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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하나님의 분노의 성격
2016년 11월 16일 (수) 11:24:58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나훔 1장 1-8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오래 전 TV 드라마 시리즈 가운데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으로 변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배너 박사는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됩니다. 아내가 죽은 뒤에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깊은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발생하는 괴력을 연구하게 됩니다. 연구 결과 감마선이 괴력을 낼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에 대량의 감마선을 주입합니다. 그 결과 분노를 느끼면 감마선이 작동하여 괴력을 가진 헐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같은 사람의 두 얼굴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냅니다. 평소에 온순하고 따뜻한 배너 박사가 불의를 보며 분노를 느끼면 헐크로 변합니다. 그리고 헐크는 불의와 싸웁니다. 그러다 분노가 잦아들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사랑의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공의의 하나님으로 변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비쳐지게 된 것일까요?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나훔이라는 책은 내용상 요나라는 책의 후편과 같습니다. 그래서 옛 라틴어 성경 번역본인 70인 역에서는 우리 성경과 달리 나훔서를 요나서 뒤에 편집해 놓기도 했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셔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요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앗수르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이방 땅 앗수르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나서의 사건 이후 10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앗수르 백성이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다시 악을 저지르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훔을 통해서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훔서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보입니다. 한 없이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시던 분이 채찍을 내려치시고 거칠게 분노하시는 분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한 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신 동시에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과 공의가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사랑으로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은 늘 사랑의 하나님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당황스러워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저토록 격렬하게 분노하신다니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분노라면 사람들의 분노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가 어떻게 다른지 알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람들의 분노와어떻게 다른지, 하나님의 분노는 어떤 것인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들의 분노와 달리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더디 하시는 분노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하나님께서 표출하시는 분노는 더디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의 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는 대체로 순간적으로 폭발합니다. 참아도 얼마 가지 못한 채 폭발합니다.

일전에 교통사고 뉴스를 보고는 어처구니없어 한 일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두 대의 차가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어떤 차가 갑자기 껴들자 뒤차가 전조등을 켜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급히 악세레터를 밟아 다시 추월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추월했는데 이번에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고속도로 1차선에서 급정거를 했습니다. 뒤차가 급히 속도를 줄여서 추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뒤 따르던 차들이 연쇄 추돌을 일으켜 5중 추돌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고로 한 사람이 숨지고 네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도 크게 다쳤습니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참지 못합니다. 바로 분노를 폭발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도 참으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먼저 경고를 하시고 기다리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분노를 폭발하십니다.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앗수르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방인들이지만 저들도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저들이 다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더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드러내시기까지 무척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훔 선지자를 통해 그 분노를 드러내셨을 때가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긴 세월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훔을 통해 분노를 드러내셨지만 그것도 당장 징계를 통해 분노를 폭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 선지자로 하여금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일단 그 분노를 전하신 것입니다. 아직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람들의 분노와는 다릅니다. 무척 더딥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시 103:8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밧세바를 간음한 일이 있습니다. 그 죄를 덮기 위해 남편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마땅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기를 더디 하셨습니다.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 받고 다시 왕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화를 폭발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분노는 회개에 대한 촉구로 나타납니다.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때 하나님의 분노는 최후의 수단으로 징계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분노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악에 대한 분노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 분노하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함 때문일까요?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분노하시는 것은 악인이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악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악인이 악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에게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은 악인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악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의 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에게 가해진 것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배반을 당했을 때 자기를 배반한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를 모함하고 음해한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때로는 자기를 힘들게 한 상황이나 여건 또는 그런 사회나 공동체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치를 떨며 질러대는 말이 이런 것들입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두고 봐! 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네가 나한테 한 것을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꺼다 백배 천배 만배로 갚아주고 말 거야”...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눅 23:34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께 못할 짓을 저지르는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을까요?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 특히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부화뇌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군중들에 대해 화가 나지 않으셨을까요? 아마도 사람들 같았으면 당연히 저들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과 악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시되 모르고 악을 따르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연민을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미워하시되 악인은 사랑하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목표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품고 있는 악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그 악을 버린 자들은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그 모든 악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악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노의 화살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악을 품고 있다면 자칫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살전 5:22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왜일까요? 그 악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감당할 수 없는 분노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실 때 그 누구도 그 앞에 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실 때 그 누구도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가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마음에 분을 품으면 천기마저도 뒤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분노가 중대한 복수로 나타나서 다른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예일 뿐입니다. 대부분 사람의 분노는 자기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또 우리 속담에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말은 그냥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다릅니다. 일단 그 분노가 표출되면 그 누구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물론이고 집단의 힘 나아가 나라의 힘으로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의 구체적인 예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노아의 홍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창 6:5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시 이 세상에 가득한 악에 대해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노아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분노와 홍수 심판에 대한 사실을 전하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그리고 노아에게 이 심판을 피할 준비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간 동안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 모든 내용을 알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임할 것과 모든 사람들이 이 홍수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장차 임할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에 대해 믿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라는 것이 있을 것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 심판을 피할 길을 알고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믿지 않았기에 심판을 피할 길을 준비하지 못해서 모두가 다 멸망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노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노아가 장차 임할 홍수 심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믿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 임하면 그 누구라도 피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결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심판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악은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는 날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피할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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