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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이삭의 교훈
2017년 09월 21일 (목) 10:07:59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창세기 26장 12-25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7080 세대의 포크송 가운데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전설적인 포크듀엣 ‘해바라기’가 부른 노래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이 노래는 연인이 서로 사랑 고백하며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대는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서로에게 고백하기 좋은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족들이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더불어 사는 이웃사람들이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에서 행복을 주는 사람들을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태어난 사람입니다. 창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약속을 재삼 확인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두 차례 아브라함과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십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원래 아브람이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문의 사람들에게 할례를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 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도 그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원래 사래이던 이름을 사라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 17:19을 보면 저들이 믿기 힘든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100세와 90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삭입니다.

여기서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100세 된 아브라함이 이삭 때문에 행복해서 웃을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이 90세 된 사라가 이삭 때문에 너무 행복해서 웃을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이삭은 다른 사람을 행복해서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pixabay.com / PublicDomainPictures / mother-84628_640

실제로 그랬습니다. 창 21: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정말 약속대로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고 나은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사라는 지금까지 웃음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습니다. 나이 90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서 그 근심이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대를 잇지 못한 사람이라는 자책 역시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결혼한 뒤 그 긴 세월을 슬픔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이 정말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정말 결혼 후 그 긴 세월동안 웃음다운 웃음을 처음 웃어보았을 것입니다. 정말 행복해서 크게 웃어보았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이삭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은 태어남 그 자체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이삭 때문에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삭은 행복을 주는 사람, 웃음을 되찾게 해 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웃음을 잃어버렸던 사람이 웃음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태어남으로 웃음을 되찾게 해주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행복해서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삭의 삶에서 소중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뢰의 배려

창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삭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나귀에 번제에 쓸 나무를 싣고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틀을 걸어 제 삼일이 되는 날 모리아 산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이 때 이삭은 궁금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번제를 드리는지 어디에서 번제를 드릴 것인지... 그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러 가는데 번제물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 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이 되도록 묻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잘 계획하시고 또 잘 준비하시겠지 하며 아버지를 믿어드렸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한 뒤 아브라함은 나귀에서 번제 나무를 내려 이삭에게 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나무에 불을 붙일 불과 제물을 잡을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종과 나귀는 그곳에 두고 이삭과 둘이서 번제를 드리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이삭이 볼 때 번제를 드리기 위해 나무, 칼, 그리고 불은 준비가 됐지만 번제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던 질문을 이제야 던집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놀라운 것은 그 답을 듣고 이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를 믿고 더 이상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삭은 신뢰로 아버지를 배려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한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따끈한 탕에 들어가 기분이 좋아서 소리쳤습니다. “야 참 시원하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탕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시원하다는 말에 탕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뛰어 나오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화가 났지만 혼자서 중얼거린 것이라 뭐랄 수도 없고 해서 꾹 참았습니다.

목욕하고 집으로 오는데 배가 출출한 차에 마침 호떡집을 지나오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호떡 세 개를 샀습니다. 혼자 두 개를 먹고는 아들 생각이 나서 하나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배부르지!” 아들이 또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 먹은 놈이 배부르면 두 개 먹은 놈은 배터지겠네.”

우리네 세태를 풍자하는 유머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지간마저도 신뢰가 무너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결코 부하를 믿으면 그에게 죽는다.” 이 말이 지도자들의 처세술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는 시대입니다.

이런 불신의 시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처럼 신뢰의 배려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먼저 믿어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신뢰의 싹을 트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믿어주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끝까지 제자 공동체 안에 그대로 남겨두셨습니다. 최후의 만찬까지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믿어주시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이렇게 믿어주는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의 배려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번제 드릴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돌로 번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제물을 태울 나무를 벌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그 나무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이삭을 제물로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유대학자 요세푸스라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이 때 이삭은 나이가 25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청년으로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나이가 125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이 든 때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이삭과 몸싸움을 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번제물로 쓰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묶을 때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아버지가 자기를 칼로 죽이려 할 때도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그렇게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기가 죽을 일이라면 얼마든지 자기를 대신해서 죽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자기를 지금 번제로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번제로 드려져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만일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도 정작 이삭이 거절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삭이 도망쳐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아들 이삭이 희생해 주는 일은 더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의 희생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여호와 이레의 복도 받게 됩니다. 이삭의 희생의 배려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신문에 가슴 따뜻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고3 여고생이 아버지를 위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인천예고 3학년 한 A 양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10년 전에 B형 간염에 걸렸는데 최근 증세가 악화되어 간암이 되었고 간이식수술을 받지 않으면 올 겨울을 넘길 수 없게 되었답니다. 유일하게 정빈양만이 간이식 적합성 검사에 통과했다고 합니다. 정빈양은 그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수술을 받기로 했답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지 어린 딸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나 정빈양은 대학은 내년에 가도 되지만 아버지를 이대로 돌아가게 하실 수 없다며 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오늘 이 시대가 이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을 만큼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주님의 죽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보의 배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가뭄이 들어 블레셋 땅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부자가 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돌로 막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삭이 땅과 우물을 넘겨주고 그랄 골짜기로 옮겨왔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 우겼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즉 ‘다툼’이라고 부르고 선선히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역시 물이 나왔습니다. 그 지역사람들이 또 자기들의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즉 ‘대적함’이라고 부르고 또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또 물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이제 이삭은 르호봇에 머물며 살게 된 것입니다.

르호봇은 양보의 배려를 실천한 사람들이 사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보의 배려를 실천한 사람들에게 주신 복의 땅입니다. 이 땅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이 땅은 넓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처럼 마음도 넓습니다. 바로 이삭같은 사람들이 사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르호봇으로 초대하십니다. 아등바등하며 에섹에서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스트레스 받으며 서로 싸우는 싯나에서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보하고 배려하며 르호봇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전에 지하철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지하철에 올라탔습니다. 이 할머니를 보자마자 한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며 이 자리에 앉으시라고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할머니는 끝내 거절하면서 서서 갔습니다. 이 할머니가 여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며 얼마나 힘이 들어, 보아하니 가방도 무거운 것 같네... 나는 종일 집에서 앉아 있어서 지금은 서 있어야 해 그래야 다리에 힘도 붙지.”

여학생이 공손하게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세요?”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기도하러 교회에 가! 참 학생 내가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학생 위해서 기도해 줄게... 이름이 뭐더라 뭘 위해서 기도해 주면 좋을까?”

이내 두 사람은 마치 친 할머니와 손주처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이 지하철이야 말로 르호봇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는 그 자리를 르호봇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삭이 머물던 자리가 르호봇이었던 것처럼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있는 자리가 르호봇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삭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삶을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해서 웃을 수 있게 해주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삭처럼 다른 사람을 미소 짓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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