23). 여기서 ‘매였다’(ἐϕρουρούμεθα)의 헬라어 동사는 긍정적인 의미로 보호를 받다는 의미이다(참고, 빌 4:7, 벧전 1:5).

네번째 마지막으로 바울의 율법관을 설명하는 견해는 바울사도가 율법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사회적 기능을 비판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학자는 대표적으로 바울의 새관점 학파(the New Perspective on Paul)로 분류되는 James D. G. Dunn과 N. T. Wright가 있다. 이들에 의하면 바울이 비판한 것은 율법의 오용이지 율법자체는 아니다.5) 다시 말해 이 새 관점은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비교해서 유대인들 자신들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하나님 백성 됨에서 배제시키고 유대인들의 선민적 특권만을 보장하는 울타리(boundary marker)로서의 율법소유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바울이 이런 오용을 비판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새 관점(NPP)은 바울신학계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 새 관점에 의하면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개인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적 이슈이다. 또한 바울이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을 때 바울이 부정한 것은 "율법의 행위"이지 율법이 아니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해석되어 왔고, 이런 이해에 기초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수단은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여기는 믿음과 행함의 대립적 구도로 바울의 이신칭의를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새 관점(NPP)에 의하면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언약사상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도 행함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과 선택을 근거로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전통적 입장에서처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은 이미 바울 당시 유대인들도 동의하고 믿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본다.

바울의 새 관점이 생겨나게 만든 것은 유대교에 대한 새시각과 관련이 있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강조하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이런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준 사람은 E. P. Sanders이다. 그는 자신의 책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BC 200년에서 AD 200년 사이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헌을 분석했다.6) 그리고 그 결과로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을 강조하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 유형을 가진 종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바울해석에 체계적으로 받아들인 학자가 James Dunn이다. 그는 자신의 갈라디아 주석과 로마서 주석에서 언약적 율법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라는 표현을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이신칭의의 수단으로 부정하고 있는 행위인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동 다시 말해 인간의 업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시켜주는 행위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좁게는 안식일법, 음식법, 할례법이다.7) 따라서 이 해석에 의하면 전통적 관점이 가르친 행위를 통한 구원을 반박하는 이신칭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Dunn에 의하면 바울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 관점은 이신칭의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을 ‘탈역사적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새관점에 의하면 바울당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즉 유대교로 개종해 유대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 백성 된다는 주장이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또 다른 사람은 톰 라이트(N.T. Wright)이다. 그 또한 이신칭의 가르침을 이방인들의 구원문제와 연관지어 해석한다.8) 톰 라이트 또한 샌더스의 유대교에 관한 새로운 관점인 언약적 율법주의 관점을 수용하는 입장이므로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을 행함과 믿음의 대립구도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바울이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되는데 문제가 되었던 방해물로서의 율법의 오용을 비판하고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타당한지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지면의 한계상 어려움이 있다.9) 새관점의 입장은 바울이 율법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관점에 대해 다른 많은 비판점이 있겠지만, 우선,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하나의 틀로 다 설명할 수 없으며 다양성을 지닌 종교였다는 점이다. 새관점은 바울당시의 유대교를 획일화된 단일체로 보는데 그 한계가 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의 오용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율법자체를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갈 2:19; 롬 7:4,6). 이런 현상은 바울 사도가 단순히 율법의 오용만을 공격했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대로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공로주의적 성격의 종교가 되었다. 물론 새관점이 부각시킨 대로 언약적인 요소가 바울 당시 유대교 안에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에 못지 않게 공로주의적 요소가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 행함을 통해 구원얻을 수 있음을 부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3. 바울의 율법관: 로마서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진술 가운데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바울의 율법관은 무엇인가? 바울의 율법관을 균형 있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로마서이다. 로마서에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과 긍정적 진술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서 7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율법’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용어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노모스)이라는 단어를 74회 사용한다. 이 가운데 관사가 있는 것이 29회이다. 하지만, 로마서 5:13에서처럼 율법이 관사 없이 사용되어도 모세율법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관사의 유무로 ’노모스‘(율법)의 의미를 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율법(노모스)라는 명사와 같이 사용되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10)

믿음의 법(롬 3:27), 남편의 법(롬 7:2), 하나님의 법(롬 7:22,25; 8:7),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롬 7:23), 내 마음의 법(롬 7:23), 죄의 법(롬 7:23, 25), 성령의 법(롬 8:2), 죄와 사망의 법(롬 8:2), 의의 법(롬 9:31)
 

(2) 율법(νόμοϛ)의 의미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노모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1) 모세오경 (롬 3:21), (2) 구약성경 전체 (롬 3:19), 그리고 (3) 모세 율법(3:21, 5:13-14)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11) 율법이라는 단어가 문맥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바울이 로마서에 율법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모세율법을 가리킨다.12)

다음의 용법들은 바울이 율법(‘노모스’)이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우선, 로마서 2장에 의하면 바울은 율법을 우리가 행할 수 있거나 어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내용은 율법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동사이다.13) 로마서 2장에 의하면 율법은 행하는 것(13절)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범하거나 어길 수도 있는 것이다(23,25,27).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3절)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25절)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7절)

또한 로마서 7장 9-12절에 의하면 율법(노모스)라는 단어는 계명(7:12 엔똘레 ἐντολἡ)와 같이 동의어적 관계에서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계명’은 준수해야 할 규범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율법이라는 명칭도 결국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용하는 율법의 의미(definition)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 율법(노모스)라는 단어는 모세율법을 의미한다(시내산 언약). 그리고 이 모세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준수해야 할 요구조항들(legislation)이다.14) 이 법조항들은 어길 경우 처벌이 주어진다.15)
 

(3) 로마서에서의 율법의 기능

바울은 율법이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 율법을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롬 3:20; 7:7). 둘째로 이 율법은 칭의와 관련해서 볼 때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롬 3:20, 28). 셋째,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이신칭의를 증거하는 기능을 하든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적과 지향점이라고 증거하는 역할(롬 10:4)을 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0:4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뗄로스, τέλοϛ)”이라고 선언했을 때 율법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기능이다.

더 나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율법이 성도들에게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구원이후에도 율법을 지켜야할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같은 사실은 로마서 8장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바울은 8장에서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한다(1-2).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자유롭게 했다고 선언하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다고 가르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죄와 사망의 법”과 대조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인가? 로마서 7-8장은 율법에 관한 바울의 긴 논의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장의 주제는 율법이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법”이라고 번역된 ‘노모스’(νόμοϛ)는 정확히 번역하면 율법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같은 논리로 노모스가 사용된 어구인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은 단순히 양심의 법, 혹은 자연의 법 또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고, 따라서 생명의 성령의 율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이 로마서 7-8장에서 율법('노모스')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 의해 이 같은 결론이 뒷받침된다. 또한 바울은 이미 로마서 7:12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설명했다는 사실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름 아닌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율법을 한편으로는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 보고, 같은 율법을 생명의 성령의 율법으로 보는가?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다루어지는 죄와 율법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자체는 거룩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율법이 죄를 섬기는 도구, 혹은 죄를 도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7:8-10). 율법이 죄의 도구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문제가 있다. 인간은 육신에 속한 존재라는 점이다(7:5, 14; 8:9). 따라서 인간은 육신에 속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문제이다(롬 8:3).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켰다고 선언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반영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율법”(8:2)이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해 죄의 도구인 율법이 생명의 성령의 율법으로 변모했고, 육신 안에 있던 우리는 믿음을 통해 성령이 내주하시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능력을 부여하신다(롬 8:4).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8:4).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은 로마서 8:1-4가 에스겔 36-37장 본문을 암시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다. 로마서 8:2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τοῦ πνεύματοϛ τῆϛ ζωῆϛ)은 에스겔 37장에서 나오는 마른뼈 골짜기 환상에서 하나님이 뼈들에게 들어가게 하시는 ‘생기’(겔 37:5 πνεῦμα ζωῆϛ)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로마서 8장 4절의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는 대목은 에스겔 36:27의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는 예언을 생각나게 한다.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종말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어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 예언이 지금 성도들에게 성취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직도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고, 또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고 보았음을 뒷받침 해 준다.

바울이 성도들의 윤리적 규범으로서 율법의 유효성을 다루는 본문은 단지 로마서뿐만이 아니다. 이미 브라이언 로즈너가 그의 책 Paul, Scripture and Ethics에서 밝힌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의 윤리적 권면의 배경에도 구약의 윤리적 계명들이 사용되고 있다.16) 필자는 다른 곳에서 브라이언 로즈너가 다루지 않은 고린도전서 8:1-11:1의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와 관련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 권면을 주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등의 구약 율법을 윤리적 권면의 기초로 삼고 있음을 증명한 바 있다.17) 결국 바울은 윤리적 규범으로서 율법이 아직도 성도들이 지켜야 할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바울에게 율법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순종해야 계명들이며, 이 계명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때 죄의 도구가 되어 사람들에게 사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다가 구속사의 전환점을 맞아 율법은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은 이제 이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지키고 살아갈 능력을 성령을 통해 공급받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4. 개혁신학에서의 율법관

필자는 신약학자로 조직신학자들에 비해 개혁신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에서 차지하는 율법의 위치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개혁주의 율법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개혁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뿌리는 두고 있고,18) 언약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중요시하는 신학체계이다. 종교개혁에 뿌리는 두고 있는 개혁주의의 율법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간단히 살펴야 할 사람이 루터와 칼빈이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날카로운 대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율법이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를 통해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다고 본다. 루터는 율법을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망치로 보고,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하는 향유로 본다.19) 반면에 칼빈은 율법관이 루터에 비해 긍정적이다. 칼빈은 복음과 율법의 강한 대립이 아니라, 복음과 율법이 함께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20) 그는 율법의 세 가지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의 첫번째 기능을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다.21) 두번째 기능은 “올바르고 공정한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율법에 있는 무서운 위협을 들음으로써 형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억제시키는 것”이다.22) 마지막으로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이 있다. 칼빈은 이 세 번째 용법이 율법의 주된 기능이라고 보는데, 성도들을 권면하고 선행을 촉구하는 윤리적 기능이다.23) 칼빈은 성도들의 윤리적 규범으로의 율법의 기능이 있음을 지적하고, 성도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칼빈이 가진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율법 ⇒ 복음 ⇒ 율법의 구도이다.24) 다시 말해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복음은 다시 사람에게 율법을 지킬 능력을 부여하여 율법에게로 보낸다는 것이 칼빈이 견지했고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율법관이다.25)


5. 결론

바울의 율법관은 모순처럼 보인다. 율법을 부정하는 듯 하면서 긍정하고, 폐기된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지만, 이 복음은 우리를 다시 율법에게로 인도한다. 물론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빛 아래서 약속과 성취의 렌즈로 새롭게 본 구약의 율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윤리 실종의 문제로 복음의 능력도 잃고 좌초해 가는 느낌이다. “다른 복음”(갈 1:6)이 가르쳐지고 삶의 열매를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성화 없이는 칭의도 없다’는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다시 들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마태복음과 같은 한국교회의 상황 즉 율법 폐기론적인 분위기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반영하고 있는 윤리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진정한 믿음은 열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주제어: 바울의 율법관, 로마서의 율법, 개혁신학의 율법관 (Paul's view of the Law, the Mosaic Law in Romans, the Law in Reformed Theology)

※ 이 논문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의 학술지 <개혁신학> 28권 (2017)에 실린 것임.
 

각주)-------------------

1) H. J. Schoeps, Paul: The Theology of the Apostle in the Light of Jewish Religious Histor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2) Heikki Räisänen, Paul and the Law (Philadelphia: Fortress,1986), 11

3) Hans Hübner, Law in Paul's Thought: A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Pauline Theology (Edinburgh: T&T Clark, 1984).

4) Stephen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Grand Rapids: Eerdmans, 1988), 90.

5) James D. 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5).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T&T Clark, 1991).

6)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Minneapolis: Fortress, 1977).

7)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London: T&T Clark, 1998), 365-66. cf. James Dunn, Romans 1-8, WBC 38a (Dallas: Word, 1988), 186.

8) Tom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Oxford: A Lion Book, 1997), 132.

9) 필자의 다음 논문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김경식, “최후행위심판 사상으로 본 바울신학의 새관점”, <신약연구> 2010년 9월호.

10) 참고,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의 법” (갈 6:2)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11) 바울서신에서 모세 율법이라는 단어는 시내산 언약 혹은 옛 언약과 같은 의미이다.

12) 롬 5:13~14에서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과 아담과 모세의 때까지라는 표현은 율법이라는 단어가 모세율법을 가리킴을 분명히 보여준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13) Stephen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Grand Rapids: Eerdmans, 1988), 107-108.

14) Westerholm은 바울이 사용하는 ‘율법’이라는 단어는 구약율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바울의 잘못이라는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첫째, 토라(Torah)를 nomos로 번역한 것은 오류라는 주장이 있다. 즉 토라의 개념은 단순히 법조항(legal code)만 가리키지 않고 narrative로 가르친다(Solomon Schrechter)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 주장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지만, 구약에서 출애굽(exodus)은 구약정경 문서인 출애굽기를 가리키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사건인 출애굽사건을 가리킬 수 있듯이, 바울이 사용하는 ‘노모스’도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코라는 법조항을 가리킬 수 있다고 반박한다. 두 번째로, LXX에서 토라(Torah)를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전부 다 nomos로 번역해서 인간이 행해야 할 계명들로 오역해 놓았다고 반박하는 주장에 대해 Westerholm은 구약에서 토라는 ‘행하다. 지키다. 준수하다. 어기다’는 동사와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히 있다고 분석하고, 이럴 경우 토라는 계명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Stephen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136-140.

15) 구약의 다양한 언약들은 무조건적인 언약이지만, 시내산 언약은 조건적 언약이며, 이 시내산 언약을 대표하는 것이 모세율법이다.

16) Brian Rosner, Paul, Scripture and Ethics: A Study of 1 Corinthians 5-7 (Grand Rapids: Baker, 1994).

17) 김경식, “바울 윤리의 기원과 배경”, <신약연구> 2008년 9월호: 483-515.

18) Donald G. Bloesch, "Law and Gospel in Reformed Perspective", Grace Theological Journal 12.1(1991) 179.

19) Ibid., 180.

20) Ibid., 180.

21) 존 칼빈, <기독교 강요 2> (라틴어 원본 번역판), 고영민 번역 (서울: 기독교문사, 2006), 218.

22) Ibid., 222.

23) Ibid., 225.

24) Donald G. Bloesch, "Law and Gospel in Reformed Perspective", Grace Theological Journal 12.1(1991) 180.

25) Ibid.,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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