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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건 빛 칼럼 ] 성육신의 계절에
2017년 12월 04일 (월) 11:49:23 김희건 목사 dockimus@naver.com

김희건 목사 / 빛 교회 담임, Ph. D.

   
▲ 김희건 목사

우리는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를 고백한다. 수 십 년, 그 내용을 우리 입술로 고백하고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와 내용들이 그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신앙 생활의 내용을 우리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자 함도 억지요, 그렇다고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또 다른 억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해 배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항상 우리 이해를 초월해서 계심도 진실이고, 그렇다고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도 온당한 태도는 아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전해야 할 임무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우리 지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함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모시기 위함이다.

성육신 사건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 조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그 피조물의 한계 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타락했다. 그 타락 이후, 우리 모든 사람들 속에는 피조물 됨을 믿지 않고,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존 되어 살고 있음에도) 창조주 하나님이 되려는 잘못된 욕망, 스스로 주인처럼 살려는 충동을 안고 살아간다. 그 잘못된 충동 한 가운데 ‘자기 중심성’이 들어 있다. 사실, 사람을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그 ‘자기 중심성’에 있음을 아는 자가 많지 않다.

이런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창세 이전에 이미 준비되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시다(벧전 1: 20).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희생의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모든 사람은 삶에의 소망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오셨다. 그 탄생의 동기와 목적이 숭고하고 엄숙하다. 그렇게 오신 배경에 그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임을 증거한다(히 10: 9).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 ⓒpixabay.com / christmas-1100772_640

이 탄생의 기록 속에는 성자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과 헌신이 들어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에 성부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비우신 성자 예수의 비움이 들어 있다. 성육신 사건은 그렇게 비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 조상은 하나님 아닌, 자기 자신으로 스스로 채우려 했지만,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비우셨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과 사역도 성부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비움과 실천의 삶이었고, 그 절정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성육신이든, 십자가 사건이든, 이 모든 것 뒤에는 성자 예수님의 비움이 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신 성자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은 온 우주 속에 가장 존귀한 분으로 높이 세우셨고, 모든 사람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빌2: 6-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은 곧 우리들에게 길로 제시된다(요14: 6). 그 길 안에서 우리는 진리를 알고, 생명을 얻게 된다. 오늘날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 조차, 이런 성육신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 자신을 채우려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물질이요, 권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그런 삶이 진정 사람을 채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만족과 채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비움을 통한 채움이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사람만이 참 생명에 이를 수 있다. 그 뜻을 저버리고, 자기 소욕을 좇는 사람은 가난과 텅 빈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눅 12: 15). 그렇기 때문에 물질의 소유를 통해 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물질과 권력을 대물림하면서 자기 소욕을 이루려 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과 그 뜻을 모르니까 그렇게 산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물질과 권력에 집착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수 있을까? 오래 전 읽었던 글 속에 ‘모든 이단 종교의 목적에는 물질과 사람을 소유하려는 집착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물질과 사람을 향한 집착은 이단의 길로 가고 있다는 표가 아닐까? 반문하게 된다.

성육신 사건은 우리에게 비움을 가르치고 그 실천을 요구한다. 성경 속에는 그 비움을 저버림으로 구원을 잃어버린 어떤 부자 이야기를 들려준다(마 10: 17-22). 오늘날 겉으로 영생을 구하면서, 속으로는 물질에 집착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는 데(마 6: 24),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 두 가지를 거뜬히 소유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앞장서서, 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 속에? 야곱의 변화는 그 가진 바 소유를 비움으로 시작되었다. 아내와 자식, 물질을 강 건너 보내고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그를 변화시켰다(창 32장). 비움은 변화의 첫 시작이요, 준비라 할 수 있다. 이런 말씀으로 잘 아는 분들이, 자녀를 붙들고 물질에 집착하면, 무슨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비움의 삶은 누군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셨기에 성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는 곳에 비움이 있고, 그 실천이 따를 수 있다. 그런 비움과 실천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따르지 않는 표가 아닐까? 성경 속의 부자 청년처럼? 성육신의 계절에 한 없이 낮아지고 작은 자로 오신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손에 가득한 것을 비우고, 빈 손, 빈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림이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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