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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를 왜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 교리 비판 - 재반론 ⑩
2016년 08월 02일 (화) 11:26:37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Ph.D., D.Min.,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를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해야 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정통을 ‘참람한 이단’으로, 정통 교리를 ‘참람한 이단 교리’로, 정통 신학자를 ‘참람한 이단’으로 매도하기 때문이다. 정통을 이단이라 하는 개인이나 종파는 이단임에 틀림없다. 이런 맥락에서 ‘정통’을 ‘참람한 이단’이라 칭하는 지방교회는 ‘참람한 이단’인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지방교회를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지난 글에서 지방교회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해명하고 반박하도록 한다. 이 문제는 이미 (재반론 글 #1과 #10에서) 두 번에 걸쳐 “해명과 수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해명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답을 통해서 해명과 반박을 동시에 하도록 한다. 지방교회가 지난 글(#9)에서 제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데, 이는 필자에 관한 불법적인 주장을 포함한다.

“김홍기 목사]은 변명의 여지마저 ‘구조적’으로 차단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신봉자가 되었다.”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 “결국 이 말은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라고 반응했다. 이 말은 자신들이 삼위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 세 위격들’을 정통 삼위일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엉겁결에 실토한 것과 같다. . . . 그 결과 김홍기 목사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의 존재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말하여 잠재되었던 이단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위에서 지방교회는 “김홍기 목사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의 존재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말하여 잠재되었던 이단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과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지방교회는 필자가 “세 위격들의 존재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말했다고 함부로 주장하는데, 필자의 글 가운데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지방교회는 이 무책임하고 불법적이며 거짓된 발언에 대한 물적 증거를 제시할 책임이 있다. 지방교회여, 필자가 이런 말을 한 실제적인 증거를 가져와 보라! 물론 지방교회는 찾아올 수 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위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여기서 명백한 교리 사기를 하고 있다. 이런 불법적이고 거짓되고 악의적인 말을 하는 지방교회는 사악하고 비열하고 추악한 교리 사기꾼이다!

필자는 이미 2회에 걸쳐 필자의 실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명을 한 바 있다.

해명과 수정

필자는 지난 글(#9: 이단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방교회)에서 한 가지 문장[(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을 부주의함으로 빠뜨렸다. 아래는 이 문장이 빠졌을 때와 들어 있을 때를 비교한 것이다.

오류가 없는 문장: 결국 이 말은 (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오류가 있는 문장: 결국 이 말은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물론 오류가 있는 문장은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공개적으로 필자의 부주의함을 인정하고 수정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문장을 수정한다고 해서 필자의 신학적 입장이 바뀌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부주의함으로 빠진 문장[(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이 들어가야 필자의 신학적 입장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수정을 함으로 해당 단락에 나타난 필자의 신학적 입장과 수정된 문장이 완벽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아래는 수정된 문장이 들어 있는 단락 전체이다. 아래의 글에는 ‘부주의함으로 빠진 문장’이 들어갈 때 이 글 전체의 신학적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문맥은 필자가 ‘부주의함으로 문장을 빠뜨렸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확실히 증거한다! 아래의 단락의 전후 단락을 살펴 보기 원하는 독자들은 필자의 글(#9: 이단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방교회)을 참조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다섯 번째 진술만을 다루기로 한다. 이 진술은 지방교회의 이단 교리를 기초로 한 것으로 가이슬러 박사와 필자의 정통신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새빨간 교리 사기’를 한 것이다. 필자는 거듭해서 ‘위격상 구별된 삼위와 본질상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주장해 왔다! 우리는 위의 진술에서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라는 말에서 명백한 이단 사상(異端 思想)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지방교회가 말하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말이다(예: 아버지와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아들 홀로 이 땅에 오심). 달리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 혹은 ‘분리된 세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異端)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에 따른 ‘공간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한다. 결국 지방교회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본질로서의 불가분리(不可分離)한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다(정통 삼위일체론) 해도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삼위가 상호간에 공동 거주하시며 그들의 활동들 안에서 서로 너무 어우러져서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으로 일컬어짐으로 한 인격으로 간주됨)을 믿지 않으면 ‘분리된 삼위’를 믿는 것이며, 이것은 곧 삼신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삼위의 하나됨은 ‘삼위의 동일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상호 공동거주(삼위의 상호내주)’에 있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서 이 말은 지방교회가 (정통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삼위의 본질상 하나됨’을 부정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 말은 (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 같은 지방교회의 이단적 주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에 그 단서가 들어 있다.

지방교회는 필자의 실수를 기회로 삼아 필자를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주장하는 삼신론자로 몰아가는 ‘악독한 마녀 사냥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의 실수는 필자의 참 믿음과 교리를 결코 반영하지 않는다! 필자의 글 전체를 읽어 본 독자들은 필자가 ‘삼위가 한 본질 안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으신다’는 신앙을 굳게 견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이러한 실수를 기회로 삼아 상대방의 견해를 완전히 왜곡하여 이단으로 몰아가는 ‘사악한 마녀 사냥꾼’ 노릇을 하는 지방교회를 강력히 규탄한다!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해명하고 수정했으면 그것으로 일단락을 짓는 것이 정정당당하다.  앞으로 지방교회가 다시 이 문제로 비열하고 추악한 교리 사기를 할 때에는 그에 상응한 엄중한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다! 아래의 두 가지 글은 이 주제와 관련된 필자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준다.

지방교회의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표현에 들어 있는 이단 사상

지방교회: “더구나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은, 성육신 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동사시재[제]가 현재임)(요1:18),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요3:13) 같은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인자’는 ‘위격’을 가리킴으로 ‘본질상의 상호내재’ 혹은 ‘편재’ 와는 무관하다.)”

반박: 여기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말은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이라는 말은 성경의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자세를 비판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진술 자체를 비판한 이다. 예를 들어, 마 3:16-17을 지방교회는 이렇게 이해한다. 즉 (위격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아들과 성령이 계시고, (위격적으로) 동시에 물 위에 계신 아들과 함께 아버지와 성령이 계시며, (위격적으로) 동시에 공중에 계신 성령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이 계신다.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늘에 함께 계시고,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물 위에 계시며,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공중에 함께 계시는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구별된 위격과 (본질상) 하나됨’을 믿는다. 또한 삼위의 나타나심이 어떠하든지, 예를 들어 마 3:16-17의 경우에도,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원천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한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성경의 진술을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삼위의 구별된 나타나심과 본질상 하나이심’을 굳게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정통 삼위일체론을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에 기초하여 삼신론 이단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교리를 ‘이단적 상호내주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정통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달려 들었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성육신 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동사시재[제]가 현재임)(요1:18),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요3:13) 같은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인자’는 ‘위격’을 가리킴으로 ‘본질상의 상호내재’ 혹은 ‘편재’ 와는 무관하다.)” 무관하다니? 누구 맘대로? 성자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인 편재와 무관하실 수 있는가? 아들이 하늘에 계시든, 물 위를 걸어가시든, 오병이어를 손에 쥐시고 축사하시든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속성과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신적 본질이 없는 위격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도대체 이 무슨 괴이한 말인가? 신적 본질을 생각함이 없이 위격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영혼은 빼고 몸만 드리라는 것인가? 이것은 정당한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괴상망측한 이단 사상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와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우롱하려 들다니!

삼위의 본질적 연합을 분리된 위격으로 착각하는 이단 교리

지방교회: 그 결과 삼위 중 한 위격 안에 다른 두 위격들이 상호내주하심으로, <한 위격은 곧 세 위격들 전체 곧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방면을 김목사는 부인한다. 바로 이런 점이 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가 ‘분리된 세 위격들’을 주장하는 ‘잠재적 삼신론’ 신봉자로 보이는 이유이다. 이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스트롱, 로뢰인 뵈트너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반박: 위에 있는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표현에는 이단 사상(異端 思想)이 들어 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동일 본질을 가지신 삼위를 믿는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위격으로는 삼위로 구별되어 존재하시나 본질로는 하나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삼위일체론에는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에서 ‘분리된 위격들’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 교리로 정죄한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본질상 한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는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이다! 정통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 안의 다른 삼위(The thre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는 목적과 그들의 생각에 있어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one in essence)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one in their essential nature).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8)

그루뎀의 말처럼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혹은 본질상) 하나이시다. 삼위는 ‘편재의 신적 특성’을 포함한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다. 따라서 삼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분리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성부가 하늘에 계시고 성자가 물 위에 계시며 성령이 공중에 계시는 것으로 성경이 묘사를 한다 해도(마 3:16-17), 그것은 성경이 삼위의 공간적 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볼 때 삼위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한 본질의 삼위는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성경적 견해 위에 기초해 있고, 따라서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와 사상이 존재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런데 지방교회가 이런 정통 삼위일체론을 가리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위에서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 . .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김 목사의 주장이 어거스틴의 주장과 크게 다른가? 친절하게도(?) 지방교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까지 다음과 같이 이미 기록해 놓았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즉 어거스틴에 의하면 제2위격이 오실 때 제1격과 제3격이 함께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어거스틴이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주론’의 개념에서 이렇게 말한 것인가? 물론 지방교회는 ‘그럼, 그렇고 말고!’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답을 얻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주장을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체를 강조하여 삼위일체가 다 함께 일한다고 하여도 위격들에게 고유한 사역을 배정하였다. 즉 삼위일체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장사되고 삼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그렇게 하셨다. 다시 삼위일체가 비둘기의 형체로 세례 받는 예수께 오신 것도 아니고, 주의 승천 후 오순절 날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있을 때, 삼위일체가 불의 혀같이 갈라짐으로 그들 각자 위에 오신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이 오셨다. 또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내가 이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다시 이것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삼위일체가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셨다(서철원, 교리사, 403).

위에서 보듯이 어거스틴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삼위일체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한다. 결국 지방교회는 어거스틴의 교리를 왜곡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삼위의 공간적 상호내주’(지방교회의 이단 교리)가 아닌 ‘삼위의 본질적 상호 내주’(정통 삼위일체론)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하는’ 정통 신학자들을 ‘이단’ 혹은 ‘참람한 이단’으로 정죄하는 ‘참람한 이단’이다.

지방교회: 2) 본질적인 방면에서의 위격의 동일시?: 지방 교회측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신 것도 김목사가 양태론으로 보고 있다고 반박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김홍기 목사)바울과 예수님은 지방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기능상으로 위격을 동일시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과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를 … 본질상 동일시하신 것이다.(9번 토론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1)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시다’. 혹은 (2)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김목사의 주장처럼 (3) (본질상) ‘성자는 성부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질상) 주님은 성령이시다(고후3:17).” 라고 하고, 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요14:9)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인가?

김목사는 자신의 이러한 이단적인 주장을 뒷받침 하려고 다음과 같은 웨인 그루뎀의 말을 인용 소개했다. “삼위일체 안의 구별된 삼위는 목적과 그들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해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이 하나 이시며 그들의 본성이 하나이시다”(Systematic Theology, 238).

“삼위일체 안의 구별된 삼위는 목적과 그들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해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8). 그러나 이 웨인 그루뎀의 말은 위 (1) 혹은 (2)를 말한 것이지, 결코 (3)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위격’과 ‘본질’을 혼동하는 이단은 지방 교회측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이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김홍기 목사 본인임이 드러난다.

반박: 지방교회는 필자가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것 때문에 필자를 이단 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지방교회는 필자와 동일한 견해를 말한 정통 신학자들을 다 이단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정통을 이단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통을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개인이나 종파는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명명백백한 이단이다!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정통 신학자들은 실제로 절대 다수인 것이다. 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인 찰스 핫지가 그 중 하나에 속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는 성령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들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 하나이시고 동일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이시고 동일한 존재(Being)이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의미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본질과 능력의 동일함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73)

여기서 핫지는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다.” 그는 ‘본질상 성자는 성령이시다’라고 말한다. 핫지는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말한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은 다름아닌 정통 신학자 찰스 핫지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과 필자가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것”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은 사실상 정통 신학자인 찰스 핫지의 말(‘본질상 성자는 성령이시다’)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핫지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처럼 불법적인 이유를 들어 정통 신학자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이다!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절대 다수의 정통 신학자들 중에는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인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박사도 포함된다. 그는 요한복음 10: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의 유사성(idenitity)이 있다. 왜냐하면 한 본질(one essence)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격들이 서로 안에서 또한 서로를 통해서 (영광스러운 상호간의 관계) 하나의 신적인, 자기 의식을 가진 생명 안에서 순간들로서(as moments)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되지 않으시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으신다. 그들은 본질상 동일하시지만,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신다(They are identical in essence, yet distinct in person.).(William Hendriksen,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29).

여기서 헨드릭슨은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동일하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필자가 표현한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은 바로 정통 신학자인 헨드릭슨의 말인 것이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는 말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은 사실상 정통 신학자인 윌리암 헨드릭슨의 말(‘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시다’)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처럼 자신들의 이단적인 사상을 근거로 정통 신학자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분명한 이단이다!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절대 다수의 정통 신학자들에는 또한 유명한 루터교 주석가인 리차드 렌스키(Richard C. H. Lenski)도 포함된다. 그는 요한복음 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위격으로는 둘이시지만  e[n즉 하나, 하나의 본질 혹은 우리가 선호하는 바와 같이 본질상 하나인 것이다”(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Gospel, 760).

여기서 렌스키는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이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필자가 표현한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은 사실상 정통 신학자인 리차드 렌스키의 말(‘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처럼 자신들의 이단적인 사상을 근거로 정통 신학자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이다!

지방교회는 위에서 웨인 그루뎀의 말의 ‘참된 의미’를 혼동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번역을 앞에 배치하고 필자의 번역을 뒤에 배치했다. 이 두 가지 번역은 후반부에서 차이가 난다. 먼저 지방교회의 번역은 “본질이 하나이시며 그들의 본성이 하나이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번역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로 되어 있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번역을 제시할 때는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전자는 자신들의 번역이고 후자는 김홍기 목사의 번역이라고 말해야 함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전혀 없이 두 번역을 연해서 나열해 놓았다. 원 세상에, 이렇게 글을 뒤죽박죽으로 쓸 수도 있는가? 그런데 글을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독자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루뎀의 진술에 대한 두 가지 번역이 위에 있다.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이 저자의 뜻에 부합하는가? 그것은 저자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직접 읽어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 “The thre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 are one not are one not only in purpose and in agreement on what they think, but they are one in essence, one in their essential nature.”(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8).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통 신학자 그루뎀은 “삼위일체의 구별된 삼위는 . . .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they are one in essence)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one in their essential nature)”라고 말했다. 필자의 번역은 그루뎀의 진술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볼 때 ‘위격’과 ‘본질’을 혼동하는 이단은 지방 교회측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이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김홍기 목사 본인임이 드러난다.”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자들은 삼위의 구별을 겉으로는 인정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 혹은 ‘성부와 성자는 하나’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는 말은 이단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고 한 말은, 위에서 본 바과 같이, 정통 신학자인 찰스 핫지, 윌리암 헨드릭슨, 리차드 렌스키, 웨인 그루뎀이 한 말과 동일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그루뎀의 진술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맞추기 위하여 불법적으로 또한 교활하게 번역을 했다. 그루뎀의 진술, 즉 “삼위는 . . . 본질상 하나이시며(one in essence)”를 “본질이 하나이시며”라고 번역을 했다. 이렇게 한 후에 그루뎀은 “본질이 하나이시며”라고 말했다고 ‘교리 사기’를 하고 있다. 그루뎀이 ‘본질이 하나이시다’라고 말하려 했다면 ‘one in essence’가 아니라 ‘one essence (혹은 one substance)라고 썼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여기서 명백하게 ‘교리 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루뎀의 진술까지 불법적으로 변개시키며 교리 사기를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명백하다.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는 진술을 이단 교리로 몰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렇게 교활하고 동시에 이렇게 어리석은 집단인가?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말처럼, 그루뎀의 영어 진술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간교하고 추악한 ‘교리 사기’를 자행한다는 말인가? 지방교회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는 집단인가? 어찌 이런 ‘명백한 교리 사기’를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백주에 저지르고 돌아다니는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 . .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위에서 분명히 본 바와 같이, 실제로 지방교회는 정통 신학자 그루뎀의 진술(“삼위는 . . .  본질상 하나이시며” 혹은 ‘본질상 성자는 성령이시다’)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다. 필자가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고 한 말은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지방교회는 이처럼 정통 신학자를 이단으로 몰아 세운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명백백한 이단이다! 한국교회의 정통 교단들이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완전히 합당한 조치이다. 지방교회가 ‘정통 신학자를 이단’이라 하고, ‘정통 교리를 이단 교리’로 매도하는 동안에는 지방교회를 이단에서 사면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성부가 성자와 본질상 하나’이시라는 진리는 웨인 그루뎀 박사뿐 아니라 여러 명의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옹호된다. 그 중 한 사람이 지난 세기의 유명한 칼빈주의 설교자요 신학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 박사이다. 그는 역사적인 필라델피아의 제10장로교회를 담임목사요 설교자로서  32 년 동안 섬겼고, 라디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했으며, 잘 알려진 저자였고, 복음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교계(evangelical and Reformed circles) 안에서 크게 쓰임을 받았던 설교자였으며, 성경의 무오성을 위한 국제위원회(Chairma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의 회장이었고, 복음주의 연맹(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s)의 창립 멤버였다.

제임스 보이스는 요한복음 10:30절(“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제목을 잡는다. “본질상 하나(one in essence).” 그리고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뜻하셨는가? 우리는 적어도 예수님은 그의 뜻에 관하여(in the matter of His will) 아버지와 하나이시라고 주장하셨던 것이라고 말함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 . 분명히, 그들은[유대인들] 그의 뜻에 관하여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을 주장하신 것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 그[아버지]와 하나이시라고 그[그리스도]가 주장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또한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와 같은 주장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후자는 완전히 신적인(fully divine)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할 때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시며(the Son is one in substance with the Father) 그들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equal)하시다. (James Montgomery Boice, The Gospel of John, vol. 3, 144-45)

여기서 정통 신학자 제임스 보이스는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시며(the Son is one in substance with the Father)”라고 주장한다. 보이스는 찰스 핫지와 웨인 그루뎀 및 필자와 동일한 표현과 개념을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 두 정통 신학자들은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위격’과 ‘본질’을 혼동하는 이단은 지방 교회측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이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김홍기 목사 본인임이 드러난다.” 이 진술은 지방교회의 이단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지방교회는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정통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인 것이다!

‘성부가 성자와 본질상 하나’이시라는 진리는 노먼 가이슬러 박사에 의해서도 주장된다. 가이슬러는 ‘삼위는 본질상 하나”이시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말씀은 ‘아들과 아버지가 본질상 하나이시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아들과 아버지는 경륜상 하나이시다’라고 말하는 지방교회의 주장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가이슬러는 ‘아들과 아버지는 경륜상 동일시된다’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아들과 아들의 동일함’을 주장하는 지방교회의 교리를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로 규정한다. 이에 대하여 지방교회는 반발하여 다음과 같이 거칠게 주장한다.

사실 ‘경륜적인 양태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표현이다. 만일 그럼에도 가이슬러가 위와 같은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가이슬러 자신이 사도 바울과 주 예수님까지도 양태론자로 정죄하는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될 것이다. (#8)

가이슬러가 바울과 예수님을 ‘양태론자’로 정죄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가이슬러는 다른 정통 신학자들처럼 정통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지방교회의 교리를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이런 가이슬러를 가리켜 “참람한 이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통 신학자를 ‘참람한 이단’이라 규정하는 지방교회는 분명히 ‘참람한 이단’인 것이다!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는 성자이시다”라는 말은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와 웨인 그루뎀과 제임스 보이스와 노먼 가이슬러가 말한 바로 그 말이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필자의 진술, 즉 “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는 말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은 사실상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찰스 핫지의 말(‘본질상 성자는 성령이시다’)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의 진술(“삼위는 . . . 본질상 하나이시며”)을 ‘이단 교리’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제임스 보이스의 말(‘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을 이단 교리로 정죄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윌리암 헨드릭슨의 말(‘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시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 정통 신학자인 리차드 렌스키의 말(‘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를 이단 교리로 정죄한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 신학의 보루인 노먼 가이슬러의 주장(‘본질상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을 이단 교리로 정죄한 것이다.

이제 무엇을 더 부가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따라서 정통 신학자들과 정통 교리를 ‘이단혹은참람한 이단’으로 매도하는 지방교회는 명명백백한 ‘참람한 이단’인 것이다! 누가 지방교회를 ‘참람한 이단’으로 만드는가? 바로 지방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는 지방교회의 참람한 이단 교리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은 한국의 정통 교파들은 하루속히 지방교회를 명백한 이단으로 규정하고 대내외에 공표해야 할 것이다!

교리적 교주들에게 교리적 노예로 종속된 삶

지방교회: 먼저 김목사는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와 관련하여, 워치만 니를 공격할 절대 기준으로 로이드 존스를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다수에 의해 무시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라고 김목사 본인이 실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절대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반박: 정통교회는 교리적 교주가 없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2명의 교리적 교주(니와 리)가 있다. 정통교회는 비판할 수 없는 신과 같은 교주가 없다. 그러나 정통교회는 비판할 수 없는 신과 같은 교주가 둘이나 있다. 정통교회는 위대한 사역자일지라도 숭배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2명의 교주를 숭배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비판을 받았다는 말은 그가 잘못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로부터 불법적인 비판을 많이 받으셨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잘못을 하셨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판한 자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 관한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필자는 필자의 가장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인 로이드 존스에 관해 말할 때 그가 받은 (잘못된 혹은 다른 견해로 인한) 비판을 언급한다. 필자는 로이드 존스를 완전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2명의 교리적 교주들에 대해 잘못한 것을 지적할 줄 모른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지적하지 못하고 또한 잘못한 것에 대해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지적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리적 교주들에게 교리적 노예로서 굴종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통교회와 지방교회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부분을 전체로 보는 지방교회의 심각한 사시(斜視)

지방교회는 성경 진리는 빼고 그리스도만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런 말을 하는 집단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방교회는 진리는 빼고 생명만 중시한다. 이런 치우친 생각을 하는 집단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존재할까? 진리의 부분을 보고 진리 전체라고 우겨대는 이러한 집단을 이 지구상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겠는가? 지방교회의 무가치한 변론에 대한 답변은 다음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무분별한 분리주의와 성경적인 성별주의를 혼동하는 큰 바벨론적 사고방식

지방교회: “이처럼 김목사가 속으로는 오만한 분리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을 조건없이 받아야 한다>는 ‘지방교회 원칙’을 독선적, 배타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적반하장이 아닌가?”

반박: 지방교회는 필자를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분리주의자로 옭아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분리주의와 성별(聖別)주의는 다른 것이다. 분리주의는 정당한 혹은 부당한 명분과 이유를 다 가질 수 있지만, ‘성별주의’는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성경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필자는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교파에 상관 없이 폭넓게 교제하며 협력한다. 또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포용한다. 그러나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들과는 동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성별(聖別)한다. 이것은 고결한 개혁자 존 칼빈과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입장이었다. 존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성별(聖別)에 관한 그의 신학적 관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분립과 이단의 혐의에 대한 방어(Defense against the charge of schism and heresy.) . . . 이제 이러한 친밀한 관계(communion)는 두 가지 끈, 즉 바른 교리(sound doctrine)와  형제 사랑(brotherly love)에 의해 함께 유지된다. . . .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unity of faith)에 상당히 의존되어 있으므로 믿음의 일치는 친밀한 관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결국은 친밀한 관계의 유일한 규칙이 되어야 한다. . . . 실로 바울이 우리가 동일한 것을 느끼고 동일한 뜻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곳 어디에서나, 바울은 즉시 ‘그리스도 안에’[빌 2:1,5] 혹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롬 15:5]라는 말을 추가한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는(apart from the Lord’s Word) 믿는 자들의 동의(agreement)는  없고 오직 악한 자들의 당 짓는 일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John Calvin, Institutes, 4.2.5, 1047).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영국교회 안의 자유주의의 심화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확산을 심히 우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성별에 관한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신앙고백(Confessions of Faith)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신조(Creeds)를 확고하게 믿는다. 현재 우리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 안에 있는 다수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이 바로 거기[신앙고백과 신조]인 것이다”(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433).

공식적인(official) 교회들 안에 있는 노골적인 불신앙이 표면화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사고 안에 미묘한 강조의 변화의 증거가 있다. 즉 창세기의 초반의 장들과 기적들에 관한 미진한(looser) 견해의 수용 및 서평에 있어서의 새로운 강조와 교리에 관한 무관심과 학식을 흡족해하는 경향이 있다. (Ibid., 433-34)

빌리 그래엄은 복음의 진리에 있어서의 일치가 없이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한 에큐메니칼 아이디어에 굴복했다. 그리고 그의 본보기는 필연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리면, 복음주의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사람들의 확신’을 흔들어 버리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영향력이 되었다. (Ibid., 440-441)

정통교회를 ‘영적 음행자’요 ‘배교자’요 ‘음녀’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으로 매도하는 이단성

지방교회가 위와 같은 ‘불법적인 용어들’로 정통 개신교회를 모독하는 것은 이단이라는 상투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통교회의 ‘정당성’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단적인 교회론(‘교회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교리’)에 기초하여 위와 같은 ‘불법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정통교회를 ‘불법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면서 지방교회는 ‘교파주의’를 공격하는 것일 뿐이라고 간교한 핑계를 댄다. 그리고 지방교회의 옹호자들은 지방교회의 이런 교활한 변명을 정당한 비판 없이 기꺼이 수용한다. 그러나 사실은 ‘교파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들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정조준 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가 정통교회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불법적으로 공격하는데 왜 정통교회는 지방교회를 그대로 용납하는가? 그렇게 해야 하는 정당한 논리적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지방교회가 정통 개신교회들을 가리켜 ‘영적 음행자요 배교자요 음녀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으로 모독하고 매도하는 동안에는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비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하다. 지방교회가 저런 불법적이고 이단적인 주장을 지속하는 동안에는 지방교회를 이단에서 사면해 주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지방교회가 그런 불법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정통교회를 ‘불법적으로’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은 특히 (경쟁력이 약할 수 있는) 개척교회들과 작은 교회들에게 재앙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께 드리는 감사(感謝)의 말씀과 미래 전망(展望)

그 동안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 주신 독자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또한 진리의 토론을 위한 소중한 장을 허락해 주신 <교회와신앙>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지난 9개월 간의 지방교회 비판과 토론은 여기서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일정 기간의 휴지(休止) 이후에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을 재개하려고 한다. 제가 바라기는 지금까지의 토론이 ‘망원경적 접근 방법’이었다면 향후 전개될 비판은 ‘현미경적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다양한 물품을 한꺼번에 제시하는 ‘백화점과 같은 접근 방법’이 아니라 한 품목에 대해 집중하는 ‘전문점과 같은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지방교회가 또 반론을 제기함에 따라 추가적으로 토론이 재개된다면 저는 하나하나의 주제에 대해 집중하여 완전히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하여 정오(正誤)를 분명히 가릴 때까지 그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유형의 ‘끝장토론’ 방식을 취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는 일에 일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한국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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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홍기 목사 소개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철학박사(Ph.D.)
미국 탈봇신학대학원(Talbot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석사 및 목회학 박사(M.Div., D.Min.)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WWW.21CHURCH.COM (신천지 관련 동영상 설교 69편, 지방교회 관련 동영상 설교 4편, 여러 이단 관련 동영상 설교가 유투브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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