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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중 ]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
히브리어 본문에 기초한 묵상과 주석이 함께 어우러져
2017년 04월 10일 (월) 12:06:59 엄무환 목사 cnf0691@amennews.com

【 <교회와신앙> : 엄무환 목사 】

“인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앞으로 나가는 방주다.
방향 또한 그러하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홍수는 끝이 나고,
인생은 아라랏 산에 도착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방주 속에 들어있음을 알고,
바깥에서 나를 움직이시는 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생이 달라진다.“

-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 중

김세권 목사의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가 목회자와 성도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유는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거나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체계로 성경을 해석하는 등 전통적으로 성경을 읽던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성경 읽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는 히브리어 원문과 더불어, 후기 유대주의의 산물인 탈무드와 미드라쉬의 성경 이해, 초기 교회의 성경해석을 함께 놓고 저자의 삶의 자리에서 묵상한 창세기 해설집으로,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의 방식과 근대 이전에 시도해오던 문자적 읽기의 방식에 주석적 정보를 더했으며, 수천 년 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화, 그리고 유대교 랍비들의 전통과 함께 성경을 보면서, 숨겨져 있던 보화들을 담았기 때문이다.

   
▲ 문화선교연구원 ‘크리쿰북스’가 출판한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

안타깝게도 구약학계의 주석서나 학술서가 학문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있으나 목회현장에서 선포되어야 할 설교와 좁혀지기에 어려운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지점을 인식하고 김세권 교수는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로 주석집과 설교집의 장점을 두루 갖춘 새로운 장르를 제안한다. 학술서나 주석집과 같은 전문서라 하기에도, 설교집이라 하기에도 적절치 않은 새로운 장르의 이 책의 성격을 굳이 말하라면, 주석집과 설교집의 중간 지점으로 잡는 것이 적합하다.


스스로 말씀 묵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부딪혀오면, 영과 혼을 찔러 쪼갤 뿐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해 삶의 근본 지형부터 흔들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안에 자신의 신념과 신앙체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내가복음’을 쓰는 이들이 만연하다.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는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인들의 전통적인 성경 읽는 방식을 흔들어 본문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을 치도록 자극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성경 본문과 삶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그로 인해 강단이 보다 풍성해지며 신앙인들의 삶이 흔들려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이해,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한 해석 등이 신앙인들의 지적 갈망을 충족시키고, 저자의 삶에서 우러난 신학적 통찰이 우리의 영을 풍요롭게 한다. 책을 읽다보면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지만, 창세기를 서사와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내러티브로 풀고, 신춘문예 입선 경력과 다년간의 이민목회 경험으로 다져진 저자의 쉽고 명쾌한 문체 덕분에 히브리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거나 신학 비전공자라도 무리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미국 댈러스에서 조이풀 한인교회를 개척, 목회 재미에 빠져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의 저자인 김세권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와 신대원, 신학석사(구약학)를 마치고 미국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 – Jewish Institute of Religion)에서 해석사(History of Interpretation)를 공부했다. 거기서 후기 유대주의의 산물인 탈무드(Talmud)와 미드라쉬(Midrash)의 성서해석과 초기 기독교의 것을 비교하는 연구를 했다. 이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 저자 김세권 목사

글쓰기를 좋아한 김 목사는 1996년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기도 했다.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지만 지금은 치열한 신앙적 고민 끝에 미국 댈러스에 이민교회 조이풀 한인교회를 개척해 교인들과 함께 목회 재미에 빠져 있다.

그는 번영주의와 성장주의를 벗어나서 복음의 본질과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어 한다. 땅을 사고, 건물을 세우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목회를 벗어나, 선교적인 삶을 실천하고 말씀을 기준으로 살면서 기쁨을 체험하는 공동체를 세우려고 한다.

모든 교인이 참여해서 예배 기도를 돌아가며 맡고, 성경 봉독과 찬양도 당연히 평신도의 몫이다.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니 사역을 위한 재정이 넉넉해서 해야 할 일은 다 한다.

김 목사는 새로운 신앙적 체험에 교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덩달아 기쁘게 살고 있다. 그의 소원은 조이풀 한인교회가 이민교회의 강소교회 모델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들이 많아지면, 기독교가 어쩌면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며 산다.


장신대 임성빈 총장 “설교자와 성도 모두에게 추천”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에 대한 세간의 평은 어떠할까. 추천의 글들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는 “이 책은 히브리어 원어와 함께 풀어낸 저자의 신학적 사색이다. 해학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이야기로 채웠다.”고 평(評)했다.

서정운 장신대 명예총장은 “지금까지 읽은 창세기에 관한 책 중에 가장 재미있다. 중요한 주제들을 촘촘한 문체로 정연하고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고 평했으며, 장신대 임성빈 총장도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흔든다는 신앙의 기본 이치를 일깨움과 동시에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성서해석학을 시도한다. 깊이 있는 주석과 유대교 전통, 히브리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촘촘히 얽힌 씨줄과 날줄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과 잇고, 혼돈하고 공허한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말씀의 우물에서 깊은 물을 길어 올리기를 바라는 설교자와 성도 모두에게 추천한다.”고 평했다.

“세상과 고립되어가는 기독교의 위기를 진단하고, 격식을 없앤 시장의 언어로 성경을 풀어냄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목회자의 수십 년간 땀 흘린 정성이 엿보이는 책이다.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히브리 성경의 깊이와 해박한 유대문학의 학문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한줌의 신앙이 마음속에 서서히 스며들 것을 기대하게 한다.” : 배정훈 교수(장신대 구약학)

“이 책의 원고를 받고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재미있고 쉽게 썼다. 동시에 이 책은 깊이가 있어 두고두고 묵상하거나 연구할만한 책이기도 하다.” : 장경덕 목사(가나안교회)

“그의 생명력 넘치는 묵상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 깨워(Shaking Foundation) 다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 조인서 목사(강북제일교회)

“저자는 창세기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본다. 그 노력은 곧 실한 열매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케 하고 결국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게 한다.” : 한재엽 목사(장유대성교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면...

1. 들어가는 말

이국에서의 삶은 치열하지만 외롭다. 고백하자면, 거기에 하나님이 늘 함께 계셨다. 숲 속 길을 홀로 걸으며 묵상하노라면, 주시는 말씀이 마음에 와서 닿곤 했다. 인생을 통해서 주신 은혜가 컸는데, 갚을 길이 없어서 늘 빚진 마음이었다. 결국은 마음에 켜켜이 쌓아 놓기만 했던 말씀을 펼쳐 놓는 것이 조금이라도 감사를 표현하는 길이 아닐까 싶었다.

페이스북에 한두 개씩 올리던 글을 몇 분이 읽고 책을 내자고 했다. 그저 혼자서만 느끼던 말씀의 편린들을 모아서 사람들 앞에 내어 놓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함께 이 길을 걷는 친구들이 용기를 주어서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감히 고백한다.

이 책에 얹은 글들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무 살 시절부터 해오던 묵상이 글의 기본적인 틀이다. 다른 글들과 조금 차이가 있다면, 그 묵상을 히브리어 성경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게다. 혹시라도 번역성 경이 가질 수 있는 본문의 한계를 약간이라도 뛰어 넘을 수 있다면, 속뜻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이 필요했다. 그 위에다 주석적인 정보를 가공해서 집어넣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복잡한 주장을 한쪽 방향으로만 펼쳐놓은 주석은 별로 유용하지 않다. 만일 누군가 일차적으로 이런 지식을 추려서 전달할 수 있다면 목회자들의 강단이 보다 풍성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히브리어 본문에 기초한 묵상과 주석적 지식들이 함께 뭉뚱그려진 창세기 해설집이다. 읽으시는 분들이 설교자라면, 마음껏 퍼다가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혹은 평신도 가운데서도 본문의 깊이 있는 의미를 찾기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함께 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묵상의 방향은 다분히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나 있다. 본문을 조금 비틀어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해오던 많은 이야기를 확대해서 그냥 글로 옮기는 작업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설교는 본문으로 돌아가야 하며, 각 사람의 깊은 읽기를 통해서 그 속의 뜻을 파헤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열망이 이 책 안에 담겨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낼 때에, 하나님이 내 속에 글들을 담으셨다. 이것을 펼쳐 놓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

2. 창세기 27절 대체 언제 부딪혔더라?

하나님이 흙덩어리에 불어넣으신 생기는 히브리어로 ‘느샤맛 하임’이다. ‘하임’은 생명이라는 뜻이고, ‘느샤마’(하임과 연결하기 위해서 연계형으로 바꾸면 ‘느샤맛’이 된다)는 여러 가지 설명에도 불구하고 ‘호흡’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흙덩어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자신의 호흡을 거기에 집어 넣으셨다. 이런 호흡의 전이가 일어나자, 흙덩어리가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존재, 즉 진정한 생령이 되었다.

이러한 창조가 내게도 일어났다. 이 창조는 과거에 멈춘 일이 아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진행형이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면, 현재의 삶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 나는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에 부딪힌바 되었는가? 인생 가운데 그런 체험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 삶 안에 들어오시기 전에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신 후에 나는 어떻게 변해 있는가?

아담에게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가자 그만 하나님의 숨이 인간의 숨이 되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코로 호흡하면서 살고 있다. 나의 숨은 누구의 것인가? 나의 호흡 전체가 하나님의 숨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이 인공호흡을 하셔서 삶의 숨통을 열어주셨기 때문에(“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다”/창 2:7), 내가 목숨을 유지하고 살아 있을 수 있다. 나의 날숨과 들숨이 하나님의 것이라니, 이것 참 영광이다.(46-47쪽)

3. 창세기 179-14절 스티그마

성경 시대 이후에 생겨난 랍비 유대주의(Rabbinic Judaism)에서는 할례의 관점이 조금 바뀐듯하다. 언약의 내용을 여전히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할례를 행하는 일 자체에 관심이 더 커졌다.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견해를 빌리면, 신구약 중간기 이후로는 할례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증명하는 표지로 주로 사용되었다.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유대인 안에 언약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언약 안에 살면서 그것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비로소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의미를 가진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롬 2:25).

이런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할례 자체가 구원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할례를 위해서 몸을 베면 구원 문제는 그것으로 무조건 해결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나마 이제는 할례가 신앙을 넘어서서 문화나 관습 같은 것으로 변해가는 조짐마저 보인다. 오늘날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국민 가운데 종교적으로 유대교인은 그저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관습적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인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기독교를 대하는 자세와 흡사하다고 보면 될지 모르겠다. 굳이 예전에 그랬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미국에서 그런 대접조차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한다 해도 문화적 관습을 따른 것이라면, 거기에 신앙적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가 잘 알듯이 예레미야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4)고 일갈했다.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것보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이다. 노아를 보라. 그는 그 시대에 행함이 완전해서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할례는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너무나 후했다. 의식보다는 마음이다. 혹여라도 의식을 치렀다면, 그 후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당연히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마음 가죽을 베어서,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긴 사람들이다. 할례라는 행위 대신에 믿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동한다. 진정한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만 가능한 까닭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은 ‘내가 얼마만큼 일했는가’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계약이 이뤄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 그렇지 않다. 일의 양이나 질이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러한 은혜에는 어떤 의식 또한 전제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에 새겨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도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고 말했다. 원래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ιγμα)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단수가 아닌 복수 ‘스티그마타’(στ´ιγματα)를 사용했다. 복수로 사용되는 단어의 뜻은 ‘소속을 말해주는 표지로서의 흔적’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독특하게 ‘스티그마타’(στ´ιγματα)를 성 프란시스코의 몸에 나타났던 다섯 가지 흔적(손, 발, 옆구리)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신심이 깊은 사람들의 몸에서 발현되는 예수의 상흔을 의미하는 단어로 고정해 놓았다. 만일 이런 것이 몸에 생긴다면, 주변이 얼마나 시끄러워질까. 난리가 난 나머지 성흔을 가진 사람이 일약 복자나 성자의 반열에 올라서지 않겠는가. 그들의 사고를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이 랍비 유대주의 신앙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바울이 사용한 스티그마타는 기적의 발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이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를 대신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뜻했다. 사람의 마음, 즉 영혼을 베어서 새기는 영적인 흔적을 의미했다. 둘째는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몸에 새겨진 상흔들을 뜻했다. 그러니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소속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에 문신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고대의 노예들이 소속된 집안을 표현하는 낙인을 몸에 찍고 다녔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따라서 바울이 ‘스티그마타’(στ´ιγματα)를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다고 했다면, 우선은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에 그런 문신을 했단 뜻이거나, 또는 자신이 선교 중에 고난을 받아서 몸에 새겨진 상흔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일 수 있다. 두 가지 다 가능한 해석이지만, 오늘날 많은 성경해석자들은 그의 몸에 남은 박해의 흔적을 그가 언급한 ‘스티그마타’(στ´ιγματα)로 받아들인다. 성흔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현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실제로 몸에 난 생채기가 훨씬 더 거룩하고 진짜 스티그마타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울의 상흔은 기억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흔은 몸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매를 맞아서 상처를 입었을 때, 동시에 그의 영혼에도 딱지가 졌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채찍으로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후 11:23-30). 마음에 확 와닿는 것은 채찍으로 맞은 매의 횟수이다.

39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신 25:2-3을 보면, 성경은 40대를 넘어서 때리는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고 있다. 미쉬나(Mishnah, 유대인의 구전율법)는 이 부분을 39대 이상은 때리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맞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40에서 1대를 감해준다 해도, 40대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하기는 그 정도로 얻어 맞으면 그 한 대 때문에 삶과 죽음이 갈릴 수도 있겠다. 이 마지막 한 대의 매에는 생사의 문제가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미쉬나의 조항에는 법과 관련한 실제적인 철저함도 스며있다. 신명기에서 40대까지는 괜찮다고 했으니, 39는 아주 확실하게 법을 어기지 않는 숫자가 된다. 만일 39대를 때렸는데 혹시 죄인이 죽는다면, 40대를 때린 것이 아니니 때린 자에게 법적 책임이 없다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39번의 채찍질을 여러 번 당했다. 거기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3번이나 태장을 당했다고 말한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1994년도에 싱가포르에서 마이클 페이(M. Fay)라는 청년이 맞은 태장은 국제적으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미국이 그를 때리지 말라고 나서기까지 했지만, 그는 결국 얻어맞았다. 별 생각 없이 낙서하고 계란을 던졌다가 벌금 3,500불을 내고, 태형을 네 대나 맞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건장한 형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이른바 full swing) 태장은, 한 대만 맞아도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진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매를 맞고 나면, 정신적 후유증도 평생 남는다고 한다. 바울은 그걸 세 번 맞았다. 그것 말고도 또 있다. 한번은 돌로 맞기도 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던진 짱돌을 맞았을 때는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했겠는가(행 14장). 그 외에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의 위험,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다고 바울은 말한다.

모르긴 해도, 그의 맨살을 보면 흉터가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숫자까지 헤아려 가면서 서신 속에 담았다. 몸에 생긴 상처와 정비례해서 그의 영혼에도 상흔이 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몸의 상처와 영혼의 기억이 그에게는 할례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그의 상처와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148-153쪽)

하나님의 생기가 흙에게 임하자, 그 흙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건드리시면, 근본적인 성격이 바뀐다. 죽음이 생명으로, 무생물이 생물로, 생각 없음이 생각 있음으로, 좌절이 소망으로, 슬픔이 환희로 바뀐다.(45-46쪽)

인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앞으로 나가는 방주다. 물론 방향 또한 그러하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홍수는 끝이 나고, 인생은 아라랏 산에 도착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방주 속에 들어있음을 알고, 바깥에서 나를 움직이시는 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생이 달라진다.(70쪽)

모든 인생에는 후반전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심판의 전반보다, 은혜의 후반이 훨씬 중요하다. 무지개는 원래 비 온 뒤에 뜬다는 것을 잊지 말라.(76쪽)

성소에 가서 거기 머물 이유가 하나도 없을 때가 바로 성소를 향해서 가야만 하는 절실한 시점이다. 모든 상황과 이유와 하나님의 홀대를 다 가슴에 담고 성소를 향해 가는 우직함이 신앙에는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걸 지켜보신다. 그래서 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성소로 가서 머무는 것이 정답이다. 불평해도 좋고, 짐승 수준이어도 좋다.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깨달음은 반드시 온다.(133쪽)

하나님은 때로는 꽃길 전문가이시다. 꽃길을 걷고 싶은 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의지할지어다.(374쪽)

모든 사람은 인생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 힘만으로 어쩔 수 없는 구석이 도처에 산재한 것이 인생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달음박질 잘하는 녀석이 달리기 시합에서 넘어질 수도 있는 것’이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냥 고난은 우리의 삶의 일부다. 그 고난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이다. 편하게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지혜를 성경 안에서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분량이 적어서 그만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고난에서 우리를 일으키는 지혜를 찾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지혜가 이런 쪽이란 것이다.(390쪽)


‘크리쿰북스’는 문화선교연구원의 출판브랜드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를 출판한 ‘크리쿰북스’는 문화선교연구원(이사장 한재엽 목사, 원장 백광훈)이 보다 대중과 친밀하게 호흡하기 위한 출판브랜드이다.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소통과 변혁이라는 모토 아래, 문화선교를 통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1998년 설립된 문화선교연구원은 기독교 문화에 대한 신학적 평가와 방향을 제시하고 교회와 문화현장 활동가들과 협력하여 건전한 기독교문화를 연구, 보급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안적 기독교 문화생산의 영역에서 기독교영화관 필름포럼 운영과 기독교영화제인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최에도 함께하고 있다.

출판브랜드 '크리쿰북스'의 '크리쿰(CRICUM)'은 Christian Cultural Communication의 약자로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소통을 의미한다.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서 <문화선교연구신서>와 함께 ‘크리쿰북스’에서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을 담지하면서 보다 대중적으로 문화와의 다리를 놓는 책들을 다양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4월 20일 필름포럼 로비에서 출간기념행사

오는 4월 17일에 출간될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는 전체 401쪽이며, 가격은 18,000원이다. 출간기념행사는 4월 20일(목) 오후 4시,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527(대신동, 하늬솔빌딩 A동) 지하 1층에 위치한 필름포럼 로비에서 있을 예정이다(문의전화 02-743-2535).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는 제목 그대로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을 흔들어 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평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책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이 책의 탄생에 문화선교연구원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자임하고 있는 문화선교연구원이 한국 교회를 위해 갖고 있는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문화선교연구원이 내놓은 작품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기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문화선교연구원이라는 브랜드에 내재되어 있는 신뢰의 무게감이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문화선교연구원이라는 선물을 준비하셨다. 산파역할을 한 장신대 임성빈 총장이 문화라는 브랜드에 복음의 진수라는 가치를 담아서 만든 문화선교연구원은 21세기의 문화 변혁을 이끌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세속문화에 종속되어가는 한국교회가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고 눈길을 준다면, 그리고 관심을 갖고 손을 내밀어 덥석 붙잡는다면 너무 좋을텐데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적어도 서재에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 한 권은 꽂혀있는 목회자와 성도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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