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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교 교리 분석 ] 재림교 구원론을 바로 세운다 ④
재림교의 ‘품성변화’… 천국 문을 따는 열쇠 아냐
2017년 04월 13일 (목) 14:06:48 곽정환 목사 hosanna6408@hanmail.net

곽정환 목사

소갈머리 없는 신앙은 정녕 망신살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품성 변화는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품성변화는 지고한 위상이고 이상이지 천국 문을 따는 열쇠는 아니다. 아무리 탁월한 성경적 덕목이라도 구원의 자격과 연관시키면 성화(율법)주의다.

신앙생활은 구원 받고 하는 것이지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는 햇빛 아닌 달빛

구원 받은 후 사람이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완벽해지지 못한다. 미처 죄인 줄 모르고 짓는 죄도 간혹 있겠지만 대개는 빤히 알고도 지긋이 짓는다. 옛 본성(罪性)과 연약함으로 인헤 크고 작게 행해지는 범죄를 피할 수 없다(롬 7:24, 롬8:1-2). (그러니 계속 짓자 거나 죄는 아무래도 문제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인간의 이런 실존을 몰랐을까?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를 못(안)짓는다는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서신서들은 거의 전반부는 교리에 대하여 말하고 후반부는 성도의 구별된 삶에 대하여 언급했다. 후반부 윤리 제고를 언급한 자체가 인간의 비틀거림(죄성)을 전제한 이야기다.

신행일치! 언행일치! 이 지고의 가르침에 감히 부정할 사람 없으며, 떳떳할 사람 감히 없다. 정직을 외치면서도 정직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떤 종교도 자비와 선행의 다다익선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도 사랑과 순종을 강조하지만 다른 종교와의 극명한 차이점은 사람의 행함에 구원을 위한 ()’값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義)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필요 충분한 온전한 의다. 이 의(義)에 무엇인가 더해야 한다면 십자가로 부족하다 말이고 무엇인가 뺄 것이 있다면 십자가에 흠이 있다는 말인데 그리스도의 의는 그렇지 않는 완벽한 의이다.

그리스도 의(義)만이 구원의 광체이다. 온 몸을 불사르고 내어주는 순교라 할지라도 인간의 선행은 반사체의 빛일 뿐이다. 광체와 반사체는 다르다. 아무리 밝아도 달은 달일 뿐 달 자체에서 햇빛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의를 찾는 것은 달빛에서 자외선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 64:6, 개역)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란 누군가? 평생의 선행으로 의(공로)가 어찌나 넘치는지 본인을 구원하고도 오히려 남아 타인의 부족분까지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의 사람이란 것이다. 죄인이 구세주 노릇하는 것이며 달빛을 햇빛이라고 우기는 처사다. 율법주의다.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찬탈하는 개념이다.
 

야고보서의 “행함 없는 믿음”이 주는 딜레마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사람의 행함을 그리스도의 공로와 등가(等價) 개념의 의로 주장하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믿음)와 인간의 의(행함)가 합하여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주장을 한다고 봐야 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상충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재림교의 구원론은 ‘포장은 믿음인데 내용물은 행함 일색’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오류에 빠진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표현에서 죽었다는 것을 무(無)와 부정(否定)으로 보아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자연히 구원이란 “산 믿음”으로 받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 후 구원받는 “산 믿음”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다 곧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결정한다. 그럼 ‘행함’이란 무엇인가? 이는 계명, 순종, 헌신, 복종, 역동적인 활동(役事)으로서 “이런 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논리적이고 맞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리의 전개는 일견 그럴듯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성경의 전체적인 구원론과 치명적으로 다르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내가 순종하고 애써 헌신하고 힘써 복종하고 마침내 역사를 이뤄야 가능한 것이 구원이라면, 이것을 두고 어찌 선물이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순종하고 얼마나 헌신하고 언제까지 복종해야 구원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노력해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순종, 헌신, 복종이 십계명 지키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생각 있는 신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즉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현실에서 “행함 있는 믿음” 즉 “산 믿음”의 강조를 부정할 수도 없고 다른 한편으론 “산 믿음으로 구원” 논리를 인정하자니 자신의 헌신과 복종을 돌아보면 구원의 커트라인(?)에 얼씬도 못하는 수준 같다는 자괴감이다. 더구나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것을 어찌 은혜라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 구원을 주창(主唱)한 루터는 야고보서가 자신과 구원론과 상충된다 여기고 어찌하여 이런 책이 성경에 들어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행함” 이해를 위한 믿음의 두 개념

야고보는 파격적으로 강하게 행함을 강조한다. 이것을 야고보가 [믿음 플러스 행함] 구원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바울과 충돌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행함의 본질 알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렇게 모색해 본다. 아래 명제를 생각해 보자.

①살아야 움직인다 !        ②움직여야 산다 !

두 명제 안에 동일하게 산다(live)는 말이 나온다. 둘 중 어느 것이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는가? 상황만 고려하면 둘 다 맞고 상황을 뒤집으면 둘 다 틀리다.

①번은 응급실내지 영안실 상황이고 ②번은 운동장이나 등산로 상황이다. ①번의 live는 alive의 의미로서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순간이고 ②번의 live는 더 건강하게 사느냐 골골대며 사느냐의 의미다.

영안실의 죽은 사람 붙들고 아무리 흔들어도(움직여도) 못 산다. 반대로 땀 흘리며 열심히 달리는 사람에게 “당신은 살아야 움직인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대하여도 우리는 두 개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죄와 허물로 죽어(엡 2:1; 마 8:22) 시체 같은 자, 영안실(냉동실)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1) 선물(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즉 살게 하는 믿음(생명(生命)이 있고 다름은 생명을 얻어 살아난 자, 감각 있는 자가 되었으니 2) 마침내 반응하고 움직이는 믿음(생태(生態)이 있다.

똑같은 믿음이란 단어를 쓰지만 선물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믿음, 생명으로서의 믿음과 반응하고 왕성하게 움직이는 능동적인 믿음구분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찬미 가사 속에 3절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것은 분명히 믿음 개념 이다. 믿고 보니 아는 믿음이다. 아래의 유명한 성구의 믿음은 전형적인 믿음 이다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나 아래 믿음은 분명히 믿음개념이다. 시체에게 진보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빌 1:25, 개정)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살전 1:3, 개역)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막 4:40, 개정)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믿음가 없을 리가 없다. 여기의 믿음은 믿음를 말한다. 믿음, 믿음 구분이 다소 인위적으로 보일지라도 성경상 개념 구분은 선명하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정의와 함께 기라성 같은 구약 영웅들의 믿음 행적들이 나열되는 히브리서 11장에서의 믿음은 모두 믿음 개념이다. 즉 구원 받은 자들의 고급하고 장렬한 수준의 믿음 행전이지 구원 받기위한 믿음 행전이 아니다.


율법주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믿음Ⓑ를 혼돈하고 바꿔 놓는 처사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하면 지독한 율법주의주장이고 불가능한 말이다. 순종 사랑하는 믿음, 헌신 복종 하는 믿음, 즉 “산 믿음”은 구원 받은 자들의 수준을 말해 주는 믿음개념이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다.

어떤 장로님의 큰 사랑과 헌신으로 아프리카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 큰 믿음을 소유한 분이라고 한다. 이 때의 믿음은 믿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거나 이런류의 믿음을 죽~ 유지해야 구원이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 성화주의, 율법주의이다.


야고보서의 상황

필자는 서신서 대부분이 두 부분, 전반부 교리, 후반후 윤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즉 전반부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후반부는 구원받는 자에게 필요한 믿음, 신자에게 당연히 요구 받고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믿음에 대해 설명하는데 야고보서는 전반부가 생략되고 곧바로 후반부만 있는 편지서이다.

야고보서는 죄론, 십자가, 대속 이야기가 없다. 곧바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부분을 언급한다. 신자가 된 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행함 있는 믿음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하는 것이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즉 바울이 불신자에게 말하는 로마서 3-4장 같은 영안실 상황이 아니고, 야고보서는 이미 신자들이 된 자들 성장과 성숙을 매질하는 체력장 상황이란 의미다.

그리하여 야고보서의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의미는 행함 있는 믿음의 필요성을 세게 강조한 표현이지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믿음를 말하고 있지 믿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섞이지 않는 믿음, 십자가의 공로만이 근거가 되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행함(위) 없는 믿음”로 구원 받는다. 살리심과 중생은 오직 은혜다. 그리고 그 후 살아났으니 점점 성장하여 믿음풍성해 진다. 야고보는 행함 있는 믿음로 구원받으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받은 공동체에 믿음의 부재를 통렬하게 꾸짖으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배고픈 형제가 있다면 옆에서 말로만 말고 정말 먹을 것 주라는 것이 구원의 의가 될 수는 없다.

재림교에서는 구원 얻기는 쉬운데 유지가 어렵다들고 하는데 이 말은 율법주의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유지의 책임이 인간에게 다분히 있다는 의미이고 도중에 그 유지(순종, 헌신, 복종)를 실패하면 자격이 말소된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믿음를 대치하는 것이다. 굳이 말하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데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읽어도 어지러운 재림교의 <믿음과 행함>은 범벅이다.

아래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책에서 화잇이 언급한 것들의 굵은 흐름을 채취한 것인데 믿음ⒶⒷ의 개념을 가지고 살피면 재림교가 얼마나 율법적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개념이 없어서 혼동한 것인지 일부러 섞어 비볐는지 혼란스러워 독자들이 믿음의 선물 개념이 헷갈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교계에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은 아무것도 아니며, 믿음만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면서도 믿음에 관해서는 많이 언급한다. 그러나 믿음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믿음, 47)

전술한대로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영웅들의 눈부신 업적들 믿음의 활약상의 장으로서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다. 그런데 화잇은 은혜와 선물로 얻는 믿음와 혼돈하여 히브리서 11장 같은 불굴의 노력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함으로서 오류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구원은 불굴의 노력으로 얻지 않는다. 오직 믿음만의 구원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죄의 용서는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 생명의 면류관은 끝까지 충성한 자의 상급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를 통하여 진보함으로써 은혜 안에서 자라날 것이다. 하나님의 날에 흠 없이 나타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점없이 우리 자신을 보존하여야 한다. 믿음과 행함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그것들은 승리의 사업에 조화를 이루어 활동한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것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행함은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효력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불완전한 노력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만드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정결케하는 믿음이다. 분노와 의심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손을 드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지혜롭게 걸어갈 것이다.”(믿음, 48-49)

“행함은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효력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이다.”라고 가끔은 옳은 애기를 하면서도 행함을 믿음과 손을 맞잡는다면서 등가의 위치로 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불신자의 행동이니 “죽은 것”이 맞다. 그러나 “(내)행함이 없는 (예수)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행함 부재 자체로 멸망 받지 않는다. 애시당초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공로)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행함 없는 믿음을 두고 죽은 것”이라는 것은 행함 있는 믿음의 필요성을 말한 것으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는 것과 비슷한 어법으로 효용성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은 우리를 균형지게 유지시켜 주며, 그리스도인의 품성 완성의 사업에서 우리를 성공하게 해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양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도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했다. 동일한 법칙이 우리의 영적 양식에도 적용된다. 영생의 떡을 원하는 자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하라.”(믿음, 49)

아주 노골적인 행위 구원론 문단이다. 영생의 떡을 원하는 자는 노력하라! 믿음과 행함으로 품성을 완성해야 천국에 입성한다는 강조다. 믿음믿음를 대치하는 구절이다. 행함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천국 입성의 의는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산상보훈)을 잘못 해석한 결과다. 이런 주장하는 자에게 묻고 싶다. 얼마나 계명을 잘 순종했기에 율법 앞에 그리 당당하냐고? 믿음과 행함을 동반 강조하면 균형이 남지 않고 행함만 남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도와 노력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로 받으시고 그분 자신의 거룩한 공로로 부족을 채워 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행함에 관하여 더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이하고, 편안하고, 고생 없는 신앙 생애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다.”(믿음, 50)

구원받기 위해 계명 순종 등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부족하면 그 차액분에 대하여 “그분 자신의 공로로 부족을 채워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7:3제나 6:4제 제휴 구원론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고 말한다.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하여는 그의 믿음이 마음의 모든 애정과 충동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 또한 믿음 자체가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순종에 의해서이다.”(믿음, 100)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하여는 그의 믿음이 마음의 모든 애정과 충동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위치는 성철 스님도 이르지 못한 경지 아닌가? “믿음 자체가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순종에 의해서”라고 하니 과연 재림교인 중 누가 얼마나 순종하여 완전한 믿음에 이르러 구원을 받겠는가?


맺으며

재림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분석하면 그 믿음이란 순종이고 헌신이고 계명 순종이다. 즉 포장은 믿음인데 내용물은 행함 일색이다. 목록들이 종교적 덕목이니까 뭐가 어때서? 하지만 여기가 바로 속는 지점이다.

소갈머리 없는 신앙은 정녕 망신살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품성 변화는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품성변화는 신자의 위상이고 이상이지 천국 문을 따는 열쇠는 아니다. 아무리 탁월한 성경적 덕목이라도 구원의 자격과 연관시키면 성화(율법)주의인데 예언의 신 일부는 이 덫에 매여 있음을 증명한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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