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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자유
2017년 05월 31일 (수) 12:27:02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골로새서 2장 20-23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성전건축을 마무리할 때 참 많은 고민과 기도를 했습니다. 특히 교회 외부를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외부는 우리 교인과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지나다니며 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단지 교회 이름만 광고판처럼 달아놓는 것보다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교회 앞면은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것이기 때문에 글보다는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손이 삶에 지친 사람의 손을 잡아주시는 부조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글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네 손을 잡아주리라.”는 이사야 42:6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교회 뒷면은 숭실대학교 학생들이 볼 것이기 학생들의 마음에 무엇인가 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숭실대 운동장에 앉아 여러 날 기도하며 말씀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요 8:32 말씀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대학생들은 진리와 씨름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숭실대의 모토가 ‘진리와 봉사’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친근하게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메시지를 써서 달았습니다.

숭실대의 여러분들이 이 메시지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강의실에서 이 메시지가 또렷하게 보인다면서 강의 도중에 이 말씀을 설명하곤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수님은 학생들이 이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왜 자유가 필요합니까?” “그러면 기독교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만 믿는 종교입니까?” 저는 그 말씀을 전해 들으면서 교회 뒷면을 성경말씀으로 마무리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질문한 내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일까요? 요 8:3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따라 나선 유대인입니다.

당시 저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요? 겉사람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처럼 구금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북한 동포들처럼 거주나 여행의 자유가 제한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장애인들이나 중병에 고통을 겪는 분들처럼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분들은 겉으로 볼 때 전혀 자유를 속박당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겉으로 볼 때 자유로워 보여도 그 속은 무엇인가에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은 겉사람은 자유를 누리고 있을지 몰라도 속사람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겉사람이 자유로울지 몰라도 속사람은 모두가 무엇엔가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필요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때 자유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저것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고 난 뒤 누리며 살아야 할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죄로부터의 자유

요 8:33을 보면 예수님께로부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왜 우리가 자유로운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학생들이 던진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8:34에서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유대인들이 겉사람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 속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겨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자신의 예를 들어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롬 7: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은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렸듯이 자신이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 7:19-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자신에게는 악을 행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얽매여 자기는 죄를 지을 자유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겉사람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속사람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자유롭게 실행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마음으로 악한 일인 줄 알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반복해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속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죄의 사슬에 결박당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들고 우리를 죄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결박하고 있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속사람이 어떻게 죄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요 8:3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죄의 권세를 뿌리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지었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죄의 잔재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함으로 털어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서 죄와 싸워 이기십시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죄 이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속사람을 얽어매는 것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참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습관으로부터의 자유

우선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한 마디로 초등학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속사람을 얽어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등학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글자 그대로 초보적인 학문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그야말로 초보적인 것들입니다. 글자를 배우고 읽고 쓰는 것을 배웁니다. 숫자의 개념을 배우고 초보적인 계산법을 배웁니다. 음악, 미술, 체육과 같은 예체능의 초보를 배웁니다. 그런데 이것만 배워서는 직업인이나 전문인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고등교육과 전문교육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등학문이라는 말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 4:3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영적으로 미숙했을 때 유대교 율법을 따라 살았고, 천사숭배 사상을 따라 살았고, 심지어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 4:4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 우리가 이런 초등학문을 벗어버리고 참된 영적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이란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 나름대로 믿고 따르던 것들을 말합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기 전에 제사 지내며 조상 숭배하던 것을 말합니다. 또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신봉하던 무신론적 지식을 말합니다. 또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 믿기 전에 가문의 전통을 따라 행하던 미신적인 풍습일 수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 ⓒpixabay.com / Oldiefan / bird-984559_640

사람이 무엇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일단 죽으면 그 무엇에 대해서도 반응을 보이지 못합니다. 죽은 시신은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살아생전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곁에서 손을 잡아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즐겨 먹던 음식을 가져다 줘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그 어떤 자극이나 유혹 그리고 도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영적으로 무지해서 습관처럼 해오던 행동들이 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든지, 타종교의 우상숭배에 참여했다든지, 세상 철학이나 무신론적 활동에 가담했다든지... 그러나 이제 예수 믿고 난 뒤에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 산 자처럼 반응을 했다면 이제는 마치 죽은 시신처럼 이런 것들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어 온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눈에 이런 것들이 어떻게 비칠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이런 일들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세태 풍조로부터의 자유

오늘 본문 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당시 골로새 지역에 금욕주의가 유행처럼 퍼져갔습니다. 이 금욕주의는 물질세계에 속한 육신이 이성적인 영혼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월한 영혼이 자신의 삶을 주도하려면 열등한 영혼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21절에 나오듯이 붙잡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맛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 만지지도 않으려고 힘썼습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성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음식도 철저하게 가려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풍조가 교회 안으로도 밀려들어왔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위기가 만연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금욕주의가 참된 경건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풍조를 경계했습니다. 23절에서 이런 경건은 자의적 즉 꾸며낸 것이고 거짓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리고 롬 14:17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올바른 경건을 지켜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교회에 우려스러운 풍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쉽게 교회를 옮기는 풍조입니다. 최근 <한국기독공보> 보도를 보면 지난 25년 간 교회를 옮긴 사람이 5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 천만 중에 오백만 이상이 지난 25년 동안 한 번 이상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25년 한국사회는 요동치듯 변화했습니다. 특히 주거상황이 급격하게 아파트 중심으로 변하면서 신도시 개발과 구도시 재개발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전 국민의 2/3가 한 차례 이상 이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생활기반이 급격하게 변화되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변화의 추세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존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니 가까운 지역의 교회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 급격하게 식어져 갔습니다. 내 교회라는 생각, 내가 헌신해야 할 교회라는 생각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교회는 내가 선택해서 가도 되는 곳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헌신과 충성보다는 교회에서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과거에 없던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충성된 일꾼을 찾기가 힘이 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 출석 빈도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주일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현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등록하지 않고 조용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영적인 힘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 선교하는 일, 세상을 섬기는 일, 사회에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과거처럼 수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풍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풍조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 때문에 이주도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기 이전의 옛 습관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세태풍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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