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목회·신학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⑤
2017년 11월 23일 (목) 11:12:07 양용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⑤

- 마태복음 13:24-30, 36-43 의 의미와 적용

양용의 교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3. 석의적 고찰

3.2. 비유 해설(13:36-43)

   
▲ 양용의 교수
ⓒ<교회와신앙>

비유 해설에 대한 해석은 앞(1.2)에서 언급했듯이, 비유 해석(3.1)에서 함께 다루지 못한 부분들, 곧 36절과 41-43절에 집중된다.

3.2.1. 사적 상황과 제자들의 해설 요청(36절)

가라지 비유는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주어진 데 반해(참조 24, 34절),69) 비유 해설은 제자들에게만 사적인 상황, 곧 ‘집’에서 주어진다.70) 마태는 ‘그분께 서 무리를 떠나셨다’라고 언급함으로써 비유 해설이 무리들과 단절된 상태에서 주어졌음을 부각한다. 이는 11절의 ‘너희’(곧 제자)와 ‘저들’(곧 무리) 사이의 구분을 확고하게 해 준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들을 아는 것이 주어졌지만, 저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밭의 가라지들 비유를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제자들은 이 비유를 ‘밭의 가라지들 비유’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비유 전체 주제를 균형 있게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제자들의 관심이 의인들의 구원보다는 악인들의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다.71) 마태는 제자들이 붙인 이 제목을 통해 독자들이 비유 해설의 내용을 내다보도록 해준다.72) 실제로 비유 해설 대부분은 악인들의 심판에 초점을 맞춘다.

가라지 비유 해설은 이처럼 비유를 설명해 달라는 제자들의 직접적인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주어진다. 이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묻는 질문(10절)에 대한 답변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진 씨 뿌리는 자 비유 해설(18-23절)의 경우와 구분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 두 해설은 공히 하늘 니라의 비밀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한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73)

3.2.2. 예수님의 비유 해설(37-43상절)

1) 이휘 해설 목록(37-39절)

비유 해설은 비유에서 언급된 요소들 중 일곱 개에 대한 풍유적 해설 목록을 사전(事典) 형식으로 제시한다.74) 나열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 목록은 비유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목록은 아니다.75) 하지만 비유의 핵심 요소들은 그 의미가 밝혀져 있다. 이 목록은 뒤이은 해설(40-43절)에 기반을 제공해 준다.76) 한편 목록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요소들의 경우에도 위의 목록을 참조하여 그리고 비유 해설 내용을 통해 그 의미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종들’은 ‘그 나라의 아들들’로, ‘집주인’은 ‘인자’로, ‘내 곳간’은 ‘아버지의 나라’로 추론할 수 있다.

2) 세상 끝 관련 전환적 언급(40절)

본 절은 사전 형식 해설 목록에 이어 세상 끝 심판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도입하는 전환적 언급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가라지가 불태워지는 비유의 묘사(30절)가 ‘시대의 끝’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을 상정하는 것임을 명시적으로 밝히신다. ‘시대의 끝’(τῇ συντελείᾳ τοῦ αἰῶνος, ‘테 쉰텔레이아 투 아이온노스’)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으로서(39, 49; 24:3; 28:20),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을 제외하고 히브리서 9:26에서 유일하게 한 번 더 사용된다.77)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지칭하며,78) 이 때는 최종적 심판으로 특정지어진다(참조 39, 40, 45절, 24:3). 이제 41-43절은 이 최종적 심판 상황을 상세히 기술한다.

3) 세상 끝 심판 묘사(41 43상절)

①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 ‘불법을 행하는 자들’, ‘그의 나라’(41절)

앞서 추수는 다름 아닌 인자께서 천사들을 통해 시행하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39-40절). 이제 41절은 이 심판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인자가 자신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며, 그들이 그의 나라로부터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을 것이다.’ 여기서 가라지, 곧 ‘악한 자의 아들들’(38절)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규정된다. 그런데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구체적인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밭, 곧 ‘세상’(38절)의 영역을 확인하는 데 지침을 제공한다.

첫째,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πάντα τὰ σκάνδαλα, 판타 타 스칸달라’)은 세상에서 그 나라의 아들들을 넘어지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8:6-7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신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될 수 있음도 시사하신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베드로가 자신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책망하신다(16:23). 그런데 그곳에서 베드로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은 그 나라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리도록 하는(참조. 13:21, 22), 또는 지금 교회 밖에 있는 자들 중에서 믿음으로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참조 17:27; 23:13) 사람들 또는 사물들과 환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고(7:15; 16:23; 18:7) 교회 밖에 있을 수도 있다(13:21; 23:13).79) 이처럼 밭에 자라는 가라지는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고 교회 밖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38절의 ‘세상’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밖까지 포괄하는 모든 세상인 것이 분명하다.

둘째,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먼저 마태복음에서 ‘불법’(ἀνομίαν, ‘아노미안’)은 네 번 나타난다(7:23; 13:41; 23:28; 24:12). 그중 7:23은 불법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24:12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과 연관시킨다. 이처럼 불법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의’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7:23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신자들로 드러나며, 23:28에서는 예수님을 드러내놓고 대적하는 유대교 지도자들로서 교회 밖에 있는 자들로 드러난다. 이처럼 이 경우에도 밭에 자라는 가라지는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밖에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38절의 ‘세상’은 교회 안과 교회 밖을 포괄하는 모든 세상인 것이 재차 확인된다.80)

이러한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이들 모두를 모으는 영역인 ‘그의 나라’(τῆς βασιλείας αὐτοῦ, ‘테스 바실레이아스 아우투’)는 앞서(3.1.6) 살펴본 대로 인자의 재림 때 그분의 왕적 권위가 펼쳐지는 ‘세상 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② ‘불타는 풀무’, ‘통곡과 이를 갊’(42절)

42절은 30절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가라지의 운명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모아진 다음에 ‘불타는 풀무’에 던져진다. 50절에서도 내용상 조금은 어색하게81) 반복되는 ‘불타는 풀무’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리를 뜻한다(참조. 계 20:11-15).82) 이는 아마도 게헨나의 배경을 이루는 예루살렘 근처 힌놈 골짜기의 쓰레기 소각장 모습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83)

악한 자의 아들들의 운명이 끝으로 기술된다. ‘거기에는 통곡과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매우 마태적인 표현으로서84) 악한 자가 처하게 될 처참한 상황을 인상적으로 부각한다. 악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의인들이 영원히 알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이나 통곡이나 아픔이 더는 없는 모습(계 21:4)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③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끝으로, 43절은 밀의 운명에 대해서도 확대 기술해 준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의인들이 누리게 될 이 최종적 축복은 다니엘 12:3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85)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으로 보인다. 의인들의 이 영광스런 모습은 앞서 기술된 악인들의 운명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제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빛으로 세상 가운데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5: 14-16). 그런데 시대의 끝에 최종 심판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등불과 비교할 수 없는 ‘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3.2.3. 마지막 권면(43하절)

비유 해설은 예수님의 마지막 권면으로 마무리된다: ‘귀 있는 자는 듣도록 하여라’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는 비유가 끝날 때 이 권면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가라지 비유에서는 비유 해설이 끝날 때 동일한 권면이 다시 사용된다(참조. 11:15). 이는 비유뿐 아니라 비유 해설도 들어야 함을 밝혀 준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밖에 있는 무리들의 문제인데, 제자들도 들을 귀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치 않으며 듣고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비유 해설도 비유와 마찬가지로 들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 아이처럼 낮은 태도로 들어야 비로소 깨닫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다(참조. 11:25; 13:11; 비교. 15:16; 16:5-12).    < 계 속 >
 

각주)---------

69) 앞의 3.1.1.을 보라

70)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점에 기초하여 13장을 1-35절과 36-52절 두 부분으로 나눈다. 예. Kingsbury, Parables, pp. 12-15.

71) 참조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 p. 427. 물론 그들은 비유 해설을 마태의 창작으로 보기에, 이 관심도 마태의 것이라고 단정한다.

72) Nolland, Matthew, p. 558.

73) 참조. Luz, Matthew 8-20, p. 268.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유만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기대하시기도 한다(15:15-16; 16:5-12)

74) 이 목록을 포함한 비유 해설이 알레고리적이기 때문에 그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해온 고전적 경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Brown, ‘Parable and Allegory’, pp. 36-45를 보라. 비유 해설의 진정성 문제에 대해서는 앞의 1.2 논의를 보라.

75) 예를 들어, ‘잠잘 때’, ‘열매를 맺음’, ‘종들’, ‘집주인’, ‘곳간’. 참조. Hagner, Matthew 1-13, p. 393.

76) France, Matthew, p. 532.

77) 참조. Hultgren, Parables, p. 298.

78) 하지만 히 9:26은 ‘시대의 끝’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더불어 이미 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끝’이라는 표현은 종말론적 표현으로서 이미와 아직 두 측면에 다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다만 마태는 이 표현을 언제나 아직의 측면, 곧 완성될 종말의 때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79) Kingsbury, Parables, pp. 102-104를 보라

80) Kingsbury, Parables, pp. 104-106을 보라

81) 물고기를 풀무에 던져 넣은 모습은 약간 어색하다.

87) 어떤 이들은 이 풀무 상징의 배경으로 단 3:6을 제안한다(예. Nolland, Matthew, p. 561). 하지만 그곳에서는 풀무에 던져진 대상들이 심판의 대상인 악인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의인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제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참조. France, Matthew, p. 537 n. 22.

83) 참조. France, Matthew, p. 537.

84) 마태복음에는 6회(41절, 50절, 8:12; 22:13; 24:51; 25:30)나 나타나는 데 반해, 마가복음에는 0회, 누가복음에는 1회(13:28) 나타날 뿐이다.

85) Luz, Matthew 8-20, p. 270은 ‘아버지의 나라’를 현재적인 ‘인자의 나라’와 구분되는 마지막 완성된 나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Hagner, Matthew 1-13, p. 394는 이들 두 개념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며 따라서 통일한 개념이라는 점을 적절히 지적한다. 참조. Kingsbury, Parables, p. 98; Wenham, Parables, p. 64; Nolland, Matthew, pp. 561 62; Osborne, Matthew, p. 535.

     관련기사
·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①·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②
·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③· [ 신학연구논문 ] ‘밭의 가라지 비유’ 이해 ④
양용의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종말론, ‘구름타고 오심’은 재림
서울교회 박노철 재심개시… 9.1
(8) 명성교회 세습, 바르게 했
(9) 명성교회 변칙세습은 직접세
장신 88기 66명… 명성불법세습
한국교회 8개교단 이대위원장들 ‘
어떤 메시지가 세계인구 24억을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한국교회문화사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제호 : 교회와신앙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청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