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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단 ] 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②
“혼미한 영에 사로잡혀 불순종 하는 이스라엘”
2017년 09월 22일 (금) 16:20:30 소기천 교수 kychunso@puts.ac.kr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새로운 제2의 종교 개혁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개혁은 무엇일까?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의 논고를 3회에 걸쳐 연재하여 제2의 종교개혁에 대한 갈증 해갈의 길을 모색해 본다. / 편집자 주 ]


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2)

소기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III. 하나님의 의 ․ 사랑과 그리스도

   
▲ 소기천 교수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강조하며 율법의 본뜻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룬다. 이로써 제2의 종교개혁은 그 어떤 인간이 인위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1.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로 이루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9장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10장을 시작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를 숨기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께 구하는데,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문제’이다.(롬 10:1)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는 열심이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롬 10:2) 이러한 이스라엘의 열심은 “자기 의만을 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 것”(롬 10:3)과 같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핵심을 천명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확실히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는 명령과 실천에 열성적이었다.(2a) 하나님께 대한 열심, 그것은 히브리 종교의 특성으로 일종의 광신(fanaticism, 행 9:1-2, 갈 1:13-14, 빌 3:4-6)과 같다. 그러나 정작에 그들은 자신들의 의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깨닫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위의 4절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인 것은 율법을 파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최상의 계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한계를 아시고서 인간의 의가 아니요,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의 의로운 행위만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제시한 후에, 바울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만을 대대로 관심 가진 것을 비판하면서 이미 모세 때부터 율법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이셨다고 덧붙인다.

구약성서에서 ‘의’는 상위개념인 츠다카(tzedakah:צדקה)와 하위개념인 미쉬파트(משפט)라는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된다. 츠다카는 나그네와 고아와 같은 약자를 돌보는 의미의 의이고, 미쉬파트는 뇌물을 멀리하여 공정한 재판을 이루는 의미의 의이다.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란 법적인 정의(justice)라는 뜻을 가진 미쉬파트는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공의(righteousness)라는 뜻을 가진 츠다카에 포함되는 일부 특정한 상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의는 미쉬파트보다는 츠다카에 더 가까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실현하는 것이 결코 인간의 의로움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점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의인이면서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단순한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과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죄에 계속 머물며, 혹은 그 죄를 회개하였다고 교만할 수 있을까?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언제나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중심에 모시고 살아간다. 말씀이 그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 우리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곧 이방인들은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요 다만 “믿음에서 난 의”(롬 9:30, 참고 롬 1:17)로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논리에서 보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한 것”(롬 9:31)이라는 결론이 분명해진다. 결국 이스라엘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친 것이다(롬 9:32)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신 것”(롬 9:33)과 같다.

이에 더하여 바울은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의 말씀에 대해서 설명한다. 10장 5절은 레위기 18:5에서, 6-7절은 신 30:12-13에서 온 인용인데, 율법과 반대되는 믿음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참고, 갈 3:11-12) 8절은 신명기 30:14의 인용인데, 율법대신에 복음의 메시지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하여 9-11절에서 바울은 주의 깊게 초기 기독교의 신앙 고백을 사용하면서 (1) 예수는 주님이시다 (2)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진리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 물론 구원을 얻는데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갈 3:28)

이런 논리가 루터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행하려고만 하고 그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본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이 스스로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원리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시내 산의 사건 때부터 헤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생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 주시려는 의도가 있다. 이것이 율법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이다. 마침내 바울은 이 율법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의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길(롬 13:8)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행하려고만 했다고 오해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의 속뜻인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원리를 바울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제2의 종교개혁

누가 과연 악한 사단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가? 야고보서 4장 7절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 5장 9절에 “그에게 맞서라”는 의미는 “그를 대적하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9절에 “그에게 맞서라(ἀντίστητε)”는 표현을 흉내 내서 기도할 때마다 대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중에 정원의 ‘대적기도’ 1-4권이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많은 책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이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가? 연약한 인간은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베드로전서 5장 9절을 사역하면,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맞서라(ἀντίστητε)”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곧 우리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장되신 예수께 믿음으로 맡기라는 표현이다. 특히 안티스테테(ἀντίστητε)란 단어는 대적하다는 단어가 아니라 마귀의 반대편인 예수의 편에 서라는 문자적인 뜻이 있다. 문자적으로 마귀의 편에 서면 지고, 예수의 편에 서면 이긴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서 대장 예수께서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고백한다.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신 30:13)

하나님과 올바른 의의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 “무저갱”인 음부(롬 10:7)에까지 내려가신 이유는 끝이 없는 바닥인 무저갱(헬라어로는 jApolluvwn 롬 10:7)에까지 떨어진 인생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도 언급된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가 19~20절의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베드로가 ‘영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기에, ‘옥에 있는 영들’이란 사람이 아니다. ‘영들에게’란 단어에서 ‘영들’은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성서에 5번(고전 12:10; 엡 6:12; 히 12:23; 요일 4:1) 사용된다. 신약성서에서 ‘영’은 사람의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의 생명 속에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신 옥에 있는 ‘영들’이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으므로 타락하여 옥에 갇히게 된 타락한 천사들이다(에녹 1서 6-10장 참조).

예수께서는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着念)함으로 자신의 심령을 강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시편(31:5)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쉰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이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한다. 영혼을 맡겼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주님께서 영혼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똑같은 믿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며 숨졌다. 86세에 순교한 폴리캅,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그의 친구 필립 멜란히톤, 이들보다 무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의 믿음을 지키려다 화형을 당한 존 후스 등은 모두 예수와 같은 말을 하며 죽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은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그 본래의 고향인 천국으로 가는 일반적인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전제하고 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예수께서는 ‘옥에 있는 영들’, 곧 사람이 아니라,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으므로 타락하여 옥에 갇히게 된 타락한 천사들에게 가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에녹서의 전승을 이해하면 더 잘 알 수 있다. 에녹서 6장에는 ‘천사들의 탐욕’이, 7장에는 ‘천사들의 타락’이, 12-13장과 16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선포가, 18장과 21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형벌을 받는 옥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이 아니다. 루터는 면제부가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천국으로 되돌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교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사실상 에녹서의 내용으로 보아 ‘옥에 있는 영들’이란 타락한 천사로 보아야 한다. 타락한 천사는 악한 세력이다. 루터가 로마 천주교를 악한 세력으로 규정하였지만, 사실상 신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로마 천주교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타락한 천사들인 곧 사탄이요 마귀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악하고 타락한 천사들에게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기에 나오는 ‘복음’이란 단어 또한 ‘복음의 전파’란 의미가 아니라, ‘그가 전파하셨다’는 표현이기에, 그리스도께서 회개하여 영생을 주려는 구원의 목적을 가진 복음을 전파하였다기보다는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의 세력을 멸하셔서 얻게 될 영원한 승리를 전파하였다는 의미이다(벧전 4:6).

악한 영들과 권세들이 주는 고난과 90년에 얌니야에서 발흥한 랍비 유대교에 대항하면서 박해의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당시의 성도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승리의 복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상당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악한 사탄에게 억눌린 성도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도 복종하기 때문이다’(벧전 3:22). 그렇다면 제2의 종교개혁이 지닌 성격도 분명해진다. 오직 음부의 권세 잡은 악한 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개혁이다.

종종 유대인 랍비들이 개혁교회와 대화를 하기 위한 단골 메뉴로 메시아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면서,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거부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라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바울이 경계하던 대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이미 신약성서를 통하여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불순종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제2의 종교개혁은 초림하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멀지 않아 재림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을 오늘의 유대인들도 고백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IV. 복음전도자와 남은 자

바울은 유대인들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복음전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혼미한 영에 이끌려 다시 완악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1. 복음전도자들이 이루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강력하게 복음전도의 과정을 선언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28:16)는 이사야 예언을 인용한다.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으신“(롬 10:12)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곧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롬 10:12)는 사실을 노래하면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인용함으로써 믿음을 통한 의를 다시금 강조한다.(욜 2:32)

이미 구약성서에 나타난 여러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라고 반문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의 수고가 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사야의 노래를 인용한다.(사 52:7)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한 예언자들과 수많은 주의 종들의 수고를 기억하면서, 또 계속해서 믿음과 들음의 관계를 중시하고, 복음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순종한 것은 아니라고 안타까워하면서(롬 10:16)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는가”(사 53:1)라고 안타까워한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도 이 예언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롬 10:18)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른”(시 19:4) 이 분명한 말씀을 알고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마치 듣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세를 하였다.(롬 10:19)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금 모세오경(신 32:21)과 이사야(사 65:1)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야말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고 강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듣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체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일이다. 10장 14-18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가 비록 그 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이 들려졌다는 사실을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나타나며, 바울은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 경고한다. 21절의 ‘복종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일 손을 내밀고 있었다.’라는 말은 바울이 유대인 선교에서 겪은 철저한 체험적 고백이다. 이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러한 말씀들은 이미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온전히 전해졌음에도 불구하여, 이스라엘이 여전히 깨닫지 못해서 불순종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오늘날 이스라엘에게는 성경 속의 이야기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 두 가지 외에는 공통된 과거의 기억이 없으며 다른 공동체와 서로 공유할 만한 미래지향적 비전도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여 복음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2. 남은 자를 다시 찾는 제2의 종교개혁

9장과 10장을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11장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고 확신하면서,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고 강조한다. 1세기에는 복음을 듣고도 거부함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운명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면, 21세기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해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희망이 전혀 없는가?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엘리야 때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바울은 11장 2-4절에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갈멜 산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보인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이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이 두려워 광야로 피신하였을 때 절망 가운데 부르짖은 탄식이 무엇인가?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 19:10) 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인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 19: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롬 11:5)을 바울은 지금도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어리석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안에 남은 자가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신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두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사랑의 의지를 가지시고 여전히 구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5-6).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결과로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구원을 받았게 되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것으로 인식하여 모두 신앙의 길에서 떠난 것으로 간주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가운데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인 “남은 자”(롬 11:6-7)를 예비하여 두셨다고 위로하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마저도 마지막 때에 한 결 같이 우둔하여졌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 29:10, 참고 신 29:4) 이 구절에서 “심령”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이 아니라 ‘혼미한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지적은 바울이 9장을 시작하면서 성령을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에만 매달려서 복음의 의에는 무관심한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 바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혼미한 영을 따라간 잘못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혼미한 영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롬 11:9. 참고 시 69:22이하)과 흡사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을 흐리게 하사 보지 못하게 하신 것과 같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등을 항상 굽게 하셔서 펴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롬 11:10)

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엘리야의 때부터 분명함에도 불구하여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여전히 불순종한 가운데 지내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혼미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충청도 면적에 인구도 77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 안에 그것도 모자라서 점차 세속적인 이스라엘 시민이 대부분의 예루살렘에 거주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아랍인들과 뒤섞인 예루살렘 도성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과는 먼 죄악의 장망성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한 해 3만 8천명이라는 어마 어마한 한국 관광객이 성지순례를 예루살렘에 가지만, 그들도 대부분은 신앙적 이유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관광만을 하고 “여호와의 눈이 항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건성으로 성지를 다녀온다. 이스라엘이건 순례 객이건 모두 바울이 안타까워하는 대로 혼미한 영에 인도함을 받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이제 제2 종교개혁은 우리 모두가 회개를 함으로써 온전한 심령이 되어 참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위하여 놀라운 구원의 길을 예비하고 계신 것을 성령의 탄식을 통하여 깨닫고 이스라엘 복음전도에 다 같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새로운 마음과 온전한 영으로 헌신해야 한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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