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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교(재림교) 교리비판 ③ ] ‘조사심판’에 대한 시비곡직
재림교 구원관, 1888년 이후 변했나 안 변했나?
2017년 01월 16일 (월) 00:20:08 곽정환 목사 hosanna6408@hanmail.net

곽정환 목사

조사심판의 논쟁 포커스는 구원론

재림교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2300주야(조사심판) 교리는 시간적으로는 종말론 교리에 속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기독교의 근간인 구원론에 속하는 교리이다. 재림교 이국헌 목사도 “조사심판의 교리는 구원론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조명, p.76)고 지적했는데 그것도 뇌관에 해당하는 속죄(죄사함), 칭의, 중생 등을 조준 터치하고 있다. 재림교의 구원론 정체성(주관적)이 개신교(루터 칼빈 웨슬리)구원론 정체성(객관적)과 비교하면 출발부터 각도를 달리하는 특이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이슈다.

이상구 책의 주요 주장들 중에 하나가 1888년 분수령 개념이다. 즉 ①화잇이 와그너로부터 1888년 어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해 받고 파격적으로 복음을 깨달았다. ②이 기별을 확실히 깨닫자 그녀는 용기 있게 또 겸손하게 몰랐을 때의 이전 주장을 과감히 수정했다. 그리하여 1844년부터 44년간의 젖어 있었던 율법주의 구원관에서 벗어났으며 ③셋째 천사의 기별은 조사심판이었다는 그간의 주장을 포기하고 교체하여 이신칭의야말로 참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수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심포지엄 발제자들은 대노하는 분위기다. ①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와그너가 화잇 부인에게 전해 준 것이 아니라 그가 화잇 부인으로부터 배운 것”이므로 어불성설이다.(조명, p.42.; 129) ③에 대하여, 조사심판은 셋째가 아니라 첫째 천사기별에 가깝다.(조명, p.133). “조사심판 개념이 바뀌지(포기되지) 않았다.”(조명, p.137).

③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 첫째 천사의 기별이란 임박한 재림으로 세상이 ‘끝’난다는 개념이었다. 1844년 원형 대속죄일의 ‘시작’ 개념은 대실망 이후의 등장한다. ‘끝’ 개념을 가지고 재림 선포에 올인 했던 자들, 즉 재림 불발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들이 불발 후의 어젠다 개념인 ‘조심’교리를 말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음으로 첫 천사의 기별 일 수 없다.


재림교 도현석 목사의 강변(强辯)

다른 발제자들도 비슷하지만(조명, pp.142-143) 심포지엄 책 2부에서 재림교 도현석 목사는 ②번에 대하여 강력하게 각을 세웠다.

1888년을 계기로 화잇은 “자신의 구원관을 수정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아니라고 해야 옳다. ... 구원의 조건에 관하여 일관성 있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 그녀의 구원관은 초지일관 변화가 없었다” (조명, p.43, 57,; 142.).

재림교 역사에서 1888년 대총회가 신학적 분수령임은 인정하면서도 그때를 전후로 화잇의 신학적 입장 및 구원관에는 아무 변화 없었다는 것이다.(참조 조명, pp.44-48).

그러면서 8개 개념(하나님의, 요구, 인간의 무력함, 믿음, 구원에 있어서 협력, 칭의[온전한 용서] 새로운 피조물, 보증)에 있어서 1888년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를 인용 제시했다. 각각의 내용은 잠시 뒤에 다루더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문제가 생긴다.


당시 기득권자들의 거센 저항을 어떻게 설명할건가?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믿음의 의가 설교되었을 때 당시 “율법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버틀러 목사와 스미스 목사를 중심으로 한 무리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조명, p.42)고 했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구원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려는 대총회장단 기득권 그룹이었다. 이들의 거센 저항은 가히 공격이었고 총회의 폭풍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거센 저항이 와그너의 단순히 수사학적 표현이나 “40여 년간 하나님의 계명과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믿음의 의를 강조하지 않”은 (조명, p.133 재림교 이국헌 목사의 주장) 균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다. 이제까지의 가르침 자체가 달라 용납할 수 없었기에 한 저항이었다.

재림교 도현석 목사의 지적대로 1888 이전이나 이후 구원관이 초지일관 변한 것이 없다면 당시 대총회장 구룹은 도대체 왜? 어떤? 이슈에 결사적인 저항을 했다는 말인가?


재림교 김대성 목사와의 충돌

재림교 김대성 목사는 1996년 대논쟁에서 이렇게 밝혔다.

1997년 교계 언론기관 기자회견 자료집에서도 동일하게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으면 다른 교리가 아무리 성서적이라도 그것은 이미 기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안식일교회도 다른 어느 교회 못지않게 모든 교리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 어느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교리적 논쟁이 있게 마련이다. ... 안식일교회도 역사적으로 교리적 논쟁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있었던 교리 논쟁은, 그 이전까지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던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돌아서는 대전환점이 되기도 했다.”고 했다.

그저 강조점의 차이를 두고 “대전환”이라고는 하지는 않을 터 김 목사는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던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돌아”섰다고 했는데 도 목사는 이마저 부정하고 초지일관 했다니 누구 말이 옳은가?


변한 것이 없으면 정말 더 큰 문제다

사람의 생각이 어느 해를 기점으로 두부모 자르기처럼 확 바뀌는 것은 쉽지 않은데 화잇 저서를 꼼꼼히 살펴 1888년을 정점으로 조사심판을 포기하고 이신칭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상구의 통찰력이다.

   
▲ 한 신자가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삶(기록)을 십계명에 비추어 조사받는 장면. ⓒ재림교가 가르치는 조사심판 상상도

나름 근거가 있기에 김대성 목사도 “안식일교회도 다른 어느 교회 못지않게 모든 교리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그렇(다)”고 한 것인데 이는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노력의 정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선포된 1888년이라는 것은 상식인데 아무런 신학적 변화도 없었다는 도 목사의 말은 지나친 강변과 억측 아닌가?

생각해 보자. 재림교의 한국 상륙은 1904년으로서 1888년 이신칭의 총회 16년 뒤이다. 그러니 한국 재림교가 애초부터 1888 총회가 결의한 “믿음으로 의의 기별”을 전함으로 선교를 시작했다면 논리적으로 율법주의나 이단시비니 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재림교는 자신의 “대전환” 이신칭의가 바울(성경)과 루터의 이신칭의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를 깊이 성찰해야 했다. 천주교의 이신칭의과 충돌하면 개신교의 이신칭의과 같아야 하는데 어찐된건지 개신교와도 다르다니, 재림교는 제3의 이신칭의를 개척한 건가? 포장은 개신교 이신칭의, 내용과 원리는 천주교 이신칭의(혼합)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아무튼 발전되고 대전환된 이신칭의도 이토록 미흡한데 그 이전 율법주의 구원관과 아무런 신학적 차이가 없었다는 도 목사의 주장은 더 큰 문제이고 기함할 노릇이다.


“믿음의 의”를 말해도 오류인 이유

재림교는 모든 교리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며 특히 구원론에서 그랬다면서 김대성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본 교회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믿고 가르친다.” “본 교단은, 구원이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매우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혹은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반 개신교에서는 재림교보고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졌다고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재림교우들의 한결같은 항변이다. “우리도 믿음의 구원을 말하는데 왜? 율법주의라고 하느냐?”이다. 한번은 정직하게 따져볼만한 질문이다.

이유를 모른다고 했는데 확실하게 설명하니 재림교우시라면 주의 깊게 읽고 반드시 깨닫기를 바란다.


신분과 수준은 다르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다. 같은 물건(자동차, 집)이지만 내 것보다 좋은 것을 남이 가졌다면 부럽기도 하고 바꿨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수 있다. 물건만 그런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내 자식보다 외모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하고 착한 남의 자식이 있을 수 있다.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 친구 좀 닮아보라고 비교하며 잔소리 한마디 할 수 있지만 그 부모에게 찾아가 웃돈 줄테니 “자식 바꿉시다.” 하는 부모는 없다.

자식(자녀)란 잘함과 못함, 능력과 성품 이전에 내 자식이다. 탁월한 재능덕(才能德)을 갖춘 수준의 자녀라면야 좋겠지만 수준과는 무관하게 태어남으로 되는 것이 부자 ‘관계’이고 ‘신분’이다. ‘수준’이 장애자로 태어나도 내 자식 이란 ‘자격’이고 ‘신분’이다.

①‘신분’과 ②‘수준’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됨과 의롭게 됨의 ‘신분’은 하나님께로 남(중생)으로(요 1/12; 요 3:1-5)만 된다. ‘신분’은 온전한 은혜다. 그러나 재림교는 ‘수준’(순종, 변화, 헌신)이 있어야 ‘신분’(칭의)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 치명적 오류다.

김대성 목사가 개신교를 향하여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졌다고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외치는 이유”를 확실히 말하자면 ‘일관성 문제’다. 즉 총론(시작)은 믿음의 의를 주장하지만 각론에 들어가 보면 이를 뒤집는 주장이 참 많기 때문이다. 즉 칭의의 근거로 예수 십자가 사역(공로) 믿음만을 부정하고 인간의 사역(잘함과 못함, 순종과 능력과 성품)을 더하여 구원의 신분(자격)이 얻어진다고 하기 때문이다. 구원 얻기는 쉽지만 유지가 어렵다느니 믿음으로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지만 영광의 왕국은 순종으로 들어간다느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속죄 완전성을 부인하고 우리의 죄는 최종적으로 행위(회개)따라 도말 될 것이라는 주장 등은 일관성을 파격적으로 깨는 주장들이다. 믿음의 의를 말하지만 이것을 뒤집는 주장을 동시에 섞어 말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재림교가 율법 순종을 강조하고 토요일에 예배드리고 품성이 변화를 강조한다고 해서 절대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런 것을 구원의 신분 조건으로 놓기 때문에 율법주의다. ‘신분’과 ‘수준’의 개념 없음이 문제란 것이다.

재림교는 전술한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원인(신분)과 결과(수준)로 놓지 않고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의 신분을 얻는 조건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행함의 의다.

계 14:12절을 계명도 잘 지키고 예수도 잘 믿어야 구원(칭의)받고 인(印)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한 율법주의다. 그 누구도 행함을 섞어 구원(칭의)받을 수 없다.


재림교, 정말 어떻게 이런 말 할 수 있는가?

도현석 목사는 “1888년을 전후로 화잇 여사의 구원관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조명, p.58)면서 인용 주장한 아래 글들을 보자. 일관성을 깨고 믿음의 의를 뒤엎는 비복음성에 모골이 송연할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에게 순종 즉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예전처럼 지금도 하늘에 들어갈 유일한 자격으로 온전한 의를 요구 하신다.”(조명, p.48)

“하나님은 지금도 에덴의 거룩한 부부에게 요구하셨던 것, 즉 요구(계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요구 하신다.”(상동)

“믿음은 우리 편에서 최고의 선호, 온전한 신뢰, 전적인 헌신을 표해야 한다.”(조명, p.5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지가 하나님께 굴복되면, 마음이 그분께 바쳐지면 애정이 그분께 고정되면 거기 믿음이 있다. ...엘렌 화잇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받는 선물로 얻고자 한다면 주님과 온전히 협력할 준비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은 힘차게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하나님의 은혜를 연합시킬 것이다.(조명, p.52)

“... 사람이 나태와 무활동 중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철저히 불가능하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 앞에는 계속적인 투쟁이 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간다. 사람은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오류이며 가장 위험한 교리다."(조명, p.52)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대가 할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대는 하늘의 역사와 협력해야 한다.”(조명, p.53)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조명, p.55)

“그리스도의 입혀 주신 의를 통하여 죄인은 그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법이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계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조명, p.57)

이 모두는 구원의 은혜성을 아작 내는 주장들이다. 이를 두고 부분적 인용이라거나 야고보서가 행함을 말하는 차원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신자로서 믿는 자 다움 즉 '수준' 향상을 독려하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야 구원의 '신분'이 얻어지고 유지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필자가 가장 사랑했고, 또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마음이 아프다. 1888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대전환을 인정하고 성경적으로 더 개혁되는 재림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단시비에서 벗어나 골리앗과 함께 싸우는 다윗의 형제 같은 교단이 되기를 기도한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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