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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성탄, 낮아짐의 정수
2016년 12월 28일 (수) 12:00:49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빌립보서 2장 5-8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저는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가끔 성지 순례 차 다녀왔던 이스라엘 현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특히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읽을 때면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교회’(Church of Nativity)가 생각이 납니다.

이 교회는 베들레헴 시내에서 남쪽 외곽으로 8킬로 정도 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 앞에는 ‘구유광장’이라고 부르는 넓은 광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 끝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성곽 형태의 교회가 서있습니다. 그 길이가 52미터나 되고 폭도 24미터나 되는 큰 규모입니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이 교회의 출입구입니다. 높이가 1.2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사람이 그것도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문의 이름도 ‘겸손의 문’(Door of Humility)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어두운 동굴 같은 본당이 나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계단으로 따라 작은 동굴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 동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구유가 놓여있던 자리가 있습니다. 마치 아궁이처럼 깊이 파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보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고 손으로 만져보려면 거의 엎드려야 합니다.

저는 이곳을 방문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거 로마 황제도 이곳을 찾았을 때 말에서 내려야 했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교회 문을 통과해야 했고, 아궁이 같은 곳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도, 세상에서 존귀한 명성을 가진 사람도, 그리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부귀를 손에 쥔 사람도 모두 자기를 낮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지극히 높은 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캐롤을 통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축들의 여물통인 구유에 누이셨고, 포근한 담요나 이불이 아닌 가축들의 먹이인 꼴 위에서 주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토록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그 곳에서 사람들 모두 자기를 낮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높임을 받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마 23:12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니까 이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는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서도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정치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우면 서민들 곁을 찾아옵니다. 평소와 달리 허름한 옷을 입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와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합니다. 손을 내밀고 누구라도 높여 말합니다. 그 순간만 본다면 참 겸손한 사람들이고 자기를 낮추며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만 빠져나오면 달라집니다. 복장이 달라지고 말투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집니다. 한 마디로 위장된 겸손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낮춤들이 진정한 낮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진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싶어서 낮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낮춘 것입니다. 속으로는 낮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낮춘 척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낮은 자리에 있지만 때가 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다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기 위해 죄인이 되셨습니다. 끝내 사형수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진정한 낮아짐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진정한 낮아짐의 정수(精髓)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탄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성탄절 아침에 예수님의 성탄이 보여주는 낮아짐의 정수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게 될 것입니다.


자기 부인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지기 아니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여기지 않으시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자기 부인’(self-denial)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이제 더 이상 당신을 하나님이라 여기지 않으시기로 결단하셨기에 성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대접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으로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자기 부인에서 진정한 낮아짐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라 여기시지 않고 철저히 인간으로 사신 이 자기 부인이야 말로 진정한 낮아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에 ‘갑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이버 사전을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

그리고 ‘울트라 갑질’이니 ‘슈퍼 갑질’이니 하는 말들도 등장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갑이라고 하여 마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제가 주목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갑 마인드’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하며, 갑이라 주장하고, 갑처럼 군림하려는 마음을 말하는 말입니다. 사실 모든 갑질은 이 갑 마인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큰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갑 마인드’를 가지고 갑질 아니 슈퍼 갑질, 울트라 갑질을 한 것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아무런 공직의 직함도 없고,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평범한 강남 아줌마가 마치 자기가 대통령의 권위를 가진 것처럼 갑 마인드를 가지고 국정을 농단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통령께서 결코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최순실이란 사람에게 이런 갑 마인드를 갖게 해 준 장본인이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 실세들이 이런 갑 마인드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온통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갑 마인드입니다.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지 갑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갑 마인드로는 결코 낮아짐을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마 16: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처럼 낮아짐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섬기는 것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본 회퍼는 자기 부인이란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사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말로 표현해 본다면 자기 부인이란 갑 마인드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갑이면서도 자신이 갑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을로 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성탄은 이렇게 자기 부인을 통해 낮아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여기에 낮아짐의 정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비움

본문 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비우셨을까요? 하나님의 본체를 비우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을 비우셨을까요? 역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품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비우셨을까요? 그 답은 다음 부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특권과 권능을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특권을 비우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서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 행사하실 권능을 비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에게 체포되셨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사형수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비움을 통하여 진정한 낮아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자기 비움 즉 ‘케노시스’(Kenosis)가 또한 낮아짐의 정수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요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사람들이 건강관리를 위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다이어트입니다. 이 다이어트는 한 마디로 말하면 체중을 줄이는 것입니다. 몸 구석구석에 저장되어있는 지방을 제거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수에 대한 관심도 뜨겁습니다. 전문가들이 장수를 위해 조언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첫 손에 꼽는 것이 소식(小食)입니다. 이 소식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적게 먹어서 위장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복감을 느끼고 배고픔을 즐기며 살면 장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도 뜨겁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의 권고를 들어보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길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랍니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며 살고,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마음에 담고 살기 때문에 갖가지 신경정신과적 질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살려면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채워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비워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낮아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낮아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낮아지려면 비워야 합니다.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가벼워져서 낮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비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이 되셨습니다. 낮아지신 것입니다. 성탄은 이렇게 자기 비움을 통해 낮아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건인 것입니다. 여기에 낮아짐의 정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받음

오늘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실천하며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연구해 보면 사탄도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버금가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일,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 이것 역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사탄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낮아짐입니다. 사탄은 교만한 영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 스스로 낮아질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사탄은 자기 부인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인 주제에 하나님과 대적하려고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은 고사하고 자기 과장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탄은 자기 비움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탐욕의 영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 비움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힘을 다해서 자기 것을 더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탄은 이 세상을 영적으로 지배하면서 인간들에게 높아짐의 욕망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낮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배운 것이 다 높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늘 어떻게 하면 높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낮춘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낮춤일 수 없습니다. 낮추는 흉내만 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낮춤을 실천하며 살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진정한 낮춤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는 길 뿐입니다. 특히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낮춤의 정수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는 길 뿐입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이라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처럼 사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갑 마인드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특권과 권능을 비우신 것입니다. 대접을 받으실 수 있지만 비우셨습니다.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지만 비우셨습니다. 우리도 특권을 행사하거나 힘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낮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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