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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용 박사와 위트니스 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 교리 비판 - 재반론 ⑥
2016년 07월 04일 (월) 23:41:33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Ph.D., D.Min.,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의 반론은 동일한 내용을 말을 조금씩 바꾸어서 지루하게 또한 비생산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내용의 반박은 앞에 배치하도록 한다. 또한 동일한 반론 내용에 대한 반박은 (선별하여) 지난 글들에서 자료를 발췌하여 인용토록 한다.

박형용 박사(위격의 경륜적 동일시)와 위트니스 리(경륜적 양태론)의 근본적인 차이

지방교회: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는 1) 이사야 9장 6절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처럼 성경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이고, 2) 박형용 박사,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개핀 박사 등 정통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했다.”

반박: 박형용 박사가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륜적으로) 동일시 한 것은 지방교회가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부를 동일시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박형용 박사는 “주는 영이시니”(고후 3:17)라는 말씀을 해석하며 일정한 범주를 설정한다. 즉 그리스도와 성령은 (구속적 역사적 의미에서) 동일시된다고 말한다. 여기 박사의 말을 직접 인용하도록 한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을 고찰할 때 주와 성령을 동일시하여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라고 말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 했을 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와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 . .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 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박형용, 主는 靈이시다, http://www.localchurch.kr/23379)

여기 구속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관련된 것이라는 뜻이며, 역사적이라 함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주관하시는 새 시대와 연관된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성령의 시대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성령과 동일시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박사에 의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동일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자들의 생명과 관련하여,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8:11).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3:4). 그리고 신자들의 율법 이행과 관련하여, 성령은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8:2). 또한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10:4). (박형용, 主는 靈이시다, http://www.localchurch.kr/23379)

박사는 정통 신학자답게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 했을 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제2위격이신 그리스도를 제3위격이신 성령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박사는 또한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 . .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이런 특정한 범주(구속적 역사적 의미) 안에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제2위격이신 그리스도를 제3위격이신 성령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갑과 을을 동일시(同一視)한다는 것은 갑과 을이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다’라는 말은 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철수는 동물에 대한 동일시가 강했다(철수 had an intense identification with animals.)’라는 말은 철수가 동물과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 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 박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적 역사적 기능이 동일시(同一視)되어진다는 말을 한 것이지,  제2위격이신 그리스도가 제3위격이신 성령과 동일한 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박사는 어거스틴이 말한 바, “성부 자신을 성자와 성령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301)는 말의 뜻을 인지하고 있다. 또한 “삼위를 혼동하지 말며, 본질을 나누지 말라”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유의하고 있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1670).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를 말하면서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라는 말을 사용하나 실제로는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전환(轉換)’ 및 ‘위격의 동일함’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직접 읽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게다가 고전 15:45은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물론 성육신하신 주 예수이시고, 살려 주는 영은 물론 성령이시다. . . . 주님은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 후에 생명을 주는 성령이 되셨다. 요 14:16-20에 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 점을 확증한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다른 보혜사, 즉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실제의 성령(the Spirit of reality)이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17절에서 주님은 실제의 성령이 ‘너희와 함께 거하며 너희 속에 계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한다. . . .  워치만 니 형제는 찬송가 490장 5절에서 ‘주님[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전에 아버지로 칭함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칭함을 받으신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워치만 니]는 그의 찬송에서 주님[예수 그리스도]을 성령으로뿐 아니라 아버지로도 칭했다.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0)

여기서 리가 말하는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분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신 분은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말하고,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라고 말한다. 어거스틴도 “말씀이라는 용어는 성자에게만 사용되고”(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301)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보거나 정통신학으로 보거나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리도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 아담은 물론 성육신하신 주 예수이시고”라고 위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리는 또한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 주님은 . . . 말씀한다”라고 말했고, “18절에서 그는 . . . 말씀한다”라고 진술했다. 이 말들은 리가 위에서 말한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17절과 18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혹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 14:1-2절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따라서 리는 ‘육신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한다.

위에서 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 되셨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워치만 니의 입을 빌려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한 분이라고 말한다. 즉 이것은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방교회는 이런 개념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그들은 이것을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일시’(同一視)는 ‘동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위격들의 특성(전유-專有-appropriation)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했다. “성부 자신을 성자와 성령이라고 생각하지 말라”(Ibid., 301).

박형용 박사는 동일시(同一視)와 동일함을 구분한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동일시(同一視)와 동일함을 같은 것으로 본다. 박사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말할 때 ‘위격의 동일함’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말할 때 ‘위격의 동일함’을 말한다. 또한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말할 때 비성경적인 개념들 즉 ‘위격의 진화, 위격의 탈바꿈, 위격의 전환’ 등을 말한다.

박사는 일정한 범위(역사적 구속적 의미) 안에서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논한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비성경적인 개념을 동원하여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말한다. 박사의 견해는 정통신학에 속한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관점은 이단 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탈바꿈이나 진화(進化)나 전환(轉換)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삼위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며(시 102:26-27; 말 3:6; 히 13:8; 약 1:17), 동일하시지 않고 구별되시기 때문이다(마 28:19; 요 1:1-2; 14:26; 16:7; 17:24; 롬 8:27 요일 2:1; 히 7:25). 이것은 본질적 삼위일체 안에서나 경륜적(혹은 기능적) 삼위일체 안에서나 그러하다.

지방교회의 이단 교리는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격의 진화(그리스도가 성령이 됨)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화와 동일시된다. 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즐기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 of one God)인 것이다. 예를 들면 얼음이 물이되고 물이 수증기가 된다. 한 본질이 세 가지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증기 단계가 될 때 그것은 우리가 들이마실 수 있게 된다(Likewise,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not three Gods but three stages of one God for us to possess and enjoy. For example, ice becomes water, and water becomes vapor—one substance assumes three forms. When it reaches the vapor stage, it is available for us to breathe in.).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4)

리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three Persons)가 아닌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결코 성경이나 정통신학의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삼위의 하나님이 ‘전환’ 혹은 ‘진화’ 혹은 ‘탈바꿈’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개념도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나 정통신학의 개념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이슬러와 로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한 분의 하나님이 세 가지 단계 혹은 세 가지 연속적인 단계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진행적인 형태의 양태론(a progressive form of modalism)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2)

앞서 리는 그리스도가 성령이 되셨다고 말한다. 제2위격이 제3위격으로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전환’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화 혹은 전환하는 그리스도와 삼위는 동일한 대상이다. 즉 그리스도는 삼위이시고 삼위는 그리스도이시다. 일위(一位)가 삼위(三位)이며 삼위가 일위라는 말은 결국 양태론의 개념이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리의 말에 의해 확증된다.

하나님이 육체가 되셔서 여러 과정들을 거치시고 마침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부활로 들어가셨다. 그 생명을 주시는 영은 그의 신성과 인성 및 그의 성육신과 인간으로서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God became flesh, passed through various processes, and eventually entered into resurrection to become the life-giving Spirit, who includes the elements of His divinity and His humanity, plus His incarnation, human living,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Witness Lee, Vessels Useful to the Lord, Chapter 12, Section 1)

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다. “삼위일체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장사되고 삼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그렇게 하셨다”(서철원, 교리사, 403). 하여간 리는 삼위와 그리스도를 동일한 분으로 간주한다. 즉 그리스도는 삼위이시고 삼위는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일위가 삼위이며 삼위가 일위라는 말은 결국 양태론의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리의 다음의 글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만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전체이시기도 하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1위격이신 아버지이시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2위격이신 아들이시다. 그리고 그[예수 그리스도]는 제3위격이신 성령이시다(So He is not only the second person of the Triune God; He is also the whole God. He is the first person, the Father; He is the second person, the Son; and He is also the third person, the Spirit.).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2)

삼위는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삼위는 본질상 동일하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리는 삼위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는 적절한 설명이 없이, 제2위격이신 아들이 제1위격이신 아버지이시며 또한 제3위격이신 성령이시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삼위(三位)의 구별이 없다. 오직 일위(一位)가 있을 뿐이다. 이는 구별된 삼위와 한 본질의 하나님을 말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

리는 이처럼 삼위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아들이 아버지도 되고 성령도 됨)은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는 ‘위격의 동일함’이 결코 아니다! 위격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유의 ‘위격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아들은 본질적으로 뿐 아니라 역사하실 때도 아들이신 것이다. 만약 아들이 역사하실 때는 아버지도 되고 성령도 된다면, 이것은 삼위(三位)가 아닌 일위(一位)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양태론(樣態論) 이단 교리인 것이다. 가이슬러와 로즈는 리와 지방교회의 이러한 ‘경륜적 양태론’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비판한다.

[지방교회의 양태론 교리에 따르면] 경륜적 삼위일체“본질적 삼위일체”에는 구별된 삼위가 계시지만, “경륜적” 삼위일체에는 삼위 사이에 구별이 전혀 없다(in the “economic” (operational) Trinit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m.). 삼위는 그들의 활동들 안에서 서로 너무 어우러져서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아들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이시며, 기타 등등. . . .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지방교회(그리고 CRI 변증가들)의 문제는 이것이다. . . .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에 있어서 그들은 양태론의 새로운 하부 범주를 구성하는,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이단 교리(heresy)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1)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말한다고 하면서 ‘위격의 동일함’을 말한다. 지방교회의 말을 보면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라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달리 말하자면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가 아닌 ‘위격의 동일함’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리는 ‘위격의 동일함, 탈바꿈, 진화, 전환’ 등과 같은 개념을 논하면서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리의 목표는 삼위가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는 (위격상) 동일한 분이 아니라 다른(구별된) 분이시다. 웨인 그루뎀 교수는 삼위의 구별(다름)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아버지가 아들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그들은 구별된 분들이시다(They are distinct persons). 또한 이것은 아버지는 성령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그들은 구별된 분들이시다. 그리고 이 말은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1)

삼위는 (위격에 있어서) 구별된 분이시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시다. 정통 삼위일체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주의 깊게 유지한다. 정통 신학자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를 말할 때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성자와 성령은 ‘역사적 구속적 의미’에서 동일시된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박사는 지방교회가 말한 바처럼 ‘그리스도가 성령이 되었다’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지방교회가 말한 것처럼, “그[예수]는 제1위격이신 아버지이시다. 그[예수]는 제2위격이신 아들이시다. 그리고 그[예수]는 제3위격이신 성령이시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라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위격의 동일함’ 및 ‘위격의 진화’ 혹은 ‘위격의 전환’ 혹은 ‘위격의 탈바꿈’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면 지방교회는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기 위해서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위격의 동일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면서 정통 삼위일체론이 주의 깊게 유지해 온 ‘한 본질 구별된 삼위’의 균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삼위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는 적절한 설명이 없이 ‘위격의 동일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함으로 성경과 정통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위격의 구별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지방교회는 삼위는 본질적 삼위일체 안에서 구별되시나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는 동일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삼위는 본질적 삼위일체 안에서 구별되실 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위격적 정체성에 있어서) 구별되신다. 달리 말하면 삼위는 경륜(사역 혹은 기능 혹은 활동)을 이루실 때도 (위격적 정체성)을 유지하신다. 아들은 역사하실 때 (아들의 위격적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구속의 역사를 행하실 때 동일시(同一視)될 수 있다. 즉 구속의 역사를 이루심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요 아버지는 아들로 동일시(同一視)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를 행하시는 중에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시(同一視)될지라도 (위격적 정체성은) 여전히 아들이신 것이다.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는 ‘위격의 동일함’이 아닌 것이다. ‘그 사업가는 전쟁과 사업을 동일시한다’라고 말했을 때, 이는 전쟁과 사업이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심에 있어서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시(同一視)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위격적 정체성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박형용 박사는‘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를 논할 때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同一視)’라는 말을 하면서 ‘위격의 동일함’ 및 ‘위격의 진화’ 혹은 ‘위격의 전환’ 혹은 ‘위격의 탈바꿈’을 강조한다. 이것이 박형용 박사와 지방교회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박형용 박사의 정통교리를 자신들의 이단 교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박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인 것이다! 

어거스틴, 찰스 핫지, 가이슬러, 로즈, 존 맥아더의 교리를 심각한 이단 사상으로 정죄하는 만용

지방교회: “김홍기 목사는 . . .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어거스틴과도 다른 잠재적 삼신론의 소유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어거스틴이나 A.H. 스트롱처럼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 모두의 오심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에게 각 위격들은 ‘온전한 하나님’(fully God)이 아니라 다른 두 위격들이 배제된 ‘1/3 하나님’이실 뿐이다. . . . 이들[존 맥아더 목사 포함]은 어거스틴이 고백한 “all in each” 대신, 두 위격들이 배제된 “제 3격 성령만”의 내주를 외침으로써 스스로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어거스틴과도 다름을 자백하고 있다. . . . 김목사는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처럼, ‘주기도문의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이시다.’(Our Father is Triune God)라고 결코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14:10)라는 주님의 말씀도 “본질의 상호 내재”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처럼 ‘내가’도 본질이고 ‘아버지께서’도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그 둘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식의 김목사의 상호 내재론은 결과적으로 ‘구별된 두 본질들’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이다.”

반박: 어거스틴은 필자와 같이 ‘삼위의 본질적인 상호 내주’를 믿는다. 어거스틴이 말한 “각자 안에 모두가(all in each)”는 ‘삼위의 본질적인 상호내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성도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본질상) 성부와 성자도 함께 거하신다는 것이다. 즉 한 위격이 계신 곳에 (본질상) 모든 위격이 함께 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한 본질이시고, 한 본질은 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김석환 교수는 이에 관한 어거스틴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성부와 성자의 ‘essentia’[본성]”가 서로 하나임은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 . . . 그러므로 확실히 성부와 성자께서는 본성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서로 하나이시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97).

어거스틴의 말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삼위의 본질적인 상호내주 혹은 연합’은 정통교리인 것이다. 정통 신학자인 가이슬러와 로즈 역시 어거스틴과 동일한 개념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더욱 근본적으로(more foundationally), 삼위일체의 세 구별된 위격들의 각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러한 견해 안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구별된 위(인)격들(persohhoods)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서로 간에 실로 “강렬히 인격적(intensely personal)”이시지만, 그들의 공통의 본성(common nature)인 것이다. (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8)

삼위는 동일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신다는 주장은 또한 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것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 핫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는 성령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들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 하나이시고 동일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이시고 동일한 존재(Being)이시다. . .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의미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본질과 능력의 동일함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73)

세계적인 강해설교가인 존 맥아더 목사 역시 ‘삼위는 본질 안에서 상호내주하신다’고 믿는다. 맥아더는 성령과 그리스도는 본질상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령을 모신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골 1:27(“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The New Testament is clear that Christ, by the Holy Spirit, takes up permanent residence in all believers (참조. 롬 8:9; 고전 6:19, 20; 엡 2:22). . . . 신자들은 지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indwelling Christ)의 놀랄 만한 풍성함을 소유하고 있다(요 14:23; 롬 8:9-10; 갈 2:20; 엡 1:7, 17-18; 3:8-10, 16-19; 빌 4:19)”(John MacArthur, WORD search 7, CD-Rom).

지방교회는 어거스틴과 찰스 핫지와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즈 및 존 맥아더 같은 정통 신학자들을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통 신학자들을 이단이라 하면 이단인 것이다. 그들이 신봉하는 정통 교리를 이단 교리라고 비판하는 자는 이단인 것이다. 이렇게 하는 지방교회는 따라서  영락없는 이단인 것이다!

존 앵커버그 및 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의한 중상모략

지방교회: 위 백과 사전의 두 저자들 중 한 명은 미국 내 유명한 기독교 TV 쇼 진행자이며, 자신의 쇼에서 다룬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판매한 이익금을 수입으로 삼는 사람이다. 김목사가 극찬하는 노먼 가이슬러는 이런 그의 수익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사람이고,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하면서 ‘오픈 레터’에 서명한 이들 대부분이 이런 범주의 사람들 혹은 그들의 지인들이다. 또 다른 저자는 과거 SCP와의 갓멘 재판 때부터 지방 교회측과 오랜 악연이 있어 온 사람이다. 이들은 갓맨 재판 패소 후, 반격할 기회를 엿보던 중 1997년에 위트니스 리가 타계한 것을 기회로 백과 사전에 명단만 슬쩍 끼워 넣은 식으로 비열한 지방 교회측 이단 만들기를 시도했다.

반박: 지방교회는 교리 논쟁을 하면서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을 주된 무기로 사용하는 비열한 집단이다! 존 앵커버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의 명문인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미남침례교 목사이며 91권의 책을 저술했고 앵커버그신학교의 학장이며 유명한 앵커버그 쇼의 프로듀서요 진행자로 수십 년간 신실하게 사역해 오고 있다. 그는 진리를 위해서 큰 희생을 치루며 헌신한 사역자로서, 미국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이다. 지방교회는 이런 충성스러운 사역자를 불의한 돈을 벌기 위해 사역을 하고 있는 비열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또한 노먼 가이슬러 같은 명망 있는 대학자를 불의한 돈을 위해 양심을 저버린 사람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같은 방법으로 아주 부당하게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이들과 이들의 사역을 이미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이라고 매도했다. 이러한 험악한 언어 테러는 지방교회의 옹호자인 CRI조차  “유감스럽고”(regrettable) “가혹한”(harsh) 것일 뿐 아니라 개탄할 만하고(lamentable) 용납할 수 없는(inexcusable)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에 더해서, 이제는 이들을 ‘불의한 돈에 목을 맨 비양심적이고 불의하며 악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도당’으로 집단 매도하고 있다. 미국과 세계의 존경받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지방교회의 이러한 불의한 시각은 지방교회가세계의 복음주의 기독교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웅변한다. 지방교회여, 더 이상 부당하게 중상모략하는 죄를 짓지 말라! “참소하지 말라”(딤전 3:11; 딛 2:3).

존 앵커버그와 존 웰던에 대한 중상모략

지방교회: “존 앵커버그와 존 웰던은 1999년에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을 집필하여 ‘하비스트 하우스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다. 저자들은 . . . 지방교회를 끼워 넣은 후 . . . 이 책 안에 담긴 이단들은 인신매매, 사람을 제물로 바침 등 윤리적,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려고 했다. . . . 그들은 노골적으로 "지방 교회가 이단이다."라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 책의 총론에 해당되는 약 17쪽 분량의 서문에 온갖 혐오스럽고 반 사회적인 내용들, 즉 ‘마약 밀수’, ‘살인’,  ‘매춘 장려’, ‘가끔은 여성 강간’, ‘어린이 성폭행’, ‘문하생 폭행’, ‘인신 제물’, ‘유아 제물’ 등을 이단들의 특징으로 열거한 후, 이 책에 포함된 개인이나 단체들은 서문이 열거하는 전부 혹은 일부에 연관이 있다는 식의 교묘한 편집을 해 놓은 것이다.”

반박: 이 말은 앵커버그와 웰던에 대한 명백한 중상모략이고 명예훼손이다. 텍사스 항소법원과 대법원 및 미연방대법원은 지방교회의 이런 일방적인 주장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연거푸 기각했다. 아래는 필자의 글(#6: ‘1,650억을 요구한 지방교회의 참담한 패소’에서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이 재판의 결과에 대하여 지방교회는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방교회와 그들의 열혈 옹호자들은 이 재판의 결과에 대하여 가시 돋친 불평과 원망을 지금도 쏟아 낸다. 그러나 미국의 텍사스 주 항소법원과 대법원 및 미연방대법원 세 곳이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면 이제는 비난을 그치고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 정정당당한 자세이다. 필자는 지방교회가 승소했던 앞선 두 번의 재판들에 관한 법정의 판단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가 된 책들을 쓴 사람들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방교회와 그들의 옹호자들은 중립에 선 미국 최고의 베테랑 법관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받아들일 뜻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와 그들의 옹호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옳다고 말한다. 회개할 줄 모르는, 자신들만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아래는 필자가 번역해서 소개한 가이슬러와 로즈의 글[#8: 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2)]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앵커버그와 웰든 및 하비스트 하우스가 지방교회를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중상모략적으로 딱지를 붙였다는 그들의 나머지 고소에 대하여, 응당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법정은 이것 역시 거부했다. 그들[앵커버그와 웰든]은 지방교회에 대해 거짓된 혹은 중상모략적인 고소를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 . . 참으로 CRI가 그들[지방교회]의 주장을 지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앵커버그와 웰든이 지방교회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정확한” 진술들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부정확한 주장들이 인격 살인과 따라서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43). 그러나 이러한 근거 위에서라면 내가 아는(수많은 찬송가 작사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이 감옥에 들어가야만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글[#6: 1,650억을 요구한 지방교회의 참담한 패소; #7: 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1); #8: 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1)]을 참조하기 바람.

지방교회의 로비 활동에 관한 필자의 언급에 대한 중상

지방교회: “ECPA 등은 로비만 하면 가입될 수 있는 곳이라는 식의 김홍기 목사의 궤변. . . CRI 와의 교제도 ‘적극적인 로비’의 결과라는 김홍기 목사의 궤변 . . . 풀러 신학교와의 교제도 ‘적극적인 로비’의 결과라는 김홍기 목사의 궤변”

반박: 메리엄 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에 따르면, 로비(lobby)는“어떤 특정한 산업이나 사안에 관계된 정부의 결정들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함께 일하는 조직된 한 그룹의 사람들(an organized group of people who work together to influence government decisions that relate to a particular industry, issue, etc.)”을 뜻한다. ‘로비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표현을 한 것이다. 지방교회가 ‘공격적인 로비 활동’을 한 것에 대하여는 지방교회의 최대의 옹호자인 CRI의 엘리옷 밀러의 다음과 같은 글에 분명히 나와 있다.

ECNR 소송과 더불어 지방교회는 더 큰 복음주의 공동체와 더불어 관계를 맺기 위해서 분명하게 일치된 노력을 기울였다(was clearly making a concerted effort). 2002년 LSM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출판 협회(ECPA)에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이전에 그리스도인 서적상 협회(CBA)의 회원이었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크레딧 조합(ECCU)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CRI뿐 아니라  풀러신학대학원에 접근해서 대화를 요청하고 그들의 가르침의 정통성에 관해 철저한 조사를 신청했다(They reached out not only to CRI but also to Fuller Theological Seminary, requesting dialogue and a thorough inquiry into the orthodoxy of their teachings).(We Were Wrong, 12)

소송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우는 간교한 책략

지방교회: 지방 교회측은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모함에 대해1년 동안 인내하며 대화로 해결할 것을 상대방에게 촉구 하는 서한을 총 6회나 발송했다. 그런데 해당 출판사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2001년 12월 14일에 지방 교회측을 상대로 먼저 미국 오레건 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반박: 해당 출판사(Harvest House)는 지방교회가  보내온  6차례의 서한을 협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간악한 유대인과 동일시하는 180도 전도(顚倒)된 인식

지방교회: 그 이유는 김목사의 왜곡처럼 돈이 목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간교한 유대인들의 훼방과 부당한 정죄로 자신의 신약 사역이 막히려 했을 때 시저(Caesar)에게 호소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행25:11, 26:32).

반박: 존 앵커버그나 존 웰든 및 하버스트 하우스 관계자들은 거듭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사도 바울을 대적했던 ‘사탄의 회(the synagogue of Satan)’(계 2:9; 3:9)로 간주하는 것은180도 전도(顚倒)된 인식이다. 이는 또한 정통교회에 대한 지방교회의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과 일치한다. 지방교회는 정통교회를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으로 비방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자신의 이단 교리를 비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불의한 돈에 목을 맨 비양심적이고 불의하며 악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도당’으로 매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지방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참으로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래는 가이슬러와 로즈가 이 일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지방교회의 소송들에 대한 CRI의 옹호에 관하여 마지막 언급을 하나 해야 한다. 앵커버그에 대한 지방교회의 수억 불 고소는 “실수”(44)였다고 동의하고 있으면서도, 그들[CRI]은 “지방교회는 항상 상대방이 그리스도인 형제들로서 그들을 만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을 때 최후의 방편으로 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지방교회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앵커버그와 하비스트 하우스에 의해 제공된 (상급 법원들을 확신시켰던) 그 반대되는 사실에 기반을 둔 증거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근거 위에서 이러한 종류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고린도전서 6장은 이러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에 관하여 분명하다. 마태복음 18장은 우리가 따라야 할 유형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 유형 안에서 최후의 수단은 그 분쟁을 세상 법정이 아닌 “교회”로 가져가는 것이다(17절). 고린도전서 6장에서 결론은 이것이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7절). 게다가 CRI는 이러한 종류의 신학적 혹은 도덕적 쟁점과, 한 회사가 정당한 재정적 차용을 취할 수 있는 다른 우호적인 혹은 재정적인 고소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혹은 성경적) 동등성을 보여주려고 헛되이 시도한다.

우리는 가볍게 혹은 이유 없이 하지 않았다”(46) 주장함으로, 또한 다른 길이 없을 미국에서 고소를 하도록 강요 받았다고 설득력 없이 주장함으로 자신들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려는 지방교회의 시도는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사실은 아무도 지방교회가 고소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고소를 것이다.

CRI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포함했던 거짓된 고소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경우(46) 이용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없는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방교회가 취하기를 거부했던 다른 대안이 항상 있었다. 말하자면, 고소를 중단하는 것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중단하고,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진술들을 인정하고 수정하며, 다른 그리스도인 단체들을 향해 “영적 음행”이니 “사탄적”이니 하는 가혹한 진술들을 사용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Geisler and Rhodes, 15)

필자를 분열적 교파주의자로 매도하는 중상

지방교회: 김홍기 목사는 . . . 사실상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는 교파주의 옹호자요 . . . 김목사가 적극 옹호하고 있는 이러한 교파 혹은 교파주의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교회 일치와 반대되며, 쉽게 말하면 ‘분열’이다. “또 다른 교회 일치의 방해요인은 교파주의였다. 대량 학살, 화형, 죽기 살기의 신학논쟁 등은 교파주의적 절대주의를 증거한다. 1618년에 이르면 교파주의는 전쟁을 유발한다. . . . (이형기, 세계교회의 분열과 일치추구 역사, 1994,166쪽).

반박: 필자를 향한 지방교회의 중상모략과는 달리, 필자는 모든 양식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교파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매우 슬퍼하고 개탄한다. 위의 인용문 안에 열거된 교파주의의 해악은 교파가 가장 나쁜 형태로 표현된 모습을 묘사한다. 교파들이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를 띄고 극한적 대립을 할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분열상을 통탄해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교파에도 양면이 있다.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다 있는 것이다. 균형잡힌 사고는 이 둘을 다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자 그러면 이제 교파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한 교파가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때 어떤 선한 일이 일어나는가?

필자는 최근에 예장통합의 한 노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흐믓한 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이란 그 노회에 속한 대형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같은 노회에 속한 미자립교회들을 재정적으로 적극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이 일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1793년 4월 영국의 런던을 떠난 한 배는 전세계를 향한 현대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도로 가는 이 배에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윌리암 캐리와 그 일행이 승선해 있었는데, 이후의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곧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아름다운 드라마인 것이다. 그런데 윌리암 캐리를 인도로 보낸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적] 침례교 협회(the 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였던 것이다. 만약 이들, 즉 당시의 ‘칼빈주의적(Calvinistic) 혹은 개혁주의적(Reformed) 침례교회’들로 구성된 선교협회의 후원이 없었다면 윌리암 캐리는 인도로 갈 수 없었을 것이고, 현대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계획은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선교의 시대를 열었던 이들은 바로 세계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한 ‘교파’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교파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수행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한 교파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의 용어로 정죄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한 한 ‘교파’를 통하여 세계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영적 음행, 음녀, 배교, 큰 바벨론, 사탄의조직’ 등의 용어를 총동원해서 모독해도 괜찮은가?

교파는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 때문에 생겨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새로운 교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교파는 없다. 그러나 성별(聖別)을 통해 시작된 교파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죄악시하는 것으로서 신성모독 죄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흉악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교파는 선과 악의 양면이 있다. 이런 양면을 무시하고 교파의 악한 면만을 부각시켜 교파를 순전한 악(惡)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부정직하며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인 것이다. 지방교회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 배후에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이단적 교회론’이 도사리고 있다.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넘어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다음과 같은 지방교회의 글에 이러한 ‘이단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를 ‘비유’라고 착각하는 김홍기목사의 천박한 교회관 . . . 누가 김목사의 몸을 때리면 그것은 김목사를 때린 것이 아니라, 김목사가 ‘동일시한’ 무엇을 때린 것인가? 답변해 보라! 사실 사울은 그리스도를 직접 박해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몸된 지체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가담했다.  그럼에도 그 몸의 머리이신 주님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라고 반응하셨다. 이 “나”는 그리스도의 몸 안의 모든 지체들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주님 즉 ‘단체적인 나”이시다(골3:4, 1:27, 고전12:12). (반론 #3)

위의 인용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정도를 넘어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이요 용서받은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어떻게 동일한 대상일 수가 있는가? 비록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거하시지만, 교회는 완전한 신적 특성과 함께 불완전한 인간적 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비성경적인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교회요 교회가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고린도 교회의 경우처럼) 당 짓는 일과 시기와 이방인들 중에도 없는 음행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 괴이한 이단자 지방교회여 답해 보라! 교회 즉 그리스도 안에 흉칙한 죄가 거한다는 이런 해괴한 교리가 어떻게 이단 교리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신성모독하는 이단 교리를 기초로 정통교회를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이라고 정죄를 하다니! 이것이 바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흉악한 이단적 교회론’의 참담한 실상인 것이다! 

문장의 일부를 떼어 내고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 가증한 사례

지방교회: 김목사는 앞의 글에서도 지방 교회측이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가 소송한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소송을 제기했다.”라는 식의 거짓 증언을 한 바 있다.

반박: 페멘트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의 협박을 한 횟수”라고 말했다. 이렇게 문장을 제멋대로 조작해 놓고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했다고 매도하는 이 뻔뻔스러운 거짓말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제자들은 이러한 ‘교활한 문장 사기’를 니와 리에게서 배웠는가? 아니면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서 배웠는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페멘트의 말은 가이슬러와 로즈와 같은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인용한 것이다. 여기 페멘트의 말 그대로를 인용해 본다.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의 협박을 한 횟수를 모두 합해도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소송을 일으킨 것처럼] 그렇게 많은 소송을 제기했을지 의문이다. (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p.1).

페멘트의 말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고 “뜬 소문”이라면 왜 소송에 능한 지방교회가 가만히 앉아만 있는가? 지방교회의 주특기를 사용해서 밝혀내면 되지 않는가? 왜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가? 페멘트의 말이 거짓말로 밝혀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노먼 가이슬러 박사에 대한 부당한 인식공격

지방교회: “지방 교회 측은 미국 EPS(Evangelical Philosophical Society) 회장을 역임한 Paul Copan의 공식 초청으로, 지난 해 11월 미국 아틀란타에서 있었던 EPS와ETS연합 정기 학술 대회 때 폴 코펜과 공동으로 신화(神化)관련 논문을 청중들 앞에서 발표한 바 있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 박사도 그 회합에 참석했지만, 김목사가 두둔하는 노먼 가이슬러는 자신의  치우친 독선적인 태도로 인해 이 학술 잔치에 초대 받지도 못했고 자발적으로 오지도 않았다.”

반박: 노먼 가이슬러(Normal Geisler) 박사는 신학과 철학을 두루 전공한 미국의 탁월한 조직신학자요 기독교 철학자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변증학자이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의 양대 명문인 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댈러스 신학대학원에서 수십 년간 종교철학 교수 및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철학협회(The Evangelical Philosophical Society)의 설립자요 초대 회장이었고,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협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 기독교 변증학 협회(the 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Apologetics)의 설립자요 현 회장이다. 그는 베리타스 복음주의 신학대학원(Veritas Evangelical Seminary) 및 남부 복음주의 신학대학원(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을 공동으로 설립했고 학장으로 섬겼다. 그는 1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실로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계의 거목이고 정통신학의 보루로서 평생을 미국과 세계의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 온 대학자이다.

가이슬러 박사는 지방교회와 같이 체계적인 학문성이 결여된 집단이 함부로 인신공격을 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또한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말이 이런 경우의 지방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가이슬러 박사가 자신이 회장을 역임했던 미국 복음주의 신학협회를 탈퇴한 이유는 소위 ‘열린 신론’(open theism) 때문이다. 세상 철학에서 비롯된 이 새로운 신학 이론(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일시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감각적이라고 주장함)은 미국의 개신교 학자들, 특히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예를 들어 존 파이퍼, 밀리아드 에릭슨, 노먼 가이슬러, 브루스 웨어, 톰 슈라이너, 존 프레임 같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비판을 받아 왔다.

가이슬러 박사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협회가 ‘열린 신론’을 주창하는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를 제명시키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2003년  ETS를 탈퇴했다. 이렇듯 미국의 신학계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가이슬러 박사의 용기와 결단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지방교회가 경건과 학식을 두루 갖춘 이러한 대학자를 “치우친 독선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비난하는 이유는 가이슬러 박사에 대한 원한 감정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한 감정은 가이슬러 박사가 지방교회의 소위 ‘삼일신론’을 ‘경륜적 양태론’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학회를 탈퇴한 가이슬러 박사가 모임에 초대 받을 이유는 무엇이고 갈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쓸데없는 인신공격과 명예훼손이 지방교회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부터 물려 받은 영적, 정신적, 도덕적 유산이란 말인가! 지방교회여, 누워서 침뱉는 또한 스승들을 욕보이는 이런 악하고 쓸데없는 중상모략은 이제 그만 하라!

이렇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親)지방교회 사람을 통해서 “[지방교회는] 모든 교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는데에 아무런 담이 없다고 봅니다”(고오든 멜튼, 공개서한, 29쪽)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리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싸우거나 반대하거나 따지는 태도나 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영과 자세를 항상 지녀야 한다”(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80-81쪽). 지방교회의 위선적인 말과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위선의 악(惡)을 성경은 이렇게 책망한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0-11).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가이슬러 박사의 글(‘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은 필자에 의해 완역(제목: 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1 & 2)되어 현재 ‘교회와 신앙’에 게시되어 있음]

가이슬러 박사에 대한 명백한 중상모략 

지방교회: “지방 교회측과 오랜 원한을 가진 일부가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내어 제공한 자료만을 토대로 함부로 이단시 하고 있는 노먼 가이슬러나, 그를 지지하는 김목사는  CRI로부터 공정한 이단 연구 하는 법을 배우기 바란다. . . . 사실 노먼 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측을 연구한 적이 없다. 단지 소위 오픈 레터의 초안을 입안한 일부 사람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앞뒤 자르고 문제가 될 부분만 떼어 낸 것만 보고 분노하며 ‘경륜적 양태론’ 운운 하고 있을 뿐이다. . . . 노먼 가이슬러는 앞뒤 자르고 왜곡된 내용만 보았기에 이단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이처럼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낸 자료만 보고 이단시 하는 것을 엘리옷 밀러는 ‘나쁜 이단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지방 교회측은 물론이고 사실은 노먼 가이슬러(그리고 김홍기목사) 역시 이러한 ‘나쁜 이단사냥의 희생양’들일 뿐이다.”

반박: 노먼 가이슬러와 로즈가 쓴 글은 “지방교회 측과 오랜 원한을 가진 일부가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내어 제공한 자료만을 토대로” 한 것이 결코 아님을 지방교회 측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필자가 완역을 해서 ‘교회와 신앙’이 게시한 글(#7 & #8-‘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을 누구나 한 번만 읽어 보아도 지방교회 측이 ‘지극히 의도적인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가이슬러와 로즈는 CRI와 엘리옷 밀러의 자료 및 위트니스 리의 여러 저서들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비판했으며 지방교회의 기관지의 편집장 캔거스에게 질문한 내용들을 글에 담았다. 공개 서한이 제기한 ‘논쟁적이고 모순되는 진술들(Controversial and Contradictory Statements) 5가지’를 열거했지만 그것들 역시 CRI가 그것들을 다룬 내용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인용한 것이다.

노먼 가이슬러와 로즈의 학식과 명성과 글은 지방교회가 얕잡아 볼만한 수준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자를 폄하하고 매도하는 지방교회의 몰상식한 자세와 저급한 수준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지방교회의 명백한 거짓말, 지극히 의도적인 중상모략, 무조건적인 자기 방어, 객관적인 판단 결여 등은 지방교회와의 대화가 결코 유익하고 생산적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지방교회여, 당신들이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들의 지극히 육신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당신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마키아벨리의 제자들’로 불리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자들은 먼저 순결하고 정직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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