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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십자가의 역설
2017년 04월 12일 (수) 13:53:34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역설(逆說)이라는 화법이 있습니다.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역설이 수사학이나 논리학에서 중요한 도구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때 역설은 표면적으로는 말이 안 되고 또 모순 같아 보이지만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이면을 들여다보면 진리를 담고 있는 진술을 말합니다.

제프 딕스라는 사람이 쓴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이 역설의 좋은 예입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해 졌다.
병원과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 안에는 이런 역설이 가득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역설의 달인이십니다. 예를 들어 눅 9:24을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또한 눅 14:11을 보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상식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고 상식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그 안에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가 그 자체로 역설입니다.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십자가의 도가 상식적이지 않고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내포하고 있는 역설은 어떤 것일까요?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일까요?


죽음과 삶의 역설

십자가는 분명히 죽음의 상징입니다. 고대에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는 고대 아프리카, 애굽, 바사, 헬라 등에서 행해지던 십자가 처형 방법을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특히 노예나 반란자들 그리고 극악무도한 강도들을 사형시킬 때 이 십자가 처형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병사들이 집행했습니다. 우선 십자가형이 판결나면 채찍질이나 매질을 가합니다. 일단 버틸 의욕을 꺾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게 합니다. 그리고 처형장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못 박고 난 후 높이 세웁니다.

이 때 사람들이 이 처형 장면을 지켜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죄수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어떤 경우는 삼일씩이나 견디는 죄수도 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할 경우 자비를 베푼다고 다리를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질식사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일단 죄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나면 연고자가 있는 경우 시신을 가져가 장사지내게 해 줍니다. 그러나 연고자가 없는 경우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서 독수리 밥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십자가는 사형 도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역설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 ⓒpixabay.com / geralt / cross-1448946_640

창 3장을 보면 인간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서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있던 생명의 나무에서 인간의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죽음의 나무인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새 생명이 시작되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의를 이루시고 그 결과 새 생명이 저 십자가 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요 6:53-55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께서 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을 때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을 때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갈 2: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자신의 새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연약하여 죄에 시달리던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사람이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구원의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고 계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능력 있는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저주와 자랑의 역설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에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 말씀은 당시 일반인들이 십자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신 21:2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나무에 달려 죽는 자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저주스러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끔찍하게 싫어할 수밖에요.

다음으로 이방인들은 미련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장 천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십자가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연결시켜 말하는 것을 저들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로마인들은 십자가가 너무도 저주스러워서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입에 담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헌을 보면 십자가라는 뜻의 “크룩스”라는 말을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언급 자체를 피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형을 집행하라는 판결을 내릴 때도 십자가형이라는 문구를 직접 말하지 않고 “나무에 달아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놀라운 역설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 달린 후 십자가를 자랑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주 안에 자랑의 꽃을 피게 하셨던 것입니다.

갈 6:14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참 많던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학벌로도 당대 최고 명문 출신입니다. 율법적으로도 바리새인이요 혈통적으로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박해도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열매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이 맺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그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분이 모처럼 동창회에 나갔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자랑거리들이 터져 나옵니다.

누구는 남편 자랑, 누구는 자식 자랑, 누구는 집 자랑, 누구는 여행 자랑, 누구는 피부자랑, 누구는 몸매자랑... 그런데 이 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묻습니다. “너는 뭐 없어?” “응 조금 특별해서 말하기가 그러네...” 친구들이 궁금해서 다그칩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이 분이 드디어 입을 엽니다. “내 자랑거리는 한 가지 뿐 이야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듣고 있던 친구들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조용해 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이전에 세상 것이 소중해 보여서 그것을 얻고자 힘쓰다 얻은 후 그것을 자랑삼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만난 후 정말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바로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분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자랑삼아 살게 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절망과 희망 역설

십자가는 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일단 십자가형이 결정되고 나면 죄수들은 모든 희망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동안 저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듭니다. 죄수들뿐이 아닙니다. 그 가족들, 친지들 모두 십자가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고하시자 저들은 질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다른 말씀은 모두 순종했습니다. 한 번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로 막고 나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저들이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신 것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보인 반응이 마 16:22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마 17:23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제자들이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절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것도 아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자 저들이 크게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고 따라왔는데 십자가에 달리시면 자기들에게는 절망 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설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의 희망의 싹을 틔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편에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한 편 죄수가 곁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눅 23:42을 보면 그 죄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죄수는 십자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 죄수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희망이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절망의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편 죄수가 절망의 자리이지만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절망의 자리여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이 때 주님께서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편 죄수가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을 믿었을 때 주님께서는 자신을 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전에 급한 수술 환자를 위해 기도해 드리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해 드리고 수술장 앞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장 앞에 성경구절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바로 사 41:10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알고 보니 수술장 천장에도 이 말씀이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는 환자 입장에서 보면 자칫 이문을 다시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불안에 떱니다. 때로는 희망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수술에 함께 참여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때의 감동을 마음에 새기고 수술장에 들어가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도무지 희망을 가지기 힘든 상황을 겪고 계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그리고 다시 희망을 굳게 가지십시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주간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 그리고 절망의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역설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제 이 한 주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십자가에 나타난 역설의 진리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죽음 속에서 삶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십자가의 역설, 저주 가운데서도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시는 십자가의 역설, 그리고 절망의 깊음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 주시는 십자가의 역설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십자가를 사랑하시고 십자가 신앙 가운데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힘차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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