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안식교
       
2300주야 조사심판이란 과연 무엇인가?(안식교측)
정통교회 vs 안식일교회 미주 진리토론 4-2
2000년 11월 01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명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요. 주최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석하신 분들 보니까 예수를 사랑하시는 분들 같아요. 저도 예수를 사랑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8절 가운데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환상이나 꿈 가운데 예수님을 혹 만나신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본 것처럼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본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예수 못 만났거든요.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했어요. 그래도 예수를 사랑한단 말예요. 참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지금도 보지 못해요.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사람도 예수를 보지 못했으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했다고 베드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죠.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보지도 못한 예수, 그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한 그 예수를 그렇게 믿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믿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나서는 배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도리를 배우는 것은 성경을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기록된 성경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나님 앞에 늘 굴복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에 있어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렇게 제가 믿는 예수, 예수께서 저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제 신앙을 간증하려고 합니다.

이제 저 비디오하시는 분이 이런 논쟁에 참여한 적이 있는가라고 저에게 물었어요. 저는 전혀 처음입니다. 이런데 참여하는 일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논쟁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온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다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으니 내가 믿는 바가 이렇다는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서 또 청중들 앞에서 간증하는 시간으로 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온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간증을 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자기 신앙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간증이 성경과 동 떨어졌을 때는 모르거니와 그렇지 아니할 때는 그 간증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9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임할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 선지자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때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들은 이 섬긴 바가, 선지자들이 이렇게 섬긴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는 이 섬김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라고 했어요.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러면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의 때에 대해서 ‘어느 시 어느 때‘를 지시하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계된 때를 찾아보면 다니엘서 9장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다니엘서 9장에 24절로부터 27절까지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을 간단히 요약한 것 아닙니까?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이요.

그리고 그 다음에 25절에 말하기를 그렇게 말했어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끊어질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라고 하는 것은 원문으로는 메시아를 썼다고 합니다. 메시아, 이 메시아가 일어날 것이며 메시아가 육십이 이레 후에는 끊어질 것이며,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해서 어느 시 어떠한 때를 미리 증거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고난의 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영광의 때에 대해서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2300주야라는 말을 최목사님께서 얘기하셨는데, 너무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30분 안에 제가 설명을 드릴 수 있는 실력이 도저히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마 얘기를 하다가 그냥 30분이 끝나면 내려가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여기 앉으신 재림교인들이 아니신 분들은 2300주야라고 하는 말이 그게 무엇인지,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계시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갖 얘기들을 다 해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것 밖에는 제가 얘기를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때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 압니다. 그러면 후에 있을 영광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겠습니까? 이 예수의 고난과 영광이 한꺼번에 나타난 복음서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가복음 9장 27절로부터 33절까지 읽어보면 그게 나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들이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신 것입니다.

이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시기 전에 마태복음 16장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28절에 말하기를 “진실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을 것이라“고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왕권을 갖고 오시는 것, 예수님께서 왕권을 갖고 오시는 것은 재림을 하는 광경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저보고 그러더라구요. “유대인은 지금 2000살 넘은 사람이 살고 있다더라“ 그러셔요. “아니 그건 또 무엇입니까?“ “아, 죽기 전에 예수 재림을 볼 자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 사람 아직 안 죽어야 될 것 아니냐?“ 그렇게 농담처럼 얘기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엿새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거기서 용모를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16절로부터 18절까지 가운데서 ‘주의 강림하심에 대해서 내가 너희에게 얘기하는 것은 공교히 만든 얘기가 아니고 우리는 그 위엄을 친히 본 자들이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봤다고 했습니다. 친히 본 자인데 언제 봤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우리가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가 그 말을 들으라 할 때에 저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시는 일이 공교히 만든 얘기가 아니고 친히 봤는데 그것이 변화산에서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베드로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무엇을 의논했느냐?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하신 장면은 영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 받으신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받으실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다니엘 9장 24절로 27절에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70이레는 70주로서 490일이 됩니다. 그런데 490일이라고 하는 것은요, 일년 사개월째쯤 되요. 그런데 그것이 언제부터라고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490일이거든요. 그러면 예루살렘 중건을 어느 왕이 언제 내렸든지 간에 490일 가지고는 아직도 그 왕이 통치하는 기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때는 예수님이 오실 수가 없죠. 고난받으실 때도 어림도 없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것을 70이레를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는 저쪽 띄어서 마지막에 적용시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70이레를 우리는 연속적인 490일로 믿고, 연속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70이레에 대해서 69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끊어질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27절에 보면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 굳은 언약을 전할 것이고, 이레에 반이 되어서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레의 반이라고 하는 것은 3일 반이죠. 그 3일 반이 되어서 제사와 예물을 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70이레라는 것이 490일로 계산을 해야 되느냐? 490년으로 이해를 해야 되느냐? 이 문제가 여기에서 대두됩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몇 년도에 내렸던지 간에 490일 가지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490년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490일이라고 하는 70이레라고 하는 것은 하루가 일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레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것은 3년 반입니다. 그런데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침례받을 때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기름을, 권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했어요. 성령과 권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그랬어요. 예수께서 침례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침례를 받으시는 대로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62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 왕, 메시아가 끊어질 것인데 언제 끊어질 것이냐?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3년 반 후에 끊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때는 서력 연대로 31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31년부터 490년이 아니죠. 3년반이니까 490년에 3년 반을 뺀 것이죠. 그러니까 486년 반. 그래야죠? 거기서부터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서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졌는가 찾아보는 일은 바른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31년 그때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예루살렘 중건 명령을 내린 해를 찾아보면 아닥사스다 7년이라는 해가 나옵니다.

이것은 에스라 7장 7절부터 나옵니다. 그럼 아닥사스다 7년이 서력 기원년 대로 기원전 457년이 되어야지 31년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중건령이라고 얘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서에 기록된 대로 세번 중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고레스 왕 때, 그 다음에 다리오 왕 때, 그 다음 아닥사스다 왕 때,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레스가 내린 것은 BC 538-7년 사이입니다. 그 다음에 다리오가 내린 것은 BC 520년-519년 그 사이입니다.

그리고 이 아닥사스다이 내린 것은 BC 458년-457년 그 사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중건령을 내린 것을 BC 458년으로 생각하는 것 같구요. 어떤 분들은 아닥사스다 20년에 느헤미야에게 내린 것이라고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느헤미야 때에 내린 것으로 보면 이레의 절반에 이르러서 제사와 예물을 금하고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끊어진다고 하는데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끊어진다는 31년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그 예루살렘 중건의 계산점, 시작점을 우리가 한번 찾아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BC 457년이 되어야지 31년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아닥사스닥 왕 457년인가, 458년인가? 여기 문제가 생기죠. 그런데 느헤미야 1장 1절을 보면 재미있는 기사가 나오는데요.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하나니에게로부터 예루살렘이 황폐해졌다고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황폐해졌다는 얘기를 느헤미야가 듣고, 마음이 심란해서 얼굴에 수색이 가득했는데요, 그래서 아닥사드다 20년 니산월에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앞에 섰는데 얼굴에 수색이 가득했다고 2장 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아닥사스다가 느헤미야에게 이야기하죠. “너에게 무슨 근심이 있느냐?“ 그런데 니산월은 1월이고, 기슬르월은 9월입니다. 그러면 이 9월은 1월보다 먼저 있던 전해의 9월일까요? 이 1월이 9월이 있는 그 해의 9월일까요? 이것은 그 9월달에 20년 기슬르월에 그 얘기를 듣고 그 다음에 니산월에 수색이 있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9월달에 듣고 니산월에 수색이 있었는데 1월달부터 1월달까지를 아닥사스다 통치 연대로 이야기를 하면 모순이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아닥사스다 21년 니산월염라고 써야 합니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에 9월달에 듣고 2장에는 아닥사스다 21년 니산월에 그렇게 해야지 이게 맞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이 니산월도 아닥사스다 20년, 이 앞에 기슬르월도 아닥사스다 20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아닥사스다 1년, 2년 하는 얘기가 1월부터 1월까지 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사실 히브리어 원전에는 함께 붙은 책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닥사스다 7년은 기원전 438년~457년까지 걸쳐서 아닥사스다 7년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아닥사드사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1월 1일, 니산월 1일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기원년으로 해서 하면 457년이 됩니다. 그래서 그 니산월되기 전에 기슬르월은 458년이 됩니다. 그러면 아낙월도 458년이 되겠죠. 그러나 이 니산월은 BC 연대로 따지면 457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이 어느 시 어느 한 때를 지시한 것이 특별히 그 받으실 고난의 때에 대해 지시하신 것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발견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래서 찾아서 그 사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성전 중건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얘기지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라는 얘기는 아니거든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의 수도로서 그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얘기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그냥 중건, 이렇게 해서 새로 건축하는 것으로만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회복하고 건축하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복이라고 하는 얘기는 예루살렘의 시가들을 건설하라는 얘기만은 아니죠. 이것은 예루살렘이 유대 나라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회복해야지 이게 회복입니다. 그런데 이 고레스의 명령이나 다리오의 명령은 다 성전 건축하는 데만 거의 국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은 에스라 7장 25절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러니까 재판권을 부여했습니다.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자치권을 주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중건하라는 말이 이 아닥사스다 7년에 명령과 일치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보게 됩니다. 그래서 31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때부터 490년에 3년 반 빠진 것으로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가서 해당되는 해도 BC 457년이고 그 다음에 이것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서 자치권을 부여하던 해도 아닥사스다 7년, 에스라가 거기서 떠났을 때기 때문에 BC 457년이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나 있는 70이레에 대해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받으실 고난에 대해서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한 그 때에 대한 이야기로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2300주야라는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2300주야라는 말은 다니엘서 8장 14절에 나옵니다. 다니엘 8장 13절에 다니엘은 기록하기를 이, 질문이 나옵니다.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하여 그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이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하여라고 하는 이 말은 여기만 나오는 말이 아니고 이 다니엘서에 몇 번 나옵니다. 9장 27절에도 나오고 11장 31절과 12장 11절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얘기했거든요.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장차 일어날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니엘에 나타난 이 망하게 하는 죄악, 멸망의 가증한 것,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우리에게 이르소서, 언제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하는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보거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구약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300주야까지는 그 때 성소가 정결하여 지리라고 얘기를 했지, 무슨 기간을 얘기를 할 때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해야 되는데 언제부터는 없어요. 그냥 2300주야까지니라고 되어 있단 말이예요. 그러면 이 언제부터는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다니엘 8장과 다니엘 9장에 이상이라고 하는 말, 우리가 환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 말들을 전부다 찾아서 보면 다니엘 8장에 나타나는 이상과 다니엘 9장에도 이상이란 말이 나타나는데 그 이상, 9장 21절과 9장 23절에 나타나는 이상이 원문으로는 각각 다른 말로 쓰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좀‘이란 말하고, ‘마레‘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좀이란 말은 어떤 계시를 볼 때 계시 전체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마레라는 말은 그 계시 중에 포함된 한 부분들을 얘기할 때 사용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다니엘 8장 26절- 27절 마지막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주야에 대한 ‘마레‘를 깨닫지 못해서 혼절하여 누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천사는 주야에 대한 ‘마레‘를, 이상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다니엘 8장에 나오는 짐승에 대한 이상만 설명해 주었어요. 그러다가 그후로부터 12년쯤 지난 후에 메대 사람 다리오가 바빌론은 망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 노릇할 때 다니엘이 9장에서 기도하죠. 간절히 기도하고 21절이 되었을 때 21절에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이전 이상이라고 한 그 이전 이상은 8장에 나타난 하좀입니다. 그 8장에 나타난 하좀 중에 나타난 그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23절에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할 때 그 마레를 깨달을지니라고 했어요. 그러면 다니엘 8장 가운데 해석해 주지 아니한 마레라고 하는 것은 주야에 대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주야에 대한 이상을 깨달을지니라“고 하면서 “내 민족과 내 거룩한 성을 위하여는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이 칠십 이레라는 기간은 2300주야의 시작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받으실 영광이 어느 시 어떠한 때에 대해서 말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70이레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2300주야의 끝은 영광과 관련된 기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2300주야 끝에 성소가 정결하여 지리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성소 정결을 심판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 22장 11절을 보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계시록 22장 11절에 그 선언이 나온 다음에 12절에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면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했어요. 아까 마태복음 16장 26절에도 그랬어요. 인자가 영광을 가지고 와서 각각 그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줄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기 전에 어떻게 상벌을 주실 것인지 심판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경에 그 단어가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어도 그 사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하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상벌을 다 갚아 주기 위하여 재림하시기 전에 심판하시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조사심판“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고, 그 말이 사람들에게 결국 호감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을 해서 요즘 우리가 ‘재림 전 심판‘이라는 말로 고쳐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조사심판“이라, 혹은 “재림 전 심판“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각각 일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그처럼 사랑하는 저도, 그때 영생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 말씀 안에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이 예수를 만났던 것처럼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면서 그날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 그 영광에 함께 다 참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11월호)

교회와신앙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국가기관에 제소하면 면직 출교,
통합, 에스라하우스(노우호) ‘이
신천지(이만희) 온라인 세미나,
이명범, 사과문 발표 이단 해지
통합, 인터콥(최바울) ‘참여자제
전광훈 이단 규정 없어, 교단의
이만희 교주, 감염병예방법 위반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