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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론 심층연구 ] 초기 한국교회의 종말신앙 ④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신앙이 광범위하게 파급
2017년 10월 26일 (목) 14:35:07 박응규 교수 ungkpak@acts.ac.kr

초기 한국교회의 종말신앙 ④

박응규 교수 /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III. 3.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고착 되어가는 종말론적 경향

   
▲ 박응규 교수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들을 염두에 두면서 고찰해야 한다: 1) 한국 종교 안에 내재해 있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경향들과; 2)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특성고찰과; 그리고 3)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추정해야 할 것이다.78) 이러한 요인들을 염두에 두면서 전천년설로 고착되어가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선교가 시작되는 1884년부터 1910년까지는 잠복기라고 할 수 있으며, 한일합방이 되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발아기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1934년까지는 개화기로, 그리고 선교 50주년의 해인 1934년 이후부터 1945년 해방이전까지는 고착기로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79)

한국인 저승개념은 세대주의에서 구분하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와 “천국 혹은 천당” (the kingdom of heaven) 중에서 후자의 견해를 전통적인 사상의 맥락 속에서 거의 전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행사되는 하나님의 통치권한을 부각한다면, 하늘 나라, 혹은 천당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천상의”(heavenly)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세대주의 신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다비는 하나님 나라의 천상 개념을 선호 하고 있다.80) 한국에 전래된 세대주의는 다비를 비롯한 고전적인 세대주의이기 때문에 한국 고유의 저승개념은 종말론적 긴장관계를 함축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보다는 천당 개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이원화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미래성을 강조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안에 있는 특징 뿐 만 아니라, 시련과 질곡으로 점철되어진 역사적,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구형된 한국인의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세계관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부합되기가 보다 용이하였다.81)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강조하는 성경연구를 통한 3자 정책은, 성경을 사랑하고 문자적 성경해석을 한국교회에 아주 강하게 파급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성경학교운동, 사경회, 그리고 예언대회를 주도했던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한국 기독교를 “성경의 종교”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선교 초기에는 이러한 특징이 성경 중심으로 이어져 가는 데에 귀한 기여를 하지만, 문자적 성경해석에 대한 강한 집착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구속사적 상황과, 성경 신학적 인식에서 오는 안목 없이 인용하여 해석하기에, 예언서나 계시록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어려운 시기일수록, 성경을 통해 시대를 인식하기보다는, 시대를 해석하기 위하여 성경의 예언서 내용이나 상징들을 무리하게 해독하고자 하는 폐단이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방법에서 기인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 특히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많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반영하는 저서들을 번역한다든지, 선교사들 및 한국인 저자들(민준호, 홍종숙, 김상준, 길선주, 이명직 등)에 의한 계시록 및 종말론에 대한 책들의 등장은 전천년주의의 파급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비록 출판되지는 못했어도, 게일과 언더우드에 의한 <스코필드관주성경>의 번역과 출판시도는 이 성경이 얼마나 한국에 온 선 교사들에게 교파를 초월하여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 준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목사 안수 받은 최초의 선교사로서 1916년에 소천하기 전까지 이 작업 에 몰두하였다. 게일의 <성경잡지>에 그의 수많은 세대주의적 견해를 표명하는 글들과 소개,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개설한 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 등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파급되어 갔다. 또한 당시의 세대주의 신학을 반영하는 베스트셀러들 가운데, 윌리암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Jesus Is Coming이 게일에 의하여 1913 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및 출판이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미국에 유행하던 세대주의 저서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말로 번역되었으며 <천로역정>의 번역과 파급은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적 특성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82) 그리고 찬송가를 통해서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반영하는 신앙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III. 4. 한국장로교에서의 역사적 및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구분과 그 의미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종말론은 일제치하에 구형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었음을 한국전통 종교들의 내세관, 19세기 말 미국교회의 부흥운동과 선교 동인으로서 종말론적 영향과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 그리고 한말 및 일제하라는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의 종말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규명하였다.83) 세대주의의 영향은 교파를 초월하여 파급되다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에 의하여 개혁주의 신학과 양립할 수 있는 종말론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아니라, 역사적 전천년설임이 주장되었다.84) 두 박 박사들의 저서에서 역사적 전천년설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언급하기 전까지는 교파의 차이에 관계없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강하게 끼친 종말론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었다.85) 물론 다양한 종말론적 견해가 한국 교회에 존재 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86) 그러나 일제하라는 상황을 지나면서 교파를 초월하여 우세하게 영향을 끼치는 천년왕국 사상은 바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형룡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전천년기적 재림론이다”87)라는 견해는, 이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대부분의 보수주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수용되었고 파급된 상황을 직시하면서,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전천년설이라는 사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우세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장로교의 종말론적 전통은 신학적으로 역사적 전천년설이어야 함을 “선언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의 표명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과 칼 맥킨타이어(Carl McIyntire)와의 결별의 동기, 즉 1937년의 정통장로교(OPC)와 성경장로교(BPC)의 분열을 목격하며,88) 그리고 조지 엘든 라드(George E. Ladd)를 비롯한 학자들과의 학문적 대화를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개혁주의 신학과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한 가운데 역사적 전천년설로 자신의 종말론을 확고히 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드의 저서들인 Critic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1952)과 The Blessed Hope 1956)을 통하여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 견해이며, 전천년설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려는 자들에 게 선호된 종말론이었다.89)

19세기 말의 미국 선교운동의 동기는 종말론적 영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특별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우세한 종말론으로 부상되었으며, 평양신학교의 교수 선교사들 중에도 Princeton이나 McCormick 신학교 출신들이라 할지라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90)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개혁주의적 경향이 강한 선교사들은 1930년 대 이후에야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된다.91)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은 선교 초기부터 보다는, 19세기 말 미국교회의 신학과 선교운동을 고찰해 볼 때, 1930년대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92)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Princeton과 Westminster 신학교에서 각각 유학한 박형룡과 박윤선에 의하여, 한국교회의 종말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대주의는 개혁신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해방 이후에 그들의 저서들을 통해 역사적 전천년설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라고 믿는다.93) 박형룡의 신학을 연구한 장동민은 다음과 같이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박형룡이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만주의 봉천 신학교에서 였다. 그 이전 평양신학교에서 그는 변증학을 주로 가르치고 있었다. 박형룡은, 평양신학교에서 오랫동안(1917-1937) 신학을 가르쳐 왔던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William Reynolds) 박사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가미된 역사적 전천년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데, 이는 박형룡의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가 천년설 사상을 확고하게 가지게 된 것은 봉천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친 이후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벌콥의 조직신학을 상당한 부분 그대로 받아들여 가르치지만, 벌콥의 무천년설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94)

이러한 견해와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20세기 초에 세대주의자들과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 사이에는 신학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적 자세를 취하면서 일종의 제휴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기반은 평양신학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천년설이 파급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평양신학교 가 설립되고,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통한 사경회 및 부흥회, 그리고 성경공부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성경중심의 신앙을 심화시켰으며, 문자적 성경해석을 강조하는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한국장로교회로 하여금 근본주의적이며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을 수용하는 기폭제가 되었다.95)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인, 특히 종말론적인 전통에 대한 박형용 박사의 견해는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준다. 전천년설에 대한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일제하의 한국장로교회의 종말론적 견해에 대한 언급이 그 당시가 아니라, 해방이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박형룡의 주장을 주의 깊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당시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선교사들도 소수였지만 그들의 견해를 밝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재한 미국선교사들 중의 많은 수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자들이었기에, 이러한 소수의 신학교수 들에 의해 가르쳐진 종말론 보다는, 성경학교나 사경회를 통해 전파된 세대주의가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면서, 두 박 박사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의 조율은 한국 장로교의 종말론적 성향을 고찰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분의 견해가 담긴 종말론에 관한 서적들이, 즉, <내세론>, <요한 계시록 주석>이 해방 이후에 출판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이 미국 유학을 했던 1920년대의 Princeton신학교나 그의 박사 학위를 위해 공부했던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무천년설이 다소 우세했던 천년왕국설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천년설로 집약되어진 그의 견해는 무천년설을 성경적인 기반이 부족할 뿐 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약화 시키는 견해로 간주하였다. 박형룡은 미국에서 심화된 개혁신학에 대한 이해와 상충되지 않는 천년왕국설이 바로 역사적 전천년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Fuller신학교의 라드교수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그의 견해를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그 는 역사적 전천년설과 개혁신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확신하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의 차별화 작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박형룡의 종말론적 입장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한국의 상황에 적합하고 개혁신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창조적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96)

박형룡과 함께 이런 신학적 작업에 공헌을 한 인물이 박윤선인데, 그는 1934년 8월, 제1차 미국유학을 가는 도중에 배 안에서, 계시록을 외우며 가는 것으로 종말론에 대한 그의 강렬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3장까지를 외우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도착한 그는 계속적으로 계시록을 외우며 묵상하는 습관을 유지한다. 그리고 1949년 그의 성경주석 가운데 처음으로 <요한 계시록 주석>을 15년간의 각 고 끝에 출판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만큼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자들 가운데 계시록과 종말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박윤선이 미국에 유학하는 시기의 웨스트민스터의 대부분의 교수들은 전천년주의 보다는, 무천년주의를 더 추종하고 있었다. 메이천을 비롯한 교수들은 개혁신학과 양립할 수 있는 무천년설을 선호하고 가르쳤겠지만, 다른 분야는 몰라도, 종말론에 있어서는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린 전천년주의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종말론(특히 천년왕국설)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는 성경해석학적인 면도 중요한 요인이 되겠지만, 시대적인 상황(Zeitgeist)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종교 안에 내재해 있는 피안적인 성향은 쉽게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아주 강한 염세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박윤선의 저서 가운데 자주 발견되는 용어 중의 하나인, “이 세상주의”의 관념에는 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배어 있다. 그러기에 무천년설에 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도, 그의 종말론은 역사적 전천년설로 규정되어졌다.97) 그러나 그의 후기 사상 속에는 무천년설을 중시하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적지 아니한 수가 무천년설을 수용한 것을 보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천년왕국설을 전천년설의 테두리에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한국에 소개된 신앙은 근본주의적이며 경건주의적인 복음신앙이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며, 이런 사실은 초기의 한국 보수교회의 신앙은 개혁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특징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 속에 자리 잡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한국 종교 안에 있는 운명론적이며 이원론적인 성향과 쉽게 조우할 수 있었으며, 당시의 구한말, 일제하의 상황은 이러한 경 향을 더욱 부채질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특징은 위기상황을 강한 종말론적 기대로 이겨나갈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으며, 전도나 개인 경건에 박차를 가하게 함으로 한국교회에 귀한 신앙적 유산을 남기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최대의 시련이요 박해인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꿋꿋하게 신앙과 교회를 지킬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제공 받았던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확고한 성경관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형식적 원리”(the formal principle)로 작용 하였다면, 재림에 대한 열렬한 기대는 “내용적 원리”(the material principle)로 작용하여 한국교회와 성도가 기나긴 박해의 기간을 헤쳐 나가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고난 중에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인 전도의 열정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천년설의 장점을 살리면서, 한국교회의 심성에 굳게 자리 잡은 세계관에 조화를 이루면서도 개혁신학을 만개시키려는 의도에서 두 박 박사들은 나름대로 종말론적 토착화의 작업을 역사적 전천년설로 정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단순히 선교사들의 견해를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신학적 번민과 각고를 거쳐 추출한 결과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일제하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과정에는 성경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정황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숙지하게 된다. 한국 전통종교들 속에 함유된 내세론적 특성들에 대한 고찰과 일제치하라는 특수한 정치사회적 여건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종말론이 다양한 유형들을 생성하며 점차적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고착되어 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0년대야말로 전천년설로의 편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임을 고찰하였다. 그 기간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세계 선교운동에 있어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20년 대 이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전천년설을 신봉하면서도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 다양한 선교정책과 방법들이 시행되었기에, 선교지에서 이러한 경향이 철저하게 반영 되었다고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자들 간의 논쟁과 사회복음의 확산으로 인하여 신학적 양극화의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이 보다 확고하게 한국에 반영되었으며, 독립운동의 실패라는 상황은 더욱 이런 경향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종말론의 경향이 너무 개인적이고 타계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게 될 때에, 성경적인 종말론의 본질적인 특성이 상실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즉 종말론에 내포되어 있는 우주적 차원이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종말론 형성을 위한 제고가 필요함을 역설해 준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인간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도 초월적이며 전 우주를 포함하는 차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국면이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영역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관심도 촉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원론적인 사고구조를 극복해야 할 필연성을 절감하게 된다. 저 세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주권은 역시 미치고 있으며, 이원론적인 사고에 의하여 신자의 소망의 대상을 단지 저 세상으로만 국한 시키는 것은 이 땅에서의 교회와 성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에 있어서 너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편향(偏向)되는 것은 지나친 감상주의적 천년왕국설을 신봉케 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간직하고 있는 포괄적인 국면이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이냐 후이냐? 더 나아가 그 시기가 언제인가? 시대의 징조들을 좁은 의미로만 고찰함으로 써 종말론의 중요한 주제가 단지 시기의 문제에로만 협소화 될 수 있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의 개념이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실현되어진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 내세를 믿으면서도 이 땅에서의 교회와 신자의 삶을 종말론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부여해 준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그의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주권(“Christ reigns now”), 그리고 성령의 사역이 이러한 천년왕국 개념과 상응(相應)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사명과 과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안목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견해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단절적으로 본다든지, 혹은 별개의 여러 시대로 구분하지 않고 은혜 언약의 개념으로 통합 할 수 있는 구속사적 안목을 지닐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인류역사의 핵심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보다 확고히 인지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구원이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모든 역사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의식 및 현실인식은 건전하고도 실제적인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소유케 함으로 이 세상에서의 신자와 교회의 삶이,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긴박하게 기대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게 하는 안목을 부여해 준다. 교회론에 있어서도, 단지 기다리는 공동체로서가 아니라, 변혁하는 공동체로서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각주) -----------

78) 이런 과정은 졸고, “From Fear To Hope"의 제 1장부터 제 3장에서 상술되어 있다.

79) 졸고, "From Fear To Hope," 264-278.

80) John N. Darby, The Collected Writings of J. N. Darby, 2 : 55.

81) 손봉호, “한국교회의 내세관: 올바른 내세관 정립의 필요성” <신학지남> 43:3 (1976): 45-52.

82) <천로역정>은 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서가 대량으로 발행된 시기이도 한 1890년대에 발간되어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적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John Bunyun의 종말론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의 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는 한국 성도들에게 이분화 되어진 종말론을 소유하게 함으로, 자연스럽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취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보아진다. Cf. 그레이슨, <한국종교사>, 249.

83)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이 “근본주의적(fundamentalist)이며, 경건주의적(pietistic)인 복음주의”적 경향이 강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분류에 대하여는 Timothy P. Weber, "Premillennialism and the Branches of Evangelicalism," in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ds.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1), 12-14; Jung Young Lee, "Korean Christian Thought," in The Blackwell Encyclopedia of Modern Christian Thought, ed. Alister E. McGrath (Oxford: Basil Blackwell, 1993), 310을 참조하라.

84) 졸고, "From Fear To Hope," 342-356에 박형룡과 박윤선의 종말론에 대하여 상술되어 있다.

85) Ibid., Chap. 3, “Eschatological Paradigms during the Japanese Annexation(1910-1945),” 174-278. 성결교의 종말론에 대하여는 pp.232-235에서 언급하였다.

86) 이미 헤밀톤 선교사의 증언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우세한 분위기 가운데,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을 믿는 극소수의 선교사들도 존재했음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전천년설을 믿는 선교사들 중에도 세대주의는 아니지만,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구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조지 엘든 라드 (George E. Ladd)에 의해 확고히 주장되어 전자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천년왕국설이 되었으며, 그 전에는 선교사들 중에서 세대주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전천년설을 신봉할 때는 종종 “non-doctrinal premillennialism"으로도 명명되어지곤 했다. 이 용어는 필자가 한국장로교회 신학의 뿌리를 놓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종말론에 대한 질문에 아들인 마삼락(Samuel H. Moffett) 박사가 부친의 종말론을 특징적으로 그와 같이 언급하였다. Interview with Samuel H. Moffett at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February 17, 2000.

87) 박형룡, <박형룡 저작전집> VII, 278. Cf. 간하배 (Harvie M. Conn)를 비롯한 선교사들이나 한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초기 선교사들의 대체적인 종말론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였다는 사 실을, 필자는 한국전통종교의 내세론적 특징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성향, 그리고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며 입증한 한국교회의 우세한 종말론은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니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임이라는 논지가, 최근의 한 논문을 통해서도 주장되었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한국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개신교 신학의 정체성을 규명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박용규, “한국교회 종말신앙: 역사적 개관” <성경과 신학> 27 (2000): 190-222. 이 논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비록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박형룡 박사가 주장하듯이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의 입장이 아니라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88) George M. Marsden, "Perspective on the Division of 1937," in Pressing Toward the Mark. eds. Charles G. Dennison & Richard C. Gamble (Philadelphia: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86), 295-328.

89) Cf. 졸고, "From Fear To Hope," 348.

90) Joe L. Coker, "Exploring the Roots of the Dispensationalist/Princeton 'Alliance': Charles Hodge and John Nelson Darby on Eschatolog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Fides et Historia 30:1 (Winter/Spring 1998): 41-56.

91) Pak, "From Fear To Hope," 135-139.

92) 홍치모,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129; 이상규, <한국에서의 칼빈연구 100년, 1884-1984> (서울: 한국개혁신행협회, 1985), 14, 18, 21-22.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형성되었으며, 보수 및 진보적 신학의 갈등은 주로 성경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Young Il Seu, "To Teach and To Reform: The Life and Times of Dr. Yune Sun Park" (Ph. 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2), 158f.; Yong Kyu Park, "Korean Presbyterianism and Biblical Authority: The Role of Scripture in the Shaping of Korean Presbyterianism, 1918-1953" (Ph. D. diss.,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1991)과 박용규의 학위논문 번역 수정본인 <한국장로교사상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2), 147ff.

93) Ibid., 336-356. 박형룡 박사는 그의 저작 중 <내세론>의 기초가 되었을 종말론 강의안의 연도가 기록이 분명치 않아 그의 종말론이 언제 역사적 전천년설로 정리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George E. Ladd와의 편지 교신 후에 정립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1960년 전후가 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이 개혁신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Ladd의 편지가 1959년 1월 6일자로 <저작전집> VII, pp.266-267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의 종말론도 그의 <요한 계시록 주석> 초판이 1949년에 출판된 것을 보면, 종말론이나 계시록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박윤선 박사의 견해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해방 전후에 역사적 전천년설로 정리했을 가능성이 많다.

94)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298-299.

95) 졸고, "From Fear To Hope," 336-340.

96) “His eschatology was contextually innovative and was more adaptive to Korean Christians. Park's teaching of historic premillennialism was an indispensable contribution to the correction of extreme movements and to the development of an orthodox theological heritage in Korea. His holding of historic premillennialism brought about its revival in Korean evangelical circles. Park performed a major theological service by adopting historic premillennialism, which may be called 'eschatological contextualization.' This was an ingenious attempt to make the idea of millennialism more compatible with his conservative theological heritage, his worldview, and the events and despair of his day." 졸고, "From Fear To Hope," 344-345.

97) 박윤선, <요한계시록 주석>, 개정판 (부산: 성문사, 1955), 235; Young Il Seu, "To Teach and To Reform,"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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