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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종말론적 신앙의 특징
2017년 12월 06일 (수) 10:17:28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로마서 13장 11-14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미래학(Futurology)과 종말론(Eschatology)은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학과 종말론은 다음 몇 가지 점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로 미래를 말하는 근거가 다릅니다. 미래학은 과거와 현재를 기초로 미래를 예측하여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변화의 흐름을 분석하고 이것을 기초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여 미래에 대해 말합니다. 이에 비해 종말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미래를 믿음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확신하며 미래에 대해 말합니다.

둘째로 때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미래학은 오늘로부터 미래를 바라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다봅니다. 이에 비해서 종말론은 미래로부터 오늘을 바라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미래를 믿고 그 자리에 서서 오늘을 거꾸로 돌이켜봅니다.

셋째로 오늘에 주는 메시지 자체가 다릅니다. 미래학은 다가 올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이에 비해 종말론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은 미래학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자리에 서서 오늘에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래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이런 종말론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으로 미래를 말하고 오늘에 메시지를 전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당시 로마 교회에 선포한 이런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 안에 종말론적 신앙의 특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소중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1. 시기를 아는 신앙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말씀은 원문을 문법적으로 번역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하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번역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성경 NIV를 보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do this, Understanding the present time.” 그러니까 “그 시기를 알고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번역을 지지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시기를 알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시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재림의 시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임하게 될 종말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종말을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종말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종말의 자리에 서서 오늘을 돌아보는 관점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목사로 사는 것이 한 편으로는 힘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로서 사역의 일상이 된 장례 때문입니다.

근자에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던 여러분들을 하나님 나라로 보냈습니다. 제가 위임목사로 부임해서 시행착오를 겪을 때 큰 힘이 되어주셨던 분들, 때로는 부모님과 같고 때로는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신앙의 가족이셨던 분들을 떠나보낼 때 무척이나 마음이 아픕니다. 한 분 보내드리고 겨우 마음을 추스를 때면 또 다른 분을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위임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주 겪게 되는 장례 절차 속에서 제 인생관이 철저하게 바뀌어버렸습니다. 머지않아 저도 이 분들 뒤를 따를 것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제 개인적 종말의 순간에서 오늘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시급한 일인지 새롭게 깨닫게 됐습니다. 바로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로 살면서 제가 얻은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학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의 자리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일도 오늘 누리고 있는 이 자리를 지켜내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한 일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라는 책에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분이 아직 활발하게 활동할 때 미리 유서를 써 본 것을 이 책에 실었습니다. 특히 유서의 서언 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분은 평소에 미리 유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유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쓴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시점에서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유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종말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이렇게 미리 유서를 써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죽음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는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생의 백서를 써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기를 아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종말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순간이든지 주님의 재림의 순간이든 그 순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것도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2. 깨어있는 신앙

본문 11절을 보면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육신의 잠을 깨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영적으로 깰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잠에서 깬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마 25장에서 친히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25장은 소위 ‘열 처녀의 비유’라고 알려진 말씀입니다.

비유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 명의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 가운데 다섯 명은 슬기롭게 등과 함께 따로 기름을 준비했지만 다른 다섯 명은 어리석게 등만 들고 나갔습니다. 이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는데 오래 기다려도 신랑이 오질 않았고 처녀들은 기다리다 잠이 들었습니다.

한 참을 지나서 신랑이 왔습니다. 처녀들이 일어나 등을 준비하려는데 등불이 꺼져갑니다. 기름을 따로 준비한 처녀들은 얼른 기름을 채워 등을 밝히고 신랑을 맞으러 갑니다. 그러나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러 가야 했기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 25:13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pixabay.com / monicore / background-2909020_640

우선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비유해 보면 우리 심령 저 깊은 곳에 등이 있습니다. 그 등을 늘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등을 꺼뜨리지 않고 늘 밝히려면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은 바로 성령입니다. 엡 5:18을 보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원문 헬라어 문법상 지속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의 등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여 심령의 등불을 밝히 켜 놓아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다음으로 신랑이 올 때를 늘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 종말이 찾아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죽음이 찾아오거나 오늘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해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이융 원로장로님 이명분 권사님 댁을 심방했습니다. 이 댁에 길윤학 명예권사님께서 함께 살고 계셨습니다. 길 권사님은 금년이 104세십니다. 안타깝게도 보지도 못하시고 듣지도 못하신 상태셨습니다. 제가 기도해 드리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머니를 두 분이 정성을 다해서 모시고 계셨습니다. 믿음으로 효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명분 권사님으로부터 길윤학 권사님 이야기를 듣고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길윤학 권사님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해를 마감하시면서 똑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신 돈이 있으면 연말에 한 푼도 남기지 않으시고 교회의 가난한 교우들에게 다 나누셨답니다. 그리고 좋은 옷들 가진 것 중에 값진 것들 다 나누셨습니다. 마치 그 해가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다 정리하셨답니다. 이 권사님께서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참 놀랐습니다. 길 권사님께서는 매년 세모에 종말을 맞을 준비를 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게 늘 종말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있는 신앙인이어야 하겠습니다. 늘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고, 또 늘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신앙

본문 12절을 보면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그러니까 어둠의 일을 벗는다는 것은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않는 것이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잠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이렇게 옷을 잘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잠옷 바람으로 집 밖에 나온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잠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입고 그대로 출근하거나 학교에 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래서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들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방탕하거나 술 취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방탕이란 말은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말하고, 술 취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술에 취해 자신의 본연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음란과 호색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음란과 호색은 비슷한 뜻으로 성적으로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문란하고 타락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다투거나 시기하는 것 역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투거나 시기한다는 것 역시 비슷한 뜻으로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런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행하는 것을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의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육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 일을 즐기고 그 일에 골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탕하고 술 취하는 일을 즐기고, 음란과 호색에 마음을 빼앗기고, 다툼과 시기에 골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함을 끊어내고, 음란과 호색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다툼과 시기를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은 로마 시대의 대장군이 입는 빛나는 갑옷을 말합니다. 우선 갑옷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빛나는 갑옷은 대장군의 영예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어 어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예와 권위를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이렇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으로 영예를 지켜내며 살아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오래 전 군 생활할 때 전방에서 1년 반 동안 군종사병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군종사병은 십자가 마크를 단 군복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한 눈에 군종사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군복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술 마시는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음란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고, 호색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소리 높여 누구와 싸울 수도 없습니다. 이 옷에 새겨진 십자가를 욕되게 할 수 없어 늘 행동거지를 조심했습니다.

나중에는 이 군복이 나를 지켜주고 있음을 깨닫고서 감사했습니다. 내 스스로 이런 삶을 살아야 할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옷을 입히셔서 그런 삶의 훈련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늘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 번째 주입니다. 앞으로 성탄절까지 네 주를 대림절로 지킵니다. 이 기간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훈련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선 시기를 아는 신앙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앙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충만 하고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신앙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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