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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교 교리 분석 ] 재림교 구원론을 바로 세운다 ②
‘교회지남' 시리즈 "'칭의와 심판'… '개시와 완성'"
2017년 03월 27일 (월) 12:16:12 곽정환 목사 hosanna6408@hanmail.net

곽정환 목사

신자의 일생 기록으로“칭의”를 입증했는지를 조사심판하여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은 구원을 이 단계로 만들어 버리고, 믿음(은혜) 구원을 무효로 돌리고,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 넣는 율법적 구원론이다.


“오직믿음”

‘교회지남’ 2017년 3월호 실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재림 전 심판의 관계’시리즈 - ‘칭의와 심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서로 조화되는가?’라는 [ 이슈 / 조사심판 ]을 비판한다. 틀린 사고에 너무 오래 고착되어 교정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려 깊은 재림교 독자들이 각성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이 천주교를 대항한 강력한 모토 중에 하나가 ‘오직믿음으로’였다. 이것은 그들이 발명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구원 진리의 재발견이었다.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이 증거한 진리였다. 구원 진리가 틀리면 다른 모든 진리가 옳아도 헛(空)이다.

‘오직믿음’이란 구원의 조건과 자원이 내 쪽의 행위(Anything made in human)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쪽의 행동(Something made in heaven)에 있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행동들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사역)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그 사역의 전가(대속)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고백이다. 따라서 ‘오직 믿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은혜’라는 의미이며 출처와 근원이 By Not My Action But Christ’s Action이라는 것이 오직믿음의 핵심이다.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받는 자에게 구원은 확실히 “은혜”이고 100% “선물”이지만 구원의 본래 값이 “거저”라는 의미는 아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무죄한 예수의 피가 나를 위해 치러졌다는 대속 개념이야말로 타종교엔 없는 기독교의 본질이다.


구원은 윤리(행함)를 배제하는가?

십자가의 강도처럼 구원받고 그날 죽거나 구원받는 사람이 그 즉시로 흠 없는 완벽한 삶이 현실이라면 행위(윤리)문제는 제기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모두가 경험하듯 구원받은 신자라 하더라도 옛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불찰로든 고의로든 시행착오와 실수들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제 아무리 고상한 수행을 하고 화려한 말로 포장을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죄의 스톱은 죽어야 끝나는 것이 인생의 실존이다. 죄성에서 비롯된 연약의 실존(행위) 때문에 구원에서 윤리 문제를 끊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성을 어찌할꼬?’가 바울의 고민이기도 했다.

①본시 은혜란 죄의 행위를 전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고 ②심판은 죄의 행위를 반드시 문제 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을 마주해 놓으면 ‘오직믿음’은 ‘행위심판’을, 심판사상은 ‘오직믿음’을 밀어내는 듯하다. 이러한 상호 배타성 때문에 은혜와 심판의 조화는 여태까지 논쟁이 되는 것이다.

‘오직은혜’를 강조하면 방종주의자이고 ‘행위심판’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라고 일방적으로 말 할 순 없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를 바른 위치에 두고 올바른 구도를 잡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다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실마리를 준다.

(딛 3:5, 개정)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딛 2:14, 개역)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의 행위는 구원과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단순히 있다, 없다고 말하면 오해하기 쉽다. 사람의 행위란 구원의 근거와는 절대적으로 관계 없고 구원의 결과와 상대적으로 관계있다는 것이 성경적이다. (상대적이란 사람마다 다르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행위는 구원의 [신분]을 얻는 것과는 무관하지만 구원의 [수준]과는 직결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사람의 행위를 구원의 [신분](자격) 얻음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방종주의란 무엇인가? 사람의 행위를 구원받은 자의 [수준]과도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에 대한 기본 원리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이란 하나님의 행동(은혜)만이 구원의 절대적 원인이며 사람의 행위란 은혜의 결과로서 (사람마다) 상대적인 것이다. 결과인 행위를 구원의 원인과 섞으면 절대 안 된다.


‘교회지남’ 논고에 숨겨진 믿음과 행함 관계에 대한 잘못된 설정들

논고에서 재림교 임봉경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에 대하여 “통합적인 요소”로 여기며 “균형” 잡히고 바른 조화를 모색한다고 하지만 독자들이 정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절묘한 방법으로 독자들을 율법주의로 오도한다. 몇 가지로 나누어 비판해 본다.

1. 재림교는 믿음과 행함을 “두 기둥”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근거로 놓는 전제적 오류를 가지고 있다.

재림교인들도 일상적으론 “우리도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야?”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얼핏 들으면 일반 정통 개신교의 이신칭의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총론과 포장이 그럴 뿐 각론과 내용으로 들어가면 완전 아니다. 그래서 말하는 재림교인들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 이상구 씨가 ‘조사심판’ 교리를 비판하자, 재림교(안식교)의 잡지 ‘교회지남’에 ‘조사심판’ 교리를 옹호하는 글이 시리즈로 실리고 있다. ⓒ교회지남 2017년 3월호 일부

재림교에서는 예화로 “믿음과 행함은 지폐의 양면”이라느니 “믿음과 행함은 구원의 항구에 가려는 보트의 양쪽 노와 같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럴 듯해 보이나 이는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고 믿음의 노 하나만으로는 구원의 항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율법주의 논리 자체다. 이러한 재림교 믿음과 행함 50대 50 구원관이 “이 둘 모두를 강하게 지지”한다는 임봉경 목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이나 ‘거기에 선다 해도 인간의 선함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짓된 개념에서 심판을 보호하도록 돕는다.”(‘교회지남’ 2017년 3월호)

대강 봐서는 뜻이 확연히 들어오지 않는 혼란한 진술이다. 이 무슨 뜻인가?

첫째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라도 그 일생의 삶( 자세하게 적은 행위 기록 책)을 가지고 구원이냐 멸망이냐 하는 운명 심판대 앞에 다시 서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오직믿음으로 끝이 아니고 행위심판이라는 2차 단계가 있다는 의미다. 단순히 상급 심판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하늘 입성자를 가리는 심판이라고 하기 때문에 믿음 구원은 1차, 행위는 2차로 나눠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은혜의 왕국에, 순종으로 영광의 왕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구원의 재수(再修), 삼수(三修) 개념은 없다.

둘째는, 그 최종(2차)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움만 의지하거나 하나님의 칭의에 편승할 생각 말고 너도 너의 구원에 대하여 할당된 몫(너의 선함)이 있어야 통과된다는 것이다. 구원에 너의 책임과 지분이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이 사상이야말로 구원이란 일부는 하나님 몫이고 일부는 우리의 몫이라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사과가 “반은 썩었다”는 말이나 “반은 썩지 않았다”는 것은 말은 반대지만 의미는 같다. 마찬가지로 재림교가 구원의 자격을 얻는 일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심판날 행위가 불충하면 구원을 잃거나 불합격이라고 한다. 그 말이 그 말이고 같은 오류이다.

구원에 있어서 믿음(칭의)는 원인이고 행위(순종)은 결과이다. 행위를 심판하여 구원 자격을 결정한다는 것은 구원의 결과로 놓아야 할 행위를 구원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교묘한 오류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십자가 죽음의 100%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기독론적 오류이다.

믿음과 행위(성화)를 함께, 동시에 구원의 근거로 놓는 재림교 구원론은 확실히 오류란 말이다.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면 어느덧 은혜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고스란이 행위 껍데기 쪼가리들일 뿐이다. 안식일, 유월절, 순종, 헌신, 방언, 신유, 품성변화, 채식 등등....

2. 로마서 3장과 6장의 궤변논리에서 행위 심판 사상을 꺼내는 것은 바울의 적수들 편에 서는 주장이다.

(롬 6:1, 공동)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언제 나오는가? 전도자가 무조건적인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설명했을 때만 나오는 질문이다. 상식적인 거래방식이나 조건적인 구원을 전했다면 이런 질문은 발생하지 않는다.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전했을 때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바울의 적수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그들은 철저히 인과응보적 세상에 살면서 자연스레 신상필벌 세계관과 “공짜는 절대 없다”라는 사상으로 단단히 무장된 사람들이다. 바울의 값없는 칭의 교리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차라리 은혜구원 교리가 아니라 거래(대가) 구원 교리라면 우리가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모든 거래(giving and taking)는 계산과 대가로 이뤄지는 마귀 논리에 세뇌된 상식으로 본다면 바울이 전하는 절대 은혜, 무조건적으로 사랑이란 가히 초(超)상식이서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죄가 많으면 벌이 많아야 하는데 은혜가 많다는 복음에 야유하며 대드는 저돌적인 반항이 “그럼~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인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롬3:1-8) 심판하겠다는 말씀은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지 신자에 대한 심판은 아니다. 따라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민망한 궤변 논리에서 신자의 행위 심판 사상을 도출하여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은 바울의 적수들의 논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3. 재림교는 심판을 분별없이 적용하고 있다.

성경에 심판을 말씀한다. 그러나 한 가지가 아니라 두 종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①징계(상급)의 심판과 ②운명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잘못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그 심판이란 아들이기에 아버지가 사랑으로 하는 현세의 징계 심판(잠 3:12; 히 12:6)이며 재림시 상급 심판(고후 5:10-15)은 있다. 심판 ①은 구원의 신분을 위협하거나 뒤집는 심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기 전의 모든 사람은 심판하고 말 것도 없이 무조건 진노의 대상이었다(엡 2:1).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②운명심판이 제거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심판 받으면 같은 사건에 이중 처벌이 되는 것이므로 그런 일을 없다.

그런데 재림교 주장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일생이 과연 이미 받은 칭의를 “입증”해 냈는지를 재심판하여 구원의 자격을 마침내 결정한다는 ②운명심판(조사심판) 교리를 주장한다.

신자의 삶을 두고 운명심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은혜 구원을 물거품으로 날리는 비복음적 사상이다. 정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속는 줄도 모르고 속게 되는 교묘한 율법주의 사상이다. 생각 있는 재림교인들의 깊은 각성을 촉구한다.

믿음으로 칭의된 전반전(1차) 구원을 일생 동안의 나의 행위로 얼마나 잘 유지 하고 마무리 했는지 후반전(2차)로 심판하겠다는 것이니 누가 통과할 수가 있단 말인가? 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분별없이 적용하여 성도를 오도하는 구원론인 것이다. 그래서 재림교에선 구원의 확실한 결론은 조사심판이 끝나거나 죽은 뒤에라야 알 수 있으니 재림교회에서 구원 확신은 절대 금물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전 연합회장을 지낸 한 재림교 목사는 “구원이란 얻기는 쉬운데 유지하기가 어렵다.”, “구원은 원금도 날 릴 수 있는 투자다.”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틀린 구원론인데 교인들은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아멘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처음부터 틀린 구원론으로 세뇌된 자들이 갖는 한계인 것이다.

따라서 재림교인들은 평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교리적으로 구원은 미완성이며 그들의 신앙생활이란 구원 얻기를 소원하는 행함의 삶으로서 이것을 종교 생활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는 한국인이 아니듯 구원 얻기를 소원하는 자는 구원 받는 자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확신은 없고 결과는 모르는 두려운 삶이 재림 교인들의 내면이다.

4. 믿음과 행함을 구원의 개시(開始)와 완성(完成)으로 설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갈라디안 주의이다.

재림교 임봉경 목사는 ‘교회지남’ 이번 3월호에서 믿음과 행함은 구원사 전체의 맥락에서 필요한 두 기둥이라고 하면서 칭의와 심판의 관계를 특별히 “개시(開始)와 완성(完成)”으로 언급했다. 이는 재림교회가 칭의만으로 구원은 부족하다는 사실과 구원의 재수(再修)개념, 즉 믿음으로 1차, 행함으로 2차 구원 개념을 천명하는 것으로서 비성경적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앞서 재림교 구원론은 총론은 은혜지만 각론에서는 행위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한다.

신자에게는 반드시 선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목회적으로 행함의 필요성을 충분히 강조할 수는 있다. 심지어 징계의 무서움(심판)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행함(책)을 재심사하여 신자의 구원 자격을 최종 결정한다거나 칭의로 개시된 구원을 행위로 구원을 완성한다는 사상은 복음의 은혜성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간 주장이다. 칭의와 심판을 ‘개시와 완성’구도로 설정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바울의 적대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갈 3:2-3) “내가 여러분에게서 한 가지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입니까, 기쁜 소식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여러분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려고 하십니까?”


결론은...

행위를 심판하여 구원 자격을 결정한다는 것은 자식을 낳고 30년 동안 하는 것을 본 후에 호적에 올리겠다는 부모와 같은 어리석음이고 오류다. 구원의 결과로 놓아야 할 행위를 구원의 원인으로 놓는 것은 오류다. 이것은 또한 구원에 있어서 나의 행위(몫)를 사역(하나님 몫)과 등가(等價)로 놓는 것은 것이다.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도 감히 넣지 않은 행위를 재림교는 어찌 구원의 원인으로 놓을 수 있는가? 믿음과 행함을 두 기둥이라며 동시에 구원의 원인으로서 주장하는 재림교 구원론은 결국 물과 기름을 섞는 하이브리드 구원론이다.

(롬 4:4-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 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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