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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016년 12월 21일 (수) 11:09:45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요일 2장 15-17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도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요 17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기도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요 17: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 것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리신 것입니다. 세상 속에 남겨진 저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기도를 드리신 것일까요? 제자들이 세상 속에 남겨지면 무슨 문제라도 있기에 하나님께 보전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신 것일까요? 원래 저들은 세상 속에서 특별한 문제없이 살아온 사람들인 왜 이제 하나님께서 보전해 주셔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 답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 17:16을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원래 세상에 속해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믿고 난 뒤 세상에서 벗어나서 주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 존재의 자리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원래 세상에 속해 있을 때 세상 속에서 살면서 특별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세상과 호흡하며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채 세상 속에서 살게 되자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 풍조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마찰을 빚고 세상과 다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상 속에서 사는 일 자체가 고난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속에서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세상에 속해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존재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벗어나 주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결과 당연히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세상과 불편한 사이게 되었습니다. 세상 풍조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와 핍박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불편한 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 속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이 산다면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굴복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난 뒤에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 주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타국에 이민 와서 사는 거류민들이 타국에 살면서도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Why)?

그러면 우리는 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빛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동녘에 태양이 떠오르면 온 세상은 빛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반면에 저녁에 서산에 태양이 지고나면 온 세상은 어둠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 빛 가운데 머물든지 밤에 어둠 가운데 머물든지 둘 중에 하나만을 겪게 됩니다. 낮과 밤을 동시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낮에 빛 가운데 머무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든지, 아니면 밤에 어둠 가운데 머무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며 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 4:4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과 친구로 가까이 사귀는 사람은 하나님과는 척을 지게 되고 심지어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택일의 문제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때 세상 사랑을 택하지 말아야 하나님 사랑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어떤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에 세상에서 잘 나갔답니다. 출세도 했고 돈도 많이 벌었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아내 몰래 외도도 했답니다. 이른바 몰래 ‘세컨드’를 두고 두 집 살림도 했답니다. 그 여인을 사랑했지만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아내에게 잘하려고 최선을 다했답니다.

그러다 그만 아내에게 들켜버렸답니다. 아내는 더 이상 자기와는 살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여인과의 관계를 청산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진작 예수를 믿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를 했답니다.

저는 이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속한 사람이면서도 실제로 세상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주일성수도 잘하고 헌금도 철저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재미도 보고 또 하나님의 은혜도 계속 받고 싶은 속셈입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을 심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는데 이것을 용납하실까요? 신 4:24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세상 사랑을 중단해야 합니다. 한 시라도 빨리 세상 사랑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How)?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 세 가지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세상 사랑에 빠져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다시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신의 정욕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인간의 본성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말합니다. 세상의 향락을 즐기고 싶은 욕망, 무엇인가 더 가지고 싶은 탐심, 제어하기 힘든 성적인 충동, 다 던져버리고 싶은 일탈의 충동 등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힘들게 하고 적극적으로 방해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실감했습니다. 마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도하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졸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렇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울도 이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롬 7:2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니까 자기 자신 안에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죄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육신이 다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예수 믿고 주님께 속하게 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은 우리 안에서 정욕을 뿜어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것을 정면으로 방해합니다. 우리가 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아예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버리게 되면 우리는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길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먼저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둘째, 안목의 정욕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다시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원인 가운데 다른 하나가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목의 정욕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눈을 비롯한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정보 때문에 일어나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정욕이 우리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욕망이라면 이 안목의 정욕은 우리 외부로부터 유입된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 말이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보지 않았을 때는 아무런 욕망이 없었는데 보고 난 후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이 안목의 정욕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사람들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안목의 정욕 때문입니다.

삼하 11:2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안목의 정욕이 요동쳤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안목의 정욕이 강력하게 힘을 발휘합니다. TV나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해 이미지와 영상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음란영상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나 도박 사이트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해져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손쉽게 홈쇼핑이나 상품홍보 사이트에 접근이 가능해 지면서 충동구매와 같은 소비 형태들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 중심의 미디어 시대는 우리에게 안목의 정욕은 강력하게 발동시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보기 보다는 세상에 한 눈 팔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이런 안목의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셋째, 이생의 자랑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다시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원인 가운데 또 하나가 바로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생의 자랑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허세를 부리며 뽐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자신을 인정받고 싶고 높임을 받고 싶은 욕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생의 자랑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히스기야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로 15년간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주며 허세를 부렸고 자신의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셔서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히스기야가 자랑하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히스기야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한 것은 곧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지고 누리고 있는 것들은 모두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 하나님 때문에 가지고 누리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자랑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이생의 자랑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유혹을 받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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