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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의 날, 생명보듬주일 설교문 “살아야 할 이유”
“생명의 주님 이 땅의 고통 상처 회복 하소서”
2017년 09월 08일 (금) 11:59:32 라이프호프 lifehope21@hanmail.net

[ 매년 9월 10일은 세계자살예방의 날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여전히 OECD 국가 가운데 1위다. 매일 4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라이프호프기독교자살예방센터’(대표 조성돈 교수)가 9월 10일 주일을 생명존중과 자살예방을 위한 ‘제5회 생명보둠주일’로 선포하고 ‘생명의 주님 이 땅의 고통과 상처를 회복 하소서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를 주제로 자료를 배포했다. 그 가운데 동영상과 공동기도문과 공동예배 설교문을 전재한다. / 편집자 주 ]

 

제5회 생명보듬주일 공동기도문 및 공동예배 설교문

라이프호프

[ 생명보듬주일 - 공동기도문 ]

생명의 주님! 이 땅의 고통과 상처를 회복하소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에 감사합니다.

이 생명을 은혜로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하지만, 이 땅 가운데 이 생명의 아픔과 고통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삶의 고난과 육체와 마음의 고난이 찾아옵니다.

때론,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우리의 이웃을 봅니다.

주님, 이 아픔과 고통의 시대 속에서 소망이 되어 주소서.

주님, 이 땅의 교회가 아픔을 치유하고, 어루만지게 하옵소서.

주님, 이 민족이 생명의 존귀와 사랑이 넘치게 하소서.

오늘 생명보듬주일을 통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생명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혹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의 가족이 있다면,

주님의 위로함으로 만져주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하소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생명보듬주일- 공동예배 설교문 ]

“살아야 할 이유”

김영봉 목사 /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본문 : 디모데전서 6장 7-12절

1.

9월 10일은 세계자살예방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자살예방을 위한 캠페인 및 자살로 가족, 친구를 잃은 유가족들을 위한 다양한 추모와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한국사회는 이 자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입니다. 최근에도 한국사회는 이 자살의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 ⓒ라이프호프기독교자살예방센터

수많은 청소년들이.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과 파산으로 우리의 가장들이, 자녀들의 무관심으로 수많은 독거 어르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심각한 실패와 좌절을 겪다보면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 느낌은 한 순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터널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터널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 터널을 지나는 것은 순간인데, 불행히도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불행한 선택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습니다. 저는 자살로 인해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을 가까이에서 돌본 경험이 있어서 잘 압니다. 그 가족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는데 여러 해가 필요했고, 많은 방황과 눈물과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당사자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고통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한 것인데, 실은 그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전가되고 나면 본인이 짊어져야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분의 아들이 작년에 결혼을 한다 해서 만났습니다. 지금의 신부를 만나기 전에 여러 번의 파경을 거쳤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함께 할 아내에게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낀 그는 프로포즈 단계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는데, 그 때마다 외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내를 만났을 때는 첫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지요. “나 이런 사람인데, 그래도 괜찮으면 사귀어 봅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여인이 손을 잡아 주면서 “그래요? 많이 힘들었겠네요.”라고 위로해 주더랍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며느리를 보게 된 그 부인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에 대한 분노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문득문득 생각이 나면 자기 혼자 좋자고 모든 짐을 자신에게 맡기고 떠난 남편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고 했습니다.

2.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는 심각합니다. ‘OECD 국가’라고 하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에 이르러 국민 대다수가 먹고 살만한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그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 1위가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 원인 4위가 자살입니다. 교통사고는 그 다음입니다. 10대, 20대 그리고 30대의 경우는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지난 몇 년 동안 70대와 80대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울증 혹은 그와 유사한 심리 질환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우울증을 ‘중년에 찾아오는 홍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20대와 10대에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약물 중에서 소비가 가장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 것이 항우울제입니다.

몇 년째 우울증과 씨름해 온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아주 깊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우울증이나 다른 마음의 질병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거룩한 자취를 남긴 믿음의 위인들 중에 우울증을 겪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년의 고비에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우울증에 빠져 있다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매우 매력적인 대안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했습니다.

그런 심리 질환을 겪지 않는 사람들도 때로 불행한 선택을 합니다. 도무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판단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절망감이 가장 큰 원인이지요. 또한 수치심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얼굴을 들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려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려놓고 나면 깃털처럼 자유로와집니다. 목숨을 걸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려놓기 전에는 그것이 전부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선택을 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은 “옛 사람과 그 행실”(골 3:9)을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에 장사 지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은 옛 사람의 못된 행실 중 하나입니다. 자존심의 문제가 마음을 흔들 때마다 “너, 죽었잖아!”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절망감과 수치감에 눌려도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나 다른 마음의 질병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경우 혹은 인생의 위기에서 절망감과 수치감에 짓눌릴 때 꼭 기억할 진리가 있습니다.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 반대로 가르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 노래 제목이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담은, 공감 가는 노랫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진리입니다. 내 인생 혹은 내 생명은 내 것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3.

첫째,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딤전 6:13)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육신적인 생명 즉 목숨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포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욥처럼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어떤 자격도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기독교 전통에서 자살은 죄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이 가장 중한 죄라면,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거기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믿음이 믿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해쳤기 때문이요 죄를 지은 다음에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으니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많은 사람들을 자살의 위기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40년간 믿어 온 남편 에게 배신당한 어느 자매께서 그러십니다. “여러 번 죽으려고 했는데,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에 참곤 했습니다. 그거 아니었으면 저는 벌써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자매님과 같은 이유로 위기의 터널을 지나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믿음은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받는 심적 고통은 때로 아주 심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살로 잃었다는 것도 큰 아픔인데, 그 사람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게다가,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자살로 죽은 사람에 대해 정죄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말과 행동으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은 거듭 상처를 받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70년에 청계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다가 분신한 고 전태일 열사를 아시지요? 한국 현대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자신도 신앙인이었고, 그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례 준비 위원들이 당시 개신교에서 가장 높이 그리고 널리 존경 받으시던 목사님에게 장례식을 집전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자살한 죄인을 위해 예배드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이 그 목사님의 오점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교리에만 붙들리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다. 교리로서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시신 앞에서 “당신은 지옥에 갔소.”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앞의 말은 “자살이 그렇게 심한 죄다.”라는 경고입니다. 하지만 뒤의 말은 하나님의 자리를 범하는 잘못입니다. 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구원 여부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결론을 내서는 안 됩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떤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고인을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고 기도해 주어야 하며, 그 일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품어 주어야 합니다. 교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살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교리를 따라 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모든 교리를 내려놓고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그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내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나의 생명이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4.

둘째,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 생명은 또한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진리이기 이전에 과학적인 진실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다른 생명에게서 도움을 받고 다른 생명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 안에서만 생명은 존재합니다. 서로가 타자를 위해 존재함으로 인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이 생명의 원리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잘 보입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성의 질병을 치유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향했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에서 보람과 기쁨을 맛봅니다. 이 원리가 가정의 기초입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이 생명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도 이 원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생명 원리를 무시하거나 역행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혼자만 행복해지 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으로 인해 유명해진 경구가 있습니다. “No man is an island.” 섬처럼 혼자 존재할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서로 의존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만의 행복은 없다”고도 말합니다. “혼자만의 행복”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전파하는 거짓 복음입니다. 내가 의식하든 못하든 나는 많은 이들의 덕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알든 모르든 나로 인해 덕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받고 또한 사랑함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생각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입고 살고 있는지’가 하나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인지’가 다른 하나입니다. 앞의 사실을 기억한다면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고, 뒤의 사실을 기억한다면 책임감을 느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은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내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두 가지만 기억한다면 우리 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전, 엘리 비젤의 <Night>('흑야')이라는 소설을 다시 읽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읽은 소설인데 이 즈음에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 소설은 엘리 비젤이 1944년 3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나치 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15살의 소년 엘리는 아버지와 함께 헝가리에서 수용소 생활을 시작했다가 나중에 아우슈비츠에 이송됩니다. 헝가리에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질병과 굶주림과 동상과 폭행으로 인해 10%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엘리와 그 아버지가 생존자 중에 있었습니다.

13개월 동안의 수용소 생활 중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싶은 순간이 거듭 거듭 닥쳐왔지만,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견딥니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해방되기 얼마 전에 숨을 거둡니다. 그 때 아들 엘리는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거대한 공허감을 느낍니다. 아버지가 그 동안 자신의 생명줄을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아들 또한 아버지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엘리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 경험을 합니다. 아마 수용소 생활이 조금만 더 길어졌더라면 엘리 비젤도 끝내 생명의 끈을 놓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이요 인생의 신비입니다. 나의 생명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사랑 받고 사랑하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은 자신과 이웃에게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반면에 사랑 받고 사랑하는 인생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위기의 터널에 갇혀 있다 해도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5.

오늘 우리는 디모데전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6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를 제대로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 6:9-10).

여기서 사도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닙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서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과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혹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것입니다. 부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사랑하게 되어 있는 인생을 돈 버는 것에 오용하는 것입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유명세를 목적 삼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목적 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공을 목적 삼는 것도 그렇고,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순간, 우리는 불행을 향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분투하여 성공했다 싶은 단계에 오르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순간 더 깊은 공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공허감은 사랑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다른 무엇으로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반면, 더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패배자가 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을 더 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뭔가 성취하는 것을 살아야 할 이유로 착각하는 것은 바울 시대에도 있었던 사회적 질병이었습니다. 그 질병이 오늘 한국에서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고 고질병처럼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지적한 다음 사도 바울은 살아야 할 진정한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 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딤전 6:11-12).

11절의 “이 악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웃의 삶까지 파괴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삶의 방식으로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을 보면 내가 뭔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중에도 성취와 성공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번영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목적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회복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유혹은 언제나 강력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라고 경고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라고 권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삶을 포기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에 목적을 두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가 장애물이 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도, 영적인 성장도, 교회에 대한 의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성취할 때까지 유보시킵니다. 성취하고 나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 후에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제대로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생은 사랑 받고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모든 것은 사랑 받고 사랑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생명을 포기 하고 싶을 정도의 위기를 만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위기를 만나도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생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 에도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거룩한 은혜이며 또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 중에 자폐증으로 인한 장애가 아주 심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계십니다. 심방하는 자리에서 그 자매님이 그러십니다. “언젠가 우리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들에게 분명히 무엇인가 쓸모 있는 재능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찾아 주고 싶어요.”

그 말씀에 제가 외람된 대답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쓸모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무엇인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할 수만 있으면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위로의 차원에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에 관한 진리입니다. 불신앙적인 세상은 생명을 도구로 바꾸어 놓고 쓸모없는 생명은 폐기 처분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할 수만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또한 살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취를 목적으로 두고 자신과 이웃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가고 있는 이 사회에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입니다. 생명을 도구화시켜 결국 모두의 생명을 값싸게 만드는 세상의 경향에 맞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진 거룩한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부터 생명에 대한 거룩한 존중심과 책임감을 다 지십니다. 그리고 사랑 받고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 사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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