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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용 박사와 가이슬러 박사는 완전히 일치한다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 교리 비판 - 재반론 ⑨
2016년 07월 26일 (화) 11:27:53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Ph.D., D.Min.,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경륜적 양태론’ 교리를 뒷받침 하기 위해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상습적으로 악용한다. 그 견해들 중 하나가 박형용 박사의 가르침이다. 박사는 ‘주는 영이시니’(고후 3:17)라는 말씀은 ‘구속적 역사적 의미’에서 아들과 성령을 동일시(同一視)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방교회는 박형용 박사의 이러한 가르침이 자신들의 ‘경륜적 양태론’ 교리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합동신학대학 대학원 총장 박형용 박사도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에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 본문을 중심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다룬 바 있다. 즉 그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R.B. Gaffin의 견해이기도 하다. (#5 반론 글).

지방교회는 위와 같은 말을 하며 박형용 박사와 Gaffin 박사가 자신들이 말하는 교리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실제로 박사와 지방교회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동일시(同一視)를 말하지만, 지방교회는 위격의 동일(同一)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격의 ‘동일시’(同一視)와 위격의 ‘동일함’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다’라는 말은 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동일시(同一視)를 말하지만, 지방교회는 위격의 동일시(同一視)를 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위격의 동일(同一)함을 말한다. 따라서 동일시와 동일함이 전혀 다른 것처럼, 박형용 박사의 ‘위격의 동일시’ (同一視)를 말하는 가르침과 지방교회의 ‘위격의 동일(同一)함’을 말하는 교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역사적 구속적 의미의 동일시’를 말하면서, 위트니스 리가 아래에 주장한 바와 같이, ‘위격의 동일함’(양태론 이단 교리)을 말한 적이 결코 없다.

그래서 그[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만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전체이시기도 하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1위격이신 아버지이시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2위격이신 아들이시다. 그리고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3위격이신 성령이시다(So He is not only the second person of the Triune God; He is also the whole God. He is the first person, the Father; He is the second person, the Son; and He is also the third person, the Spirit.).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2)

이처럼 리는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성령이시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제1위격이 제2위격과 제3위격이 다 된다면 삼위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삼위가 일위(一位)로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 박형용 박사가 말하는 ‘역사적 구속적 의미’에서의 아들과 성령의 동일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위격의 동일(同一)함이 아닌 위격의 동일시(同一視)를 말하려 한다면, 박형용 박사가 한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하고 혼동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 깊게 이 문제에 관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리의 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를 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위격의 동일함’을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리의 궁극적 목적은 ‘삼위의 동일함’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주지시키고 또 주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는 ‘본질상 동일’하시나 ‘위격상 구별’되신다. 삼위는’ 본질상 하나’이시나 ‘위격상 셋’이시다. ‘본질적 삼위일체’에서나 ‘경륜적(하나님의 역사하실 때의) 삼위일체’에서나 삼위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으시다! 가이슬러와 로즈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안의 차이(“경륜적” 그리고 “본질적” 같은)를 말하지만, 하나님 안에는 실재하는 그러한 구별이 전혀 없다(there are no such real differences in Him). 이 말은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들(His actions)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실 때 그분이 행하시기 전(prior to His actions)과 그분이 행하시는 동안(during His actions)과 그분이 행하신 후(after His actions)에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 . .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행동하실 때 그분이 소유하신 한 본질과 구별된 삼위의 참된 정체성(identity)을 잃지 않으신다(Geisler and Rhodes, 11).

삼위의 정체성은 (영원히, 어떤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아들이 역사하실 때 아버지나 성령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버지가 역사하실 때 아들이나 성령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 아버지나 아들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이슬러와 로즈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아버지는 예수님에 의해서 200번도 넘게 자신이 아닌 다른 분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약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구절 안에서 50번이나 넘게 구별된 분으로 보여진다(다음의 예를 보라. 롬 15:6; 고후 1:4; 갈 1:2-3; 빌 2:10-11; 요일 2:1; 요이 3). (Ibid., 9).

삼위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나 ‘경륜적’으로나 엄연히 구별된다. 삼위는 ‘경륜적’으로 동일시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삼위의 ‘경륜적 동일시’는 삼위의 ‘경륜적 동일함’이 결코 아닌 것이다! 삼위의 ‘경륜적 동일함’에 관한 교리는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 리가 말하는 것은 바로 ‘경륜적 동일시’가 아니라 ‘경륜적 동일함,’ 즉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 반면에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역사적 구속적 의미’의 동일시를 말하면서, 리가 아래에 주장한 바와 같이,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전환(轉換)’ 혹은 ‘위격의 탈바꿈’(진행적인 형태의 양태론 이단 교리)을 말한 적이 결코 없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즐기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 of one God)인 것이다. 예를 들면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된다. 한 본질이 세 가지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증기 단계가 될 때 그것은 우리가 들이마실 수 있게 된다.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4)

리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three Persons)가 아닌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결코 성경이나 정통신학의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삼위의 하나님이 ‘전환’(轉換) 혹은 ‘진화’(進化) 혹은 ‘탈바꿈’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개념도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나 정통신학의 개념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이슬러와 로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분의 하나님이 세 가지 단계 혹은 세 가지 연속적인 단계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진행적인 형태의 양태론(a progressive form of modalism)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2)

이처럼 삼위일체론에 관한 박형용 박사의 가르침과 지방교회의 교리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 큰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지난 글 ‘박형용 박사와 위트니스 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에서 철저하게 다루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박사의 가르침과 지방교회의 교리가 다르다는 사실은 교리적 논증뿐 아니라 박형용 박사의 직접적인 ‘증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필자는 최근에 박형용 박사께 서신을 드려 필자의 글(‘박형용 박사와 위트니스 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특히 박사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했는지를 판단해 달라고 질문을 드렸다. 이에 대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을 주셨다. “목사님이 저의 견해를 잘 대변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서신에서는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즈의 논문을 보내 드렸다. 이 논문을 읽어 보신 후 박형용 박사는 두 번째 회신에서 이렇게 쓰셨다. “Norm Geisler 의 article도 자세히 읽었습니다. 저는 가이슬러의 견해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또한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관해서는, “정통적인 견해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분명히 답변을 하셨다.

박형룡 박사의 답변이 명백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박형용 박사와 가이슬러 박사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전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이 두 정통 신학자들은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분명히 ‘비정통적인 견해’라는 사실에 관하여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가이슬러는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라고 다음과 같이 분명히 규정한다.

둘째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에 있어서 그들은 양태론의 새로운 하부 범주를 구성하는,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이단 교리(heresy)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교리는 비정통적인 것으로 배척되어야 한다”(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1).

정통 신학자 가이슬러 박사의 이러한 판정은 그러나 지방교회에 의해서 전적으로 거부된다. 더 나아가 지방교회는 거부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들에게 이단 판정을 내린 가이슬러에게 철저하게 보복한다. 이들은 정해진 수순을 따라 앙갚음을 한다. 이들의 보복의 첫 수순은 간교한 ‘이간질’을 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정통 신학자인 가이슬러를 소위 ‘전통주의자’로 몰아 붙여 다른 정통 신학자들과 이간시킨다. 그리고 다음에는 정통 신학자 가이슬러를 ‘참람한 삼신론 이단자’로 몰아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는다. 가이슬러 박사에 대한 지방교회의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필자의 이러한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결과 이들은 변명의 여지마저 ‘구조적’으로 차단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신봉자가 되었다. 가이슬러(김목사)는 이 한 가지만 보아도 함량 미달의 변증가에 불과하다.

먼저 가이슬러와 김목사는 사실상 ‘분리된 세 위격들’을 고집하는 자신들의 잠재적 삼신론을 기준으로, ‘주는 영이시다’(고후3:17)라고 바울처럼 말한 지방 교회측을 양태론이라고 정죄했다.

그[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측을 향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그것 또한 절대기준인 사도 바울과 배치되는 자신의 이단적인 기준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가이슬러가 CRI 와 지방 교회측을 향해 무슨 말을 했든지 그것들은 고려할 가치 조차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이것은 위격을 동일시 한 사도 바울(고후 3:17)과 주 예수님 자신(요14:9-11)까지 양태론 이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주 예수님까지 양태론자로 만드는 판단 기준이라면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 점이 가이슬러와 김목사가 아무리 지방 교회측을 향해 ‘경륜적 양태론’ 운운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위 네 항목들은 가이슬러가 최소한 지방 교회측에게는 전혀 전문가답지 않게 변증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김목사는 한국 교계를 향해 가이슬러가 대단한 변증가인양 계속 과대 광고를 하고 있다.

또한 김목사는 가이슬러의 학력과 경력을 장황하게 소개했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취만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이슬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믿기 보다는 자신의 조직신학 체계와 철학적 논리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다보니, 심지어 주 예수님까지도 양태론자라고 정죄하는 참람한 말을 한 셈이다.

가이슬러의 교회관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빗나간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볼 때, 가이슬러는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교회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실 ‘경륜적인 양태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표현이다. 만일 그럼에도 가이슬러가 위와 같은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가이슬러 자신이 사도 바울과 주 예수님까지도 양태론자로 정죄하는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이슬러(김목사)는 위트니스 리 글에서 ‘경륜적인 방면’의 언급들만 가져와서 양태론으로 오해하고, 정작 자신들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만 고집하여 잠재적 '삼신론'에 빠져 있는 것이 현재 처한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는 삼위를 사실상 분리시키는 자신들의 잠재적 삼신론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대목을 ‘양태론’으로 오해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CRI를 부당하게 정죄했다.

위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지방교회의 주장은 학술적인 논의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순수한 의견 개진은 더더욱 아니다. 위의 글에는 정통 신학자를 불법적인 이유를 들어 이단 몰이로 잡아 처형하겠다는 지방교회의 음험하고 명백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가이슬러와 로즈 박사 및 필자는, (지방교회에 관한 글에 있어서) CRI로부터 돈 받고 글을 쓰는 엘리옷 밀러나 (지방교회에 관한 글에 있어서) 역시 돈 받고 글을 쓰는 지방교회의 스태프들과 달리, (지방교회에 관한 글에 있어서) 돈 받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필자나 가이슬러와 로즈 박사가 지방교회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해서 아무도 우리에게 물질적 보상을 하지 않는다. 보상은커녕 도리어 세계적인 규모의 지방교회의 조직적인 보복으로 인한 박해와 중상모략과 수모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지방교회의 ‘원죄’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정통교회들로부터 박해 받고 있는 불쌍한 어린 양으로 가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먼저 이단으로 정죄한 ‘불법적인 이단 몰이꾼’이다. 물론 지방교회도 자신들의 견해, 심지어 이단적인 견해일지라도 발표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단 교리를 정통 교리로 만들기 위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할 권리는 결코 없다! 지방교회가 처음부터 ‘불법적인 이단 몰이’를 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를 순수한 마음과 좋은 자세로 주장했더라면 정통교회들로부터 이처럼 강력한 배척을 받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또한 지방교회가 정통 개신교회들을 공격할 때 ‘영적 음행자나 배교자나 음녀나 큰 바벨론이나 사탄의 조직’ 등과 같은 가혹한 용어들(이단들이 정통교회를 공격할 때 단골 메뉴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이런 불법적인 용어들의 사용을 철회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극심한 반대를 받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세계의 복음주의자들과 한국의 여러 정통 교단들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것은 자업자득인 것이다! 또한 지방교회를 향한 세계의 이단 연구가들의 지속적인 강력한 비판은 먼저 ‘불법적인 이단 몰이’를 시작한 지방교회가 스스로 심고 거둔 쓰디쓴 열매인 것이다.

박형용 박사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반면에 박형용 박사는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노먼 가이슬러 박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박형용 박사는 정통이요 가이슬러 박사는 “참람한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모순과 위선과 비겁함과 불평등과 불법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은 지방교회가 가이슬러 박사에 대하여 불법적인 ‘이단 몰이’를 하고 있다는 확증인 것이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박형용 박사는 가이슬러 박사와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므로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가이슬러 박사에 대한 지방교회의 모든 불법적인 비판은 박형용 박사에게 고스란히 돌려지게 된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가이슬러를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한 것처럼, 박사를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미국의 어떤 교파나 교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표방하지 않는 가이슬러의 경우와 달리, 박사가 속한 한국의 정통 교단과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로부터 받을 비판과 진노를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형용 박사의 견해를 이 논쟁에 끌어들여 악용한 측은 지방교회이다. 그러나 지방교회가 박사의 견해를 자신들의 이단적인 교리를 뒷받침 하는 일에 계속 악용하는 것을 (한국교회를 위해) 그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박사께 직접 연락을 드려 해명을 구했다. 이제 박형용 박사는 분명하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했다. 필자가 박사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목사님이 저의 견해를 잘 대변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라고 답변을 하셨다. 박사는 또한 “Norm Geisler 의 article도 자세히 읽었습니다. 저는 가이슬러의 견해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고 답을 하셨다. 그리고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관해서는, “정통적인 견해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분명히 입장을 표명하셨다.

지방교회가 정통 신학자의 견해를 악용한 경우는 비단 박형용 박사의 사례뿐이 아니다. 필자는 “교회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리 사기 문서”라는 글에서 지방교회가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왜곡하여 악용한 여러 가지 예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자세히 논했다. 이 글과 필자의 다른 글들에는 지방교회의 반론에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동일한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일한 주제와 내용들을 더 이상 재론하지 않기로 한다.

지방교회는 더 이상 박형용 박사나 Richard B. Gaffin 박사의 견해를 자신들의 이단적인 ‘경륜적 양태론’을 뒷받침 하는 데 악용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지방교회가 이런 신학적 불법을 또 다시 자행한다면 필자나 지방교회의 비평가들로부터 ‘교리 사기꾼’이라는 엄중한 비판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박형용 박사나 Gaffin 박사처럼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를 주장하는 한국이나 외국의 다른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지방교회의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를 뒷받침 하는 데 악용해서도 안 된다! 이런 행위 또한 ‘교리 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불러올 것이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왜곡하여 지방교회의 이단적 교리를 옹호하는 일에 더 이상 악용하지 말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아래의 글(해명과 수정)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글(지방교회는 교리 사기를 전문하는 집단인가)에 있는 것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해명과 수정

필자는 지난 글(#9: 이단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방교회)에서 한 가지 문장[(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을 부주의함으로 빠뜨렸다. 아래는 이 문장이 빠졌을 때와 들어 있을 때를 비교한 것이다.

오류가 없는 문장: 결국 이 말은 (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오류가 있는 문장: 결국 이 말은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물론 오류가 있는 문장은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공개적으로 필자의 부주의함을 인정하고 수정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문장을 수정한다고 해서 필자의 신학적 입장이 바뀌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부주의함으로 빠진 문장[(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이 들어가야 필자의 신학적 입장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수정을 함으로 해당 단락에 나타난 필자의 신학적 입장과 수정된 문장이 완벽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에 대한 필자의 신학적 입장은 이미 위에서 충분히 설명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수정된 문장이 들어 있는 단락 전체를 여기 인용하도록 한다. [아래의 단락의 전후 단락을 살펴 보기 원하는 독자들은 필자의 글(#9: 이단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방교회)을 참조하기 바람]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다섯 번째 진술만을 다루기로 한다. 이 진술은 지방교회의 이단 교리를 기초로 한 것으로 가이슬러 박사와 필자의 정통신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새빨간 교리 사기’를 한 것이다. 필자는 거듭해서 ‘위격상 구별된 삼위와 본질상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주장해 왔다! 우리는 위의 진술에서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라는 말에서 명백한 이단 사상(異端 思想)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지방교회가 말하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말이다(예: 아버지와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아들 홀로 이 땅에 오심). 달리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 혹은 ‘분리된 세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異端)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에 따른 ‘공간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한다. 결국 지방교회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본질로서의 불가분리(不可分離)한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다(정통 삼위일체론) 해도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삼위가 상호간에 공동 거주하시며 그들의 활동들 안에서 서로 너무 어우러져서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으로 일컬어짐으로 한 인격으로 간주됨)을 믿지 않으면 ‘분리된 삼위’를 믿는 것이며, 이것은 곧 삼신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삼위의 하나됨은 ‘삼위의 동일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상호 공동거주(삼위의 상호내주)’에 있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서 이 말은 지방교회가 (정통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삼위의 본질상 하나됨’을 부정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 말은 (이단적인 지방교회의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 같은 지방교회의 이단적 주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에 그 단서가 들어 있다.

아래에 있는 세 가지 주제의 글은 ‘해명과 수정’과 관련해서 쓰여진 것임으로 여기 인용하도록 한다.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한 사례 

지방교회: “이처럼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말하는 본문을 근거로, 사실상 <장소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강조하면,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 즉 삼신론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반박: 지방교회는, 위에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말씀을 가리켜 “<장소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세(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즉 지방교회는 성경 말씀을 가리켜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소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말과 개념은 삼위 하나님의 ‘편재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삼신론 이단 사상’이다. 달리 말하면 지방교회는 ‘성경 말씀을 삼신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 볼 때 삼위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삼위는 ‘편재의 신적 특성’을 포함해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다. 따라서 삼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분리되실 수 없다. 성부가 하늘에 계시고 성자가 물 위에 계시며 성령이 공중에 계시는 것으로 성경이 묘사를 한다 해도, 그것은 성경이 삼위의 공간적 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늘에 함께 계시고, (본질적으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물 위에 계시며, (본질적으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공중에 함께 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동일한 본질이 나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삼위는 동일 본질 안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 그러나 ‘위격의 나타나심’은 다른 것이다. 마 3:16-17의 말씀은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정통교회는 마 3:16-17에서 ‘삼위의 구별된 나타나심’과 (동시에) ‘삼위의 본질적 하나됨’을 본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그들의 (이단적 상호내주론에 의거하여) 마 3:16-17에서 “<장소적으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본다. 이런데도 지방교회를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출처: (Norman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reation, p. 298)

 지방교회의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표현에 담긴 이단 교리

지방교회: “더구나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은, 성육신 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동사시재[제]가 현재임)(요1:18),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요3:13) 같은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인자’는 ‘위격’을 가리킴으로 ‘본질상의 상호내재’ 혹은 ‘편재’ 와는 무관하다.)”

반박: 여기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말은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이라는 말은 성경의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자세를 비판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진술 자체를 비판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마 3:16-17을 지방교회는 이렇게 이해한다. 즉 (위격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아들과 성령이 계시고, (위격적으로) 동시에 물 위에 계신 아들과 함께 아버지와 성령이 계시며, (위격적으로) 동시에 공중에 계신 성령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이 계신다.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늘에 함께 계시고,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물 위에 계시며,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공중에 함께 계시는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구별된 위격과 (본질상) 하나됨’을 믿는다. 또한 삼위의 나타나심이 어떠하든지, 예를 들어 마 3:16-17의 경우에도,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원천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한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성경의 진술을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삼위의 구별된 나타나심과 본질상 하나이심’을 굳게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세 분리된 위격들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정통 삼위일체론을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주론’에 기초하여 삼신론 이단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교리를 ‘이단적 상호내주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정통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달려 들었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성육신 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동사시재[제]가 현재임)(요1:18),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요3:13) 같은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인자’는 ‘위격’을 가리킴으로 ‘본질상의 상호내재’ 혹은 ‘편재’ 와는 무관하다.)” 무관하다니? 누구 맘대로? 성자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인 편재와 무관하실 수 있는가? 아들이 하늘에 계시든, 물 위를 걸어가시든, 오병이어를 손에 쥐시고 축사하시든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속성과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신적 본질이 없는 위격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도대체 이 무슨 괴이한 말인가? 신적 본질을 생각함이 없이 위격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영혼은 빼고 몸만 드리라는 것인가? 이것은 정당한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괴상망측한 이단 사상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와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우롱하려 들다니!

삼위의 본질적 연합을 분리된 위격으로 착각하는 이단 교리

지방교회: 그 결과 삼위 중 한 위격 안에 다른 두 위격들이 상호내주하심으로, <한 위격은 곧 세 위격들 전체 곧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방면을 김목사는 부인한다. 바로 이런 점이 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가 ‘분리된 세 위격들’을 주장하는 ‘잠재적 삼신론’ 신봉자로 보이는 이유이다. 이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스트롱, 로뢰인 뵈트너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반박: 위에 있는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표현에는 이단 사상(異端 思想)이 들어 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동일 본질을 가지신 삼위를 믿는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위격으로는 삼위로 구별되어 존재하시나 본질로는 하나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삼위일체론에는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에서 ‘분리된 위격들’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 교리로 정죄한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본질상 한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는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이다! 정통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 안의 다른 삼위(The thre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는 목적과 그들의 생각에 있어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one in essence)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one in their essential nature).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8)

그루뎀의 말처럼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혹은 본질상) 하나이시다. 삼위는 ‘편재의 신적 특성’을 포함한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다. 따라서 삼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분리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성부가 하늘에 계시고 성자가 물 위에 계시며 성령이 공중에 계시는 것으로 성경이 묘사를 한다 해도(마 3:16-17), 그것은 성경이 삼위의 공간적 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볼 때 삼위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한 본질의 삼위는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성경적 견해 위에 기초해 있고, 따라서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와 사상이 존재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런데 지방교회가 이런 정통 삼위일체론을 가리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위에서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 . .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김 목사의 주장이 어거스틴의 주장과 크게 다른가? 친절하게도(?) 지방교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까지 다음과 같이 이미 기록해 놓았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즉 어거스틴에 의하면 제2위격이 오실 때 제1격과 제3격이 함께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어거스틴이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주론’의 개념에서 이렇게 말한 것인가? 물론 지방교회는 ‘그럼, 그렇고 말고!’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답을 얻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주장을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체를 강조하여 삼위일체가 다 함께 일한다고 하여도 위격들에게 고유한 사역을 배정하였다. 즉 삼위일체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장사되고 삼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그렇게 하셨다. 다시 삼위일체가 비둘기의 형체로 세례 받는 예수께 오신 것도 아니고, 주의 승천 후 오순절 날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있을 때, 삼위일체가 불의 혀같이 갈라짐으로 그들 각자 위에 오신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이 오셨다. 또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내가 이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다시 이것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삼위일체가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셨다(서철원, 교리사, 403).

위에서 보듯이 어거스틴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삼위일체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한다. 결국 지방교회는 어거스틴의 교리를 왜곡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삼위의 공간적 상호내주’(지방교회의 이단 교리)가 아닌 ‘삼위의 본질적 상호 내주’(정통 삼위일체론)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서방 정통 신학자들이 신봉하는 ‘삼위의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는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삼위의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하는 소수의 정통 신학자들은 ‘한 본질의 삼위’를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말하는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한다.

‘삼위의 상호내주’를 신봉하는 소수의 정통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essential unity)은 신적 속성의 내적인 동등함과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에서 오는 강렬한 인격적 통일성(personal unity)에서 발견된다”(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고 주장한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주’가 아니면 ‘삼위의 분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삼위의 본질적 하나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지방교회의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이단 교리로 규정하는 것이다.

댈러스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스코트 호렐에 따르면, “동방정교의 전통에 속한 많은 사람들과 서방교회 안의 점증하는 학자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하고 있다”(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 즉 서방교회 안에서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믿는 학자들은 다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통 신학자들이 ‘삼위의 실제적 상호내주’를 신봉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이는 그들이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를 믿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를 신봉하지 않고 있는데 마치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왜곡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학문적 사기  및 교리 사기 행위가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를 지지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밝히지 않은 채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삼위의 상호내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것은 지방교회가 학문적 사기 혹은 교리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물증이 된다! 앞으로 만약 지방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지 않은 채 그들을 ‘삼위의 상호내주’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둔갑시킨다면 필자는 지방교회를 가차 없이 ‘교리 사기꾼’이라고 비판할 것이! 지방교회가 그들의 글에서 반복해서 인용하는 정통 신학자들의 삼위일체에 관한 아래와 같은 견해들은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A. H.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p.332-333).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4)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69쪽, 성문).

 “주기도문에서 … ‘아버지’라는 단어는 … 배타적으로 첫째 위격만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107).

아래의 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정통 신학자인 그루뎀은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를 믿는 학자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한국교회의 모든 독자들에 의해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그의 역저(力著)인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아래는 그의 책에 있는 한 단락을 필자가 번역해서 인용한 것이다. 아래의 글은 위에 인용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어떻게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리되지 않는 존재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존재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 . . 첫째, 각 위격은 전적으로(completely) 그리고 완전히(fully)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중요하다. 말하자면 각 위격은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존재의 모든 충만(the whole fullness of God’s being)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아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 혹은 단지 하나님의 삼분의 일이 아니시다. 아들은 완전히 그리고 충분히 하나님(wholly and fully God)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각 위가 하나님의 오직 삼분의 일임을 나타내는 도표 14.1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 . . 도리어 우리는 아버지의 위격(the person of the Father)은 그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whole being of God)를 소유하고 계시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함께 말할 때 우리는 아버지 혼자, 혹은 아들 혼자, 혹은 성령 혼자에 관해서 말할 때보다 어떤 더 큰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all of God’s being)이시다. 아들 역시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52).

지방교회의 소위 ‘신격’에 관한 참람한 이단 교리

지방교회의 소위 ‘신격’과 관련된 지방교회의 반론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교회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리 사기 문서”라는 글에서 답변을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인용하기로 한다.

지방교회: “우리는 먼저  골로새서 2장 9절에 단 한번 언급된 ‘신격’(神格)(데오테스, 2320)이 로마서 1장 20절이 말하는 신성(데이오테스, 2305)과 전혀 다른 단어임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신격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라고 할 때의 '오직 하나’에 해당되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전체가 포함된 개념인 반면, 신성은 그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킨다. . . . 이 신격(Godhead)개념은 김홍기 목사를 포함하여(그는 골2:9의 데오테스를 위 ‘신성’으로 오해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 같다. 그러나 김석환 박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닛사의 그레고리와 가이샤랴의 감독이었던 바실(Basil, 330-379)의 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 . (바실)성경은 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하는 어디서나 신격을 단수로 말한다. … 내가 한 신격을 고백한다고 비난하는 이 비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위의 책, 144쪽). . . . 따라서 이러한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조 3장 2절도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라고 이 세 개념을 각각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반박: ‘Godhead’라는 단어는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 나오는 단어로서 신약의 세 구절(행 17:29 ; 롬 1:20 ; 골 2:9)에서 사용되었다. 개정 성경은 Godhead를 하나님(행 17:29), 신성-神性(롬 1:20), 신성(골 2:9)로 번역해 놓았다. 이스턴 성경사전(Easton's Bible Dictionary)에 따르면 Godhead는 “본질적 존재 혹은 하나님의 본질”(the essential being or the nature of God)을 가리킨다. 또한 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B.Warfield)에 따르면, “그것[Godhead-神性]의 인정된 어법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의 가르침에서 그것[Godhead]의 공통의 소유를 공유하는 세 ‘휘포스타시스’ 혹은 세 ‘위격’과 구별하여, 그와 같이 신적 본질(the Divine essence)을 가리키는 것이다. . . . 이러한 어법으로 그 단어는 오랫동안 기술적인 용어의 지위를 지켜왔다. 예를 들어 . .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6 (Godhead 안에 삼위가 계시다)”(International Standard Encyclopedia of the Bible).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Godhead’는 ‘하나님의 본성 혹은 본질’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어법(語法)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는 불법적으로 Godhead를 사용한다. 즉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Godhead를 자신들이 창안한 불법적 개념인 소위 ‘신격’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본질’을 ‘삼위의 상호내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이렇게 어법까지 제멋대로 바꾸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불법적인 해석이며, 이러한 형태의 불법적인 해석은 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치명적인 혼동을 유발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Godhead(神性)를 ‘하나님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는데 지방교회는 이것을 불법적으로 ‘신격’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본래 웨스트민스터 신조 3장 2절은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본성)의 단일성 안에 하나의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가 계시다”(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라고 번역하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불법적인 ‘신격’ 개념을 따라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라고 번역하고 개념을 바꾸어 버렸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본성’을 ‘삼위의 상호내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지방교회가 말하는 ‘신격’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불법적 해석인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번역 시 사용한 ‘신격’이라는 말은 (벤자민 워필드가 말한 것처럼) 신성(神性)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방교회가 말하는  ‘신격’은 삼위의 상호내주를 뜻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김석환 교수의 책에 인용된 바실에 관한 말도 제멋대로 왜곡하고 불법적으로 해석했다. 지방교회는 바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바실)성경은 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하는 어디서나 신격을 단수로 말한다. … 내가 한 신격을 고백한다고 비난하는 이 비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지방교회는 여기 ‘신격’이라는 말은 자신들이 창안한 ‘신격’과 동일 개념인 것처럼 교리 사기를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보면 지방교회가 속인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문맥을 통해 바실의 말을 이해하도록 해보자.

김석환은 바실의 말을 인용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속해서 바실은 자기가 신적 본성의 단어들을 단수로 사용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144). 따라서 김석환은 다음에 올 바실의 말은 신적 본성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제 바실의 말 전체를 인용해 본다.

두 번째 비난에 대하여, 성경은 신격[신적 본성-神的 本性]에 대하여 언급하는 어디서나 신격[신적 본성]을 단수로 말한다. 가령 ‘그 안에는 신격(qeo,thj, Godhead)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qeio,thj)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등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만일 신격들을 증가시키는 것이 다신교 오류의 희생물들의 특별한 표시이고 또 신격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무신론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일진대, 내가 한 신격[신적 본성-神的 本性]을 고백한다고 비난하는 이 비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Ibid., 144)

이처럼 바실의 신격에 관한 언급은 ‘신적 본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지방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속여서 카파도기아 교부 바실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창안한 개념인 ‘신격’과 동일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속인 결과는 참람한 이단 교리로 나타난다! 지방교회가 위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따라서 이러한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조 3장 2절도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여기 단일한 신격은 ‘한 신격’ 혹은 ‘한 인격’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일위(一位) 안에 삼위(三位)가 계신다’는 말이 된다. 지방교회여, 참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3장 2절이 이런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

지방교회는 Godhead에 관한 어법을 제멋대로 불법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Godhead는 ‘하나님의 본성(the Divine essence)’을 뜻하는데 이것을 ‘위격(person)’으로 함부로 불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을 위격으로 불법적으로 바꾸어 놓으면 괴물 같은 이단 교리가 나온다.즉 ‘하나님의 본성(essential nature)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정통 교리가 ‘하나님의 한 위격(a person) 안에 삼위(three persons)가 계시다’는 이단 교리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의 이단 교리의 흉악한 실상이요 참담한 종착역인 것이다! 

박윤선 박사와 관련된 주장에 관한 천부당만부당한 사과의 요구에 대하여   

지방교회는 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기 앞서 자신들의 글 쓰는 방법부터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아래에 인용된 글은 문제의 발단이 된 지방교회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이 문장은 지방교회의 글(‘지방 교회측은 정통이고 성경적이다-삼일 하나님부터 새 예루살렘까지’)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여기서 박윤선 박사가 Godhead를 “단일한 신격”으로 번역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단일한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라고 한 웨스트민스터 신조 3장 2절에서, 우리는 두 개념의 조화를 볼 수 있다(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 23쪽).

여기서 박윤선 박사가 말한 것은 무엇이며 이 글을 쓴 김바울 사역자가 말한 것은 무엇인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박윤선 박사가 인용 부호 안의 말을 했다면 인용 출처(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 23쪽)를 인용 부호 바로 다음에 붙여 놓아야 인용 부호 안의 말을 박사가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위의 문장은 뒤죽박죽으로 쓰여 있어서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이런 혼동시키는 글을 마구 써대는 지방교회는 혼동의 ‘큰 바벨론’이라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글을 뒤죽박죽으로 써 놓고 이 글의 뜻을 왜곡했다고 함부로 비판해도 되는가? 지방교회는 필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무책임한 말을 마구 쏟아내어도 괜찮은가? “김목사가 아래와 같이 근거 없는 막말을 함부로 쏟아내어 공개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지방 교회측의 평판에 먹칠을 한 것에 대하여, 지방 교회측은 김홍기 목사가 다음 글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김목사가 양심이 깨어있는 사람인지 지켜보겠다.”

아래에 인용된 바와 같이 지방교회가 이후에 공개한 자료(반론 #9)는 박윤선 박사가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한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박윤선 박사가 쓴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 23쪽에 소개된 박윤선 박사 본인의 관련 번역은 다음과 같다.'본질상 단일하신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누구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

지방교회가 처음부터 이렇게 제대로 썼다면 위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지방교회에 있다! 필자는 추후 적절한 시점에 지방교회의 글에서 비롯된 오류를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필자에게 사과해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지방교회는 다음에 글을 발표할 때 위와 같은 무책임한 발언을 한 것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반드시 사과하기 바란다!

그런데 번역한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번역한 용어에 관한 ‘개념’이다. 그러면 박윤선 박사(1905-1988)가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했다면, 그 ‘신격’이라는 용어를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박윤선 박사는 칼빈주의의 신학적 전통을 따라 Godhead를 이해하고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Godhead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아래의 인용문은 두 명의 저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의 견해를 보여준다. 아래의 이스턴 성경사전의 저자 M. G. Easton(1823-1894)은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 신학자이고, B. B. Warfield(1851-1921)는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이다. 박윤선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Godhead에 관하여 이 두 칼빈주의 신학자와 동일한 견해, 즉 Godhead는 신성(神性)을 뜻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스턴 성경사전(Easton's Bible Dictionary)에 따르면 Godhead는 “본질적 존재 혹은 하나님의 본질”(the essential being or the nature of God)을 가리킨다. 또한 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B.Warfield)에 따르면, “그것[Godhead-神性]의 인정된 어법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의 가르침에서 그것[Godhead]의 공통의 소유를 공유하는 세 ‘휘포스타시스’ 혹은 세 ‘위격’과 구별하여, 그와 같이 신적 본질(the Divine essence)을 가리키는 것이다. . . . 이러한 어법으로 그 단어는 오랫동안 기술적인 용어의 지위를 지켜왔다. 예를 들어 . .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6 (Godhead 안에 삼위가 계시다)”(International Standard Encyclopedia of the Bible).

정통 신학자들이 말하는 ‘개교회’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소위 ‘지방교회’는 완전히 다르다

정통 신학자들이 말하는 ‘개교회’는 ‘우주(보편)적인 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개교회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요 우주(보편)적인 교회는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개교회는 ‘가시적’인 것이요 우주(보편)적인 교회는 ‘불가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가 말하는 소위 ‘지방교회’는 성경에 전혀 없는 개념이다. 성경은, 지방교회가 제멋대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지방의 이름을 따라 교회 명칭을 붙이라고 명한 적이 결코 없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행 11:22)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를 묘사한 것이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지방의 이름을 따라 교회 명칭을 붙여야 한다는 명령이 결코 아닌 것이다! 즉 성경에 있는 교회 명칭들(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등)은 서술적인(descriptive) 것이지 지시적인(prescriptive)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교회 명칭을 지역(혹은 지방) 이름을 따라 부르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지방교회의 주장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것이다! 또한 지역 명칭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교회 명칭을 붙이는 것은 ‘분열의 죄악이요 영적 음행’이라는 지방교회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확실한과대망상’(誇大妄想)인 것이다! 물론 지방교회는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그러나 지난 1년 간 지방교회는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할 여러 번의 기회를 가졌으나 변변한 주장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매번 꽁무니를 빼곤 했다. 지난 번에는 이메일을 보내 “꽁무니를 뺀다”는 필자의 표현에 항의를 표했으나, 성경에 나오는 교회 명칭이 서술적인 것이 아니요 지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적 증거를 가져오면 언제든지 다음 글에 반영하겠다고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또 “꽁무니를 뺀 것”이다!    

지방교회는 성경이 명하지 않은 바를 정통교회에게 불법적으로 강요하고 있고, 성경 대로 믿고 실천하는 정통교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불법적으로 비판하는 악한 죄를 범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위격의 동일시’를 ‘위격의 동일함’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묘사적인 것’을 성경의 ‘지시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동일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동일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단순한 묘사’를 ‘절대적 명령’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오해와 착각은 사소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상 지방교회의 여러 이단 교리들은 이러한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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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홍기 목사 소개

  •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철학박사(Ph.D.)
  • 미국 탈봇신학대학원(Talbot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석사 및 목회학 박사(M.Div., D.Min.)
  •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
  •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 WWW.21CHURCH.COM (신천지 관련 동영상 설교 69편, 지방교회 관련 동영상 설교 4편, 여러 이단 관련 동영상 설교가 유투브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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