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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수 바른말 ] 삼수갑산 三水甲山
삼수갑산 三水甲山 : O / 산수갑산 山水甲山 : ×
2018년 01월 25일 (목) 14:09:28 김준수 목사 webmaster@amennews.com

김준수 목사 / 밝은세상교회 담임, 카리스바이블아카데미 대표

   
▲ 김준수 목사

‘삼수갑산’(三水甲山) 은 산세가 험악해 사람이 접근하기도 어렵고 살기도 불편한 오지(奧地)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고사성어가 아니라 평범한 사자성어다.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산수갑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강과 산은 야유회나 여행을 갈 때 주로 찾는 곳이므로 수려한 자연의 풍광과 휴식을 연상할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에서 ‘산수갑산’(山水甲山)이라고 나오는 모양이다.

‘삼수갑산’을 ‘산수갑산’으로 확신하는 벽창호들은 글깨나 읽었다고 자부하는 ‘독서가’들을 포함해 엄청나게 많다. 그분들에게 “‘산수갑산’ 아니라 삼수갑산’이예요”라고 일러주면 ‘산수갑산’이라고 박박 우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어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 확인하고서도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썽 많은 삼수갑산!(三水甲山)이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은 북한 땅에 있는 함경도 북단의 두 개의 지명이 결합해 생긴 사자성어다. ‘삼수’(三水)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한 지역으로 육지에 깊이 들어가 있는 곳이다. ‘삼수’(三水) 압록강, 삼수동수, 어면강 세 개의 강줄기가 모아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철 온도가 영하 18도까지 뚝 내려가고, 눈이 왔다 하면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폭설이 내리는 매우 추운 곳이다.

‘갑산’(甲山)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으로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험지이다. 갑옷처럼 총총하게 여기저기 큰 산들이 솟아 첩첩산중(疊疊山中)인 갑산은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고, 오줌을 누면 그 즉시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곳이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이처럼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워낙 산세가 험하고 농작물을 심기가 어려우며 추운 곳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두 곳은 중죄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되곤 하였다. 삼수갑산이 깊은 산중에 있어 일단 한번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비감한 어조는 김소월(金素月, 1902-34)이 죽기 한 달 전에 발표한 오연 시(五連 詩)에서도잘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오도 가도 못하는 실향민 신세가 된 것과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는 고통과 좌절의 마음을 이 시를 통해 잘도 나타내었다.

삼수갑산 내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이렇듯 ‘삼수갑산’(三水甲山)은 험하며 나라에 큰 죄를 짓는 중죄인이나 사는 곳이지 일반인은 도저히 살기 어려운 곳인데, 이 말이 둔갑해 많은 사람들에게 산과 강으로 놀러 갈 때 오락과 휴식을 연상하게 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니 딱하다.

삼수갑산의 본래의 의미는 ‘매우 힘들고 험난한 곳으로 가거나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자적인 뜻이 민간에 유통되면서 어떤 일을 아귀차게 감행하고자 할 때 쓰이는 말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위험을 무릅쓰거나 몹시 어려운 상황이 오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어떤 일을 결심할 때 사람들은 이 말을 곧잘 쓴다. 예컨대 “부모님이 극구 만류하시는데,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저는 그 사업을 해볼 작정입니다”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경우다.

   
▲ ⓒpixabay.com / jplenio /snow-3097418_640

‘삼수갑산’과 같이 최악의 상황에서의 있을지도 모를 어려움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로 결사적인 의지를 불태우는 단어로는 ‘배수진’(背水陣)이 있다. 이 말은 도망갈 퇴로가 없도록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겠다는 뜻이다. 주로 전쟁이나 전투에서 사용되는 이 말은 몰릴 데까지 몰려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는 막다른 처지에서 목숨을 내놓고 결사항전(決死抗戰)하겠다는 비장한 뜻이 담겨 있다. ‘결사항전’. 혹은 ‘결사항쟁’이란 말은 요즘엔 헤프게 쓰이는 경향이 있다. 강성 노조가 뜻을 관철(觀徹)시키기 위해 머리띠에 ‘결사항쟁’(決死抗爭)이라고 쓰기도 한다.

어쨌든 필자가 보기에는 삼수갑산이나 배수진이나 어감은 둘 다 모질고 결연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삼수갑산보다는 배수진의 어감이 훨씬 강렬하다. 삼수갑산은 육신을 다소 버려 얼마간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지만, 배수진은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의 순간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삼수갑산이란 말에 여유와 ‘낭만끼’가 서려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나 보세’라는 우리 속담에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발견하려는 한국인 특유의 여유와 한가로움,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묻어 있다.


성경에는 막다른 위기에 처한 상황을 제세(地勢)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표현은 없지만,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적인 언급은 꽤 많다. 예를 들어 다윗은 인간의 상황을 “넘치는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킨다”고 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갇힌 새와 같다(시편 124:4-7)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한계 상황이 아니어도 늘 그의 앞길에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그를 쓰러뜨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어 피치 못하게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다윗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인생의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전과 보호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시편뿐 아니라 욥기에서도 고난과 환난에 처해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바라는 인간의 모습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기 5:7) 라고 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나약함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환난과 역경은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욥기 15:24)고 하면서 인생들이 견딜 수 없는 고난에 처했을 때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며 처연해 한다. 욥은 그것을 구태여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나의 희망은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욥기 17:15-16).

신약성경에는 막다른 영적 위기상황을 소개하는 장면들이 많다. 막다른 영적 위기상황이란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에 대한 모든 태도와 방향이 급박하게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을 때의 심경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기세등등하게 다메섹으로 가던 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 광경에 압도된 바울은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 때 그의 귀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뚜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놀라 “주여 누구시니이까?”라 물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음성이 그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 순간 그는 살아온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한 영적 긴박감에 온 몸과 영혼이 떨리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던 것이다.

베드로나 바울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신약성경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악한 귀신이 들렸거나,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거나, 간음을 하다가 붙잡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했거나,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직전에 있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막다른 영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된다.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 신앙이 정금같이 단련된 다윗은 인생의 진정한 소망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가파른 인생경험을 통해 절절이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믿는 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러한 시를 썼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편 62:1-2).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극적인 영적 위기에 처하신 적이 있었던가?

물론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기에 그러한 경험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적 위기는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영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바라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위기를 통해 자신이 세상의 구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아울러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써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진정한 인간이요 참 이스라엘이며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놓고는 굉장히 번민하고 괴로워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 형벌 그 자체도 두렵거니와, 그보다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은 채 죽임을 당해 아버지와 단절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더 두려워하신 게 틀림없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웬만하면 그러한 방식을 선택해 사용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예수님은 희망하셨지만, 그것은 단지 희망일 뿐 하나님의 뜻에 맡기기로 결심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의 그런 심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

그런 예수님이셨지만 막상 십자가에 매달려 갖은 고초를 당하신 후 운명하시기 전에는 다음과 같이 처절히 절규하셨던 것이다. 그 시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 여섯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

우리는 비명 소리와도 같은 예수님의 이 처절한 절규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을 새삼 발견하며 눈물이 왈각 쏟아짐을 어찌할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예수님을 잘 묘사해 우리에게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준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경험하신 십자가의 끔찍한 형벌과 고통, 순종과 그로 인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 5:7-19).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은 그 역시 세상에서 고초를 겪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모범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앞에 가신 예수님을 날마다 깊이 생각해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히브리서 2:1-5:10).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생각하며 글을 쓰다가 단상(斷想)이 삼천포(三千浦)로 빠져 여기까지 왔다.

목사이니 어쩌랴?

아니, 모든 사물들과 개념들을 성경적 ·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으로 보려고 하는 습성이 전신(全身) 배였으니 어쩌란 말인가?

독자들은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 필자는 우리네 삶이 삼수갑산(三水甲山) 갇혀 있는 것처럼 비록 답답하고 곤비(困憊)하지만,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난을 받으셨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자고 지금 호소하고 있다.

이 세상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올라가고, 명예를 얻고, 건강해도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소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생명이 되는 주시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겨자씨만한 믿음도 지극히 소중하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이므로 잃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 <바른말의 품격-한자편>(도서출판 밀알서원), pp.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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