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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한다는 흉악한 이단 교리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 교리 비판 - 재반론 ④
2016년 06월 22일 (수) 10:39:00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Ph.D., D.Min. /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의 반론이 담긴 글들을 읽어 보면 반복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글의 주제와 내용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재탕 삼탕 수십 탕 해서 우려먹은 몇십 년 묶은 2차 자료들이 즐비하다. 따라서 필자가 재반론을 함에 있어서 이미 다룬 주제들을 다시 다루어야 하는 경우를 거듭 만나게 된다. 답변의 재탕을 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내용으로 글을 쓰고는 있지만 반복되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하여간 재반론을 함에 있어서 지방교회의 반론의 몇 가지 핵심 쟁점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이단적 교회론

지방교회: 김목사가 적극 옹호하고 있는 이러한 교파 혹은 교파주의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교회 일치와 반대되며, 쉽게 말하면 ‘분열’이다. “또 다른 교회 일치의 방해요인은 교파주의였다. 대량 학살, 화형, 죽기 살기의 신학논쟁 등은 교파주의적 절대주의를 증거한다. 1618년에 이르면 교파주의는 전쟁을 유발한다. . . . (이형기, 세계교회의 분열과 일치추구 역사, 1994,166쪽).

반박: 필자를 향한 지방교회의 중상모략과는 달리, 필자는 모든 양식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교파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매우 슬퍼하고 개탄한다. 위의 인용문 안에 열거된 교파주의의 해악은 교파가 가장 나쁜 형태로 표현된 모습을 묘사한다. 교파들이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를 띄고 극한적 대립을 할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분열상을 통탄해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교파에도 양면이 있다.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다 있는 것이다. 균형잡힌 사고는 이 둘을 다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자 그러면 이제 교파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한 교파가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때 어떤 선한 일이 일어나는가?

필자는 최근에 예장통합의 한 노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흐믓한 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이란 그 노회에 속한 대형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같은 노회에 속한 미자립교회들을 재정적으로 적극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이 일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1793년 4월 영국의 런던을 떠난 한 배는 전세계를 향한 현대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도로 가는 이 배에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윌리암 캐리와 그 일행이 승선해 있었는데, 이후의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곧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아름다운 드라마인 것이다. 그런데 윌리암 캐리를 인도로 보낸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적] 침례교 협회(the 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였던 것이다. 만약 이들, 즉 당시의 ‘칼빈주의적(Calvinistic) 혹은 개혁주의적(Reformed) 침례교회’들로 구성된 선교협회의 후원이 없었다면 윌리암 캐리는 인도로 갈 수 없었을 것이고, 현대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계획은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선교의 시대를 열었던 이들은 바로 세계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한 ‘교파’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 교파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수행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한 교파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의 용어로 정죄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한 한 ‘교파’를 통하여 세계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영적 음행, 음녀, 배교, 큰 바벨론, 사탄의조직’ 등의 용어를 총동원해서 모독해도 괜찮은가?

교파는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 때문에 생겨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새로운 교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교파는 없다. 그러나 성별(聖別)을 통해 시작된 교파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죄악시하는 것으로서 신성모독 죄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흉악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교파는 선과 악의 양면이 있다. 이런 양면을 무시하고 교파의 악한 면만을 부각시켜 교파를 순전한 악(惡)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부정직하며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인 것이다. 지방교회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 배후에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이단적 교회론’이 도사리고 있다.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넘어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다음과 같은 지방교회의 글에 이러한 ‘이단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를 ‘비유’라고 착각하는 김홍기목사의 천박한 교회관 . . . 누가 김목사의 몸을 때리면 그것은 김목사를 때린 것이 아니라, 김목사가 ‘동일시한’ 무엇을 때린 것인가? 답변해 보라! 사실 사울은 그리스도를 직접 박해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몸된 지체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가담했다.  그럼에도 그 몸의 머리이신 주님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라고 반응하셨다. 이 “나”는 그리스도의 몸 안의 모든 지체들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주님 즉 ‘단체적인 나”이시다(골3:4, 1:27, 고전12:12). (반론 #3)

위의 인용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정도를 넘어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이요 용서받은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어떻게 동일한 대상일 수가 있는가? 비록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거하시지만, 교회는 완전한 신적 특성과 함께 불완전한 인간적 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비성경적인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교회요 교회가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고린도 교회의 경우처럼) 당 짓는 일과 시기와 이방인들 중에도 없는 음행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 괴이한 이단자 지방교회여 답해 보라! 교회 즉 그리스도 안에 흉칙한 죄가 거한다는 이런 해괴한 교리가 어떻게 이단 교리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신성모독하는 이단 교리를 기초로 정통교회를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이라고 정죄를 하다니! 이것이 바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흉악한 이단적 교회론’의 참담한 실상인 것이다!  

가장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이고 분열적인 집단

지방교회: 우리는 모든 참되게 거듭난 이들을 그 지방의 교회의 일원이라고 믿으며, 주님의 몸 안의 모든 지체들과의 생명의 교제를 추구한다(요일1:3). 엘리옷 밀러는 이런 점을 “지방 교회의 놀라운 포용성”이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 .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와 그들을 향한 겸손과 그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관되게 장려된다. 사실 이것이 ‘지방 교회들’에서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태도이다(우리가 틀렸었다, 35쪽).

반박: 워치만 니는 배타적 형제회의 ‘폐쇄적 주의 만찬’(closed communion)에 반대하여 ‘개방적 주의 만찬’(open communion)을 주장했다. 즉 중생한 자들이 모두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지 않는다. 주의 만찬(혹은 성만찬)은 주님께서 (우주적인 혹은 보편적인) 교회에 주신 의식임으로 ‘중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놀라운 포용성”(?)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왜 그런가? 예를 들어 만약 필자가 지방교회의 모임에 참여하여 소위 ‘신언’(일반적 용어로 ‘간증’)을 하겠다며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리에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면 지방교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게다가 설교할 기회를 얻어 지방교회의 교리와 다른 것을 말한다면 지방교회 신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지방교회는 당장 필자를 배척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교회의 교리와는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은 잘못된 것인가?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이렇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방교회 교인들도 자신들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자신들의 교리를 따를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놀라운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자신들은 중생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여 교제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조를 가지고 다른 믿는 이들을 판단하고 자신들과 신조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담을 쌓는 일을 ‘분열의 죄’요 ‘영적 음행’이라고 정죄하며 자신들의 “놀라운 포용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이들의 내면적인 실상을 들여다 보면 지방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이고 분열적인 집단이다. 지방교회가 자신들과 다른 교리(예를 들면 정통 삼위일체론 및 교회론)를 가지고 있는 정통교회를 향해 쏟아 붓는 증오와 혐오의 언어 돌팔매질을 보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과 같은 가장 자극적이고 가혹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필자와 같은 지방교회의 비판자들을 향하여 ‘잠재적 삼신론자’니 ‘삼신론자’니 하는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되는 단어를 무기로 사용하며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자신들은 ‘진리의 분별’을 위해 이렇게 한다고 합리화시킨다. 원참 세상에, 이런 위선자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한 손으로는 교제의 악수를 청한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상대방의 손을 자신들의 교리의 칼로 무자비하게 쳐서 자르고 있지 않은가! 실로 지방교회는 모순과 위선의 대명사이다.

불치의 공주병에 걸려 있는 혼돈과 미혹의 집단

지방교회: 지방 교회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사냥”의 희생양. 지방 교회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서도 지방교회를 이단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문맥들로 급히 비판글을 써야 했던 이들은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해 왔다. 그것은 1차 자료를 뽑아낼 때 전후 문맥을 무시한 것이고(사실 왜곡),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으로 함부로 이단시 한 것이다(판단 기준 오류). 현재 김홍기 목사 역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 . . 즉 이들은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지도자나 그 단체에 대해 일반인들이 등을 돌리게 하려고”,  “이단처럼 보이거나 언어도단인 것 같은 진술들을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흔들어 보이는 특징이 있다. 김목사의 네 번째 토론글 역시 사실 왜곡과 거짓말로 도배되었고, 위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사냥’의 특징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반박: 1978년 성경의 무오함에 관한 국제 협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후원한 회의에서 약 300명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학자들에 의해서 작성된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성경의 해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은, 문어적인 형태나 고안을 참작하여, 문법적이며 역사적인 석의(釋義)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제 18조).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성경의 한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해당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고 단어를 연구하며 문맥에 유의한다. 또한 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문을 주의 깊게 비교하며 추론한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원리는 다른 책들의 내용을 분석할 때도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이것은 필자가 지방교회의 글들을 비평할 때 활용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필자가 지방교회는 개신교를 가리켜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이라고 부른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문맥을 무시한 채 하나의 문장을 꺼집어 내어 왜곡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바와 같이) 지방교회의 여러 책에서 나온 내용들을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인 것이다.

“모든 분열들과 [개신교] 교파들큰 바벨론 안에서 완성된다”(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463).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큰 바벨론, 즉 배교한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위에 임하는 심판을 본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 외에 주님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즉 큰 바벨론을 특별히 심판하실 것이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22).

“배교한 로마 교회는 음녀이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딸들[개신교] 역시 음녀들이다.”( 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594).

"우리는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교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언이다. 기독교는 무너졌다. 기독교 세계는 무너졌다. 카톨릭교는 무너졌다. 그리고 모든 교파들은 무너졌다. 할렐루야!”(Witness Lee, The Seven Spirits for the Local Churches, 97)

“주님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개혁교회는 ... 다양한 이름으로 자신을 교파화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은 배교이다. 주님의 이름 외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교회를 교파로 나누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188).

“로마 카톨릭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파 안에는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속해 있는 교파들의 조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교파의 조직들은 적절한 교회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하는 사탄적인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서 사용되어 왔다”(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p. 464).

필자가 지방교회의 교리를 비판할 때는 워치만 니와 워트니스 리의 (온라인 및 단행본에 나와 있는) 설교들과 지방교회가 발행한 여러 책자들 및 지방교회의 옹호자들과 비판자들의 다양한 글들과 또 다른 여러 자료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비교하며 추론하는 가운데 주의 깊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영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피가 무엇을 의미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글은 열정과 진지함과 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변증적이고 학문적인 글은 객관성과 공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뜨거운 피와 냉철한 이성과 신앙 양심으로 글을 쓴다. 지방교회가 지금처럼 필자나 진지한 비평가들의 글을 ‘나쁜 이단 사냥꾼’의 글로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일을 일삼는 한 진리에 눈 먼 상태가 지속될 뿐 아니라 계속되는 강력한 비판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을 ‘영적 음행’과 ‘배교’의 표현으로 매도하는 이단적 교리

지방교회: 김 목사는 성서침례교단 소속임에도 전혀 ‘성서’적이지도 ‘침례교인’답지도 않다. , , , “침례교인들에게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는 신구약 성경이다. 신앙 고백은 단지 성경해석을 위한 안내자 일뿐이며, 우리의 양심을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 (김승진, 침례교회와 역사, 침례교 신학교 출판부, 2009년, 211쪽).

반박: 이 세상에 소위 “성서침례교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라는 단체가 있을 뿐이다. 이 단체는 문자 그대로 ‘교파나 교단이 아닌 친교회’인 것이다. 필자는 다년간 성서침례친교회 안의 몇몇 사역자들과 교분을 이어 왔지만, 북미로 온 이후 지난 30년 간 성서침례친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한 바가 전혀 없다. 필자는 보수적이고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침례교인이고,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공유하는 분들과 폭넓게 교제하며 협력하는 사역자이며,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개신교 목사 중 하나이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신조(혹은 신앙고백)는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의 행동을 이끌어 주는 일련의 믿음’(an idea or set of beliefs that guides the actions of a person or group)을 가리킨다. 필자는 성경과 신조(혹은 신앙고백)와의 관계에 대하여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1장 10조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성경은] 최고의 심판관으로서 모든 종교적 논쟁을 결정하며 모든 회의의 법령과 고대의 저자들의 의견과 사람들의 교리와 개인적인 영들을 점검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s of Faith, 1643-46년). 또한 역사적인 ‘뉴 햄프셔 침례교 신조’(The New Hampshire Baptist Confessions of Faith, 1833년)의 제1조항을 굳게 믿는다. “성경은 . . . 사람의 모든 행동과 신조들과 의견들을 테스트 하는 최고의 표준임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 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 1978년/http://21church.churchgrowth21.com/ chicagostatement.html)’의 제2조항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교회의 신조들, 회의들(councils), 혹은 선언들(declarations)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크거나 동등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이 위대한 신앙 선언문들은 교회의 신조들과 선언들의 무용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역사적인 세 개의 신앙고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신조들은 성경의 권위 아래 교회의 신조들이 놓여 있음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또한 이 신조들은 교회의 삶과 관련하여 신조(혹은 신앙고백)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웅변해 주는 산 증거이다. 지방교회는교회의 이런 위대한 신조들을 ‘영적 음행’과 ‘배교’의 표현으로 매도하고, 이런 신조들을 만들고 활용하는 것을 ‘음녀’와 ‘큰 바벨론’의 행위로 정죄한다. 극단적 이슬람 테러 단체인 ‘IS’가 중동의 지난 역사와 유물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깡그리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지방교회는 교회의 과거의 위대한 믿음의 기념비(신앙고백)들을 ‘영적 음행’으로 정죄하고 완전히 파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필자는 신조는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해 준다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신앙고백(Confessions of Faith)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신조(Creeds)를 확고하게 믿는다. 현재 우리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 안에 있는 [진리를 타협하는] 다수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이 바로 거기[신앙고백과 신조]인 것이다”(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433). 그리고 필자는 ‘진리에 관한 신앙고백’은 비진리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존 칼빈의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리(separation)의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결코 진리에 관한 순결한 고백(the pure profession of faith)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도록 그들[가톨릭]로부터 철수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라고 확신한다. (Ibid., 4.2.6, 1047-48).”

형제로 호칭되는두 명의 교리적 교주(敎理的 敎主)를 가지고 있는 집단

지방교회: 이번 글에서도 김목사는  “지방 교회는 지방 교회의 신조와 다른 것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방교회가 철처하게 신조 중심으로 무장된 ‘교파’임을 보여준다”라고 거듭 거짓을 말했다. . . . 말하자면, 가장 신조 중심인 교단은 개혁 교회이다. 김목사가 몸 담은 침례 교단이 그 다음이며, 지방 교회 측은 아예 ‘고유의 신조’ 자체가 없다. 성경 66권 전체가 신조요 신앙 고백이기 때문이다.

반박: 워치만 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지방교회가 종파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만약 우리 ‘교회’가 지역이 아닌 어떤 특별한 교리의 전파 때문에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분리된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참되다 해도 우리는 결정적으로 종파인 것이다. (Collected Works of Watchman Nee, The (Set 2) Vol. 30: The Normal Christian Church Life, Chapter 8, Section 6).

지방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은 성경 66권이 아니라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리이다. 지방교회는 이 두 사람의 교리 외에는 다른 어떤 교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교리를 통해서 성경을 보고 해석한다. 또한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이 정통이고 다른 모든 교리는 비정통이나 이단이다. 지방교회는 개혁교회나 침례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교리적 전체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비성경적이며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종파이다. 이런 ‘교리적 전체주의(全體主義)는 로마 가톨릭과 흡사하고, 기독교 이단들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침례교회는 성경을 유일한 믿음과 행함의 기준으로 삼고 각 사람이 성령과 각자의 이성과 양심의 인도를 따라 신앙을 가지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믿음과 성경 해석이 침례교회 안에 존재한다. 비록 ‘침례교인의 믿음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와 같은 ‘공동의 신앙고백’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이드 라인’일 뿐이다. 독립된 각각의 침례교회들은 자기 나름의 신조를 소유한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니와 리의 성경 해석을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획일주의적(劃一主義的)이다. 지방교회에는 ‘형제’라고 호칭하는 ‘두 명의 교주(敎主)’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둘은 행정적은 아닐지라도 ‘교리적 교주’ (敎理的 敎主)로서 전세계와 모든 시대의 지방교회를 지배한다. 이것은 ‘한 지역에 다수의 독립적인 개교회’가 존재하는 개념(성경적)이 아닌 ‘한 지역에 한 교회’ 개념(비성경적), 더 나아가 ‘전세계를 통해 유일한 참된 교회는 지방교회(혹은 회복교회)’라고 하는 개념(비성경적)에서 비롯된다.

총신(總神)  출신의 재미 이단연구가인 서춘웅 목사는 지방교회의 ‘권위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지방교회는 구조상 권위주의이며, 그 머리는 위트니스 리이다. 그는 교회의 최고 명령자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묵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는 지방교회 회원들에게 자신에 대한 적법한 자세에 대해 그의 사역자들의 예를 들면서 형제 벤슨(Benson)은 자신의 개념을 갖지 않았으며, 오로지 형제 리(Lee)의 사역을 따라가는 것만 알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잘못을 들을 때면 잊어버린다. 그런 것(실수)을 토론하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도자이기에 자신의 가르침은 예외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 . 그가 이렇게 무조건 따르고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의 교훈이 35년 이상의 실천과 경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그는 “이것이 내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주님의 계시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방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위트니스 리다. . . .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엡 5:23).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시다(골 2:10). 교회의 정치는 주님 자신과 그의 왕국의 권위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유일하며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서춘웅, 교회와 이단, 559)

정통교회와 치열한 교리 전쟁을 벌이기 위해 태어난 종파(宗派)

지방교회: 교파 혹은 종파와 달리, 우리는 어떤 공식 명칭도, 본부도, 총회도, 총회장도 없다. 소위 ‘지방 교회’(Local Church)도 남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심지어 ‘주의 회복’도 공식 명칭이 아니다. 우리의 공식 명칭은 단 하나, 즉 ‘어느 지방에 있는 교회’일 뿐이다.

반박: 지방교회는 종파(宗派)로서의 명백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종파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이런 말을 들으면 자신이 종파가 아니라고 거품을 물고 거세게 항의한다. 복음주의 신학사전의 종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따르면 지방교회는 종파(宗派)임이 분명하다.

종파들(sects)은 종종 그들의 조직의 배타적인 주장들뿐 아니라 삼위일체에 관한 4세기의 이해(understanding)에 동의하기를 거부함으로 그들 자신을 구별 짓는다. (Walter A.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310)

위의 정의에 따르면 ‘삼위일체에 관한 4세기의 이해(understanding)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집단은 종파이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표명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The traditional explanation of the Trinity)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borders on tritheism).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교리이다.(To split the Godhead into these separate Persons is not the revelation of the Bible, but the doctrine of the Nicene Creed). (Witness Lee, Life Messages, Vol. 2 (#42-75), Chapter 19, Section 2)

그리고 위의 정의에 따르면 종파들(sects)은 종종 ‘그들의 조직의 배타적인 주장들’을 한다. 그러면 지방교회는 어떠한가? 물론 지방교회는 그들 나름의 독특한 배타적인 주장들을 한다. 그런데 주장을 하되 보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거칠고 험악한 교리 전쟁을 벌이며 그렇게 한다. 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런 사실을 웅변한다.

이것은 치열한 전쟁(a fierce warfare)이다. . . . 우리는 전통적인 신학의 사소한 것들이 아닌 근본적인 것들을 반박하고 수정해야 한다(We should refute and correct traditional theology, not in minor points but in the fundamental points). 오늘날 우리는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 기독교를 대항하여 주님의 회복의 증언을 한다. . . .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특별한 사명이다. (Witness Lee, The Governing and Controlling Vision in the Bible, Chapter 3, Section 4)

이처럼 복음주의 신학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지방교회는 종파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는 자신을 종파(宗派)라고 정의하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한다. 참으로 고약하고 딱한 종파(宗派)가 아닐 수 없다!

어리석고 헛된 인신공격의 반복

지방교회: 지계석주의 침례교인의 다음과 같은 결의문(Cotton Grove Resolutions)이 그 좋은 예이다. 그들은 이런 내용을 근거로 장로교인과 감리교인들과의 강단 교류를 거부했다. 그런데 김목사는 이런 단체를 극찬한 바 있다.

반박: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 대학인 리버티 대학의 부총장을 역임한 엘머 타운즈(Elmer Towns) 박사가 격찬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잭 하일스(Jack Hyles) 목사는 지난 세기의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개교회와 주일학교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랜드마크(Landmark) 침례교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몇몇 (‘랜드마크주의’ 혹은 ‘지계석주의’를 표방하는) 침례교회들은 ‘적극적인 전도, 철저한 경건생활,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 강력한 설교’ 등의 큰 장점이 있다. 필자는 랜드마크 침례교인들의 이러한 장점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 중 하나는 아니다. 즉 랜드마크 침례교인들의 ‘배타적인 침례교 역사관’을 공유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이전의 글(#2: ‘지방교회는 교리 사기를 전문하는 집단인가’)에 속해 있는 ‘배타적 침례교 역사관(Landmarkism)은 주류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단락을 참조하기 바람.

사실은 거짓이고 거짓은 사실이라는 180도 돌아버린 사고방식

지방교회: “김목사는 ‘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니케아 신조의 이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거짓을 말하고 . . . 우리는 이러한 김목사의 허세와 거짓을 사실처럼 말할 줄 아는 담대함의 뿌리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반박: 리는 니케아 신조를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borders on tritheism). . .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교리이다. (Witness Lee, Life Messages, Vol. 2 (#42-75), Chapter 19, Section 2)

위의 인용문에서 리는 니케아 신조를 이렇게 네 가지로 폄하한다. 첫째, 이것은 ‘전통적인 설명’이라고 말한다. 즉 정통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 ‘삼신론’과 같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준(準)삼신론’이라는 말이다. 셋째, ‘분리된 위격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앞선 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는 삼신론(三神論)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분리된 세 위격’은 삼신론이기 때문이다. 넷째,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니케아 신조의 이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한 필자의 말이 “거짓’이라는 말인가? 원참, 백주 대낮에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폐일언하고 이런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판단력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중상모략꾼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거짓된 글을 상습적으로 쓰며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의 길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지방교회와의 논쟁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지적(知的)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다. 필자와 독자들이 이런 쓸데없고 몰상식하며 무책임하고 거짓된 글들을 읽고 분석하면서 참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케아 신조를 삼신론 이단 신조로 둔갑시킨 이단 교리

지방교회: “니케아 신조는 김목사의 이해와 달리, 삼위일체론의 모든 것을 망라해서 해결 했거나 정의하지는 않았다. 단지 삼위 특히 성자의 동일 본성을 확인했을 뿐이다. . . . '니케아(신조)는 4세기 교회의 모든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않았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76쪽).). . . .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관한 고백이 지나치게 간단하다.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나 동질인지 혹은 발출인지 조차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차영배, 삼위일체론, 134-135쪽). 심지어 이종성 박사는 니케아 신조든 사도 신조든 셋을 말하지만 그 셋이 하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음으로 ‘삼신론적인 구조’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에도 김목사는 같은 지적을 한 위트니스 리를 향해 ‘니케아 신조를 ‘이단 신조’로 둔갑시켜 버린다” 라고 했고, 또 이런 거짓 단정을 근거로 글 제목을 ‘지방 교회 … 이단 종파’라고 붙이는 가벼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박: 필자가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론의 모든 것을 망라해서 해결 했거나 정의”했다는 생각을 표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참으로 지방교회는 고약한 악습관을 버릴 줄을 모른다. 지방교회는 필자의 생각이 아닌 것을 제멋대로 필자의 생각처럼 왜곡하며 여기서 또 그 고약한 교리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지방교회에 딱 적합한 말씀은 이것이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 8:44)

니케아 신조는 초기의 기독교 신조로서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정통 신학자들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니케아 신조가 ‘삼신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종성 박사의 비판도 그 초기 신조의 부족한 점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통 신학자들이 위트니리가 말한 것처럼 니케아 신조를 ‘준(準)삼신론’ 혹은 삼신론(三神論)으로 매도하고 정죄한 적이 있는가? 위의 신학자들이 니케아 신조는, 리가 함부로 말한 것처럼, 소위 ‘분리된 위격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물론 없다! 만약 정통교회가 니케아 신조를 ‘준(準)삼신론’ 혹은 삼신론(三神論)을 표명한 신조로 인식했다면 니케아 신조는 벌써 오래 전에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지방교회는 아래와 같은 필자의 진술을 읽고, 필자가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론의 모든 것을 망라해서 해결했거나 정의”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생각의 편린(片鱗)이라도 아래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니케아 신조의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지상과 하늘에서의 활동과 임재를 묘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하나로 존재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생하셨음을 증언한다(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한 출생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한 삶의 활동을 강력히 시사함). 이처럼 니케아 신조는 아주 분명히 아들은 아버지와 분리하여 존재하시거나 성령과 분리하여 활동하시지 않음을 선언한다. 그런데 리는 왜 니케아 신조가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을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준(準)삼신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함부로 주장하는가? 리는 왜 니케아 신조가 본질적으로 ‘하나된 위격들’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은 도외시한 채 니케아 신조가 ‘분리된 위격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제멋대로 주장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상호내재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필자의 글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지방교회’). 리의 주장을 따르면 결국 니케아 신조는 ‘준(準)이단 신조’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분리된 위격들’은 ‘다신론’이라고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니케아 신조를 ‘준(準)이단 신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단 신조(heretical creed)’로 둔갑시켜 버린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가 ‘이단 종파’(heretical sect)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삼위의 본질적 연합을 분리된 위격으로 착각하는 이단 교리

지방교회: 그 결과 삼위 중 한 위격 안에 다른 두 위격들이 상호내주하심으로, <한 위격은 곧 세 위격들 전체 곧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방면을 김목사는 부인한다. 바로 이런 점이 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가 ‘분리된 세 위격들’을 주장하는 ‘잠재적 삼신론’ 신봉자로 보이는 이유이다. 이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스트롱, 로뢰인 뵈트너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반박: 위에 있는 ‘분리된 세 위격들’이라는 표현에는 이단 사상(異端 思想)이 들어 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동일 본질을 가지신 삼위를 믿는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위격으로는 삼위로 구별되어 존재하시나 본질로는 하나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삼위일체론에는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에서 ‘분리된 위격들’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 교리로 정죄한다.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본질상 한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는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명백한 이단이다! 정통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 안의 다른 삼위(The thre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는 목적과 그들의 생각에 있어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one in essence)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one in their essential nature).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8)

그루뎀의 말처럼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혹은 본질상) 하나이시다. 삼위는 ‘편재의 신적 특성’을 포함한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다. 따라서 삼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분리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성부가 하늘에 계시고 성자가 물 위에 계시며 성령이 공중에 계시는 것으로 성경이 묘사를 한다 해도(마 3:16-17), 그것은 성경이 삼위의 공간적 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볼 때 삼위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한 본질의 삼위는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성경적 견해 위에 기초해 있고, 따라서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단어와 사상이 존재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런데 지방교회가 이런 정통 삼위일체론을 가리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위에서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의 특징들 중 하나는 제1, 3 위격은 배제된 채 오직  제 2격만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 . 김목사 주장은 어거스틴 . . .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아래 말과도 크게 다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김 목사의 주장이 어거스틴의 주장과 크게 다른가? 친절하게도(?) 지방교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까지 다음과 같이 이미 기록해 놓았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즉 어거스틴에 의하면 제2위격이 오실 때 제1격과 제3격이 함께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여, 정말 어거스틴이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주론’의 개념에서 이렇게 말한 것인가? 물론 지방교회는 ‘그럼, 그렇고 말고!’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답을 얻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주장을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체를 강조하여 삼위일체가 다 함께 일한다고 하여도 위격들에게 고유한 사역을 배정하였다. 즉 삼위일체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장사되고 삼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그렇게 하셨다. 다시 삼위일체가 비둘기의 형체로 세례 받는 예수께 오신 것도 아니고, 주의 승천 후 오순절 날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있을 때, 삼위일체가 불의 혀같이 갈라짐으로 그들 각자 위에 오신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이 오셨다. 또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내가 이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다시 이것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삼위일체가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셨다(서철원, 교리사, 403).

위에서 보듯이 어거스틴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삼위일체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자가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한다. 결국 지방교회는 어거스틴의 교리를 왜곡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삼위의 공간적 상호내주’(지방교회의 이단 교리)가 아닌 ‘삼위의 본질적 상호 내주’(정통 삼위일체론)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서방 정통 신학자들이 신봉하는 ‘삼위의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는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삼위의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하는 소수의 정통 신학자들은 ‘한 본질의 삼위’를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말하는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분리된 위격들’을 주장하는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한다.

‘삼위의 상호내주’를 신봉하는 소수의 정통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essential unity)은 신적 속성의 내적인 동등함과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에서 오는 강렬한 인격적 통일성(personal unity)에서 발견된다”(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고 주장한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주’가 아니면 ‘삼위의 분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삼위의 본질적 하나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지방교회의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이단 교리로 규정하는 것이다.

댈러스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스코트 호렐에 따르면, “동방정교의 전통에 속한 많은 사람들과 서방교회 안의 점증하는 학자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하고 있다”(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 즉 서방교회 안에서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믿는 학자들은 다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통 신학자들이 ‘삼위의 실제적 상호내주’를 신봉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이는 그들이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를 믿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를 신봉하지 않고 있는데 마치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왜곡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학문적 사기  및 교리 사기 행위가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를 지지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밝히지 않은 채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삼위의 상호내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것은 지방교회가 학문적 사기 혹은 교리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물증이 된다! 앞으로 만약 지방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삼위의 상호내주론”을 신봉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지 않은 채 그들을 ‘삼위의 상호내주’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둔갑시킨다면 필자는 지방교회를 가차 없이 ‘교리 사기꾼’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지방교회가 그들의 글에서 반복해서 인용하는 정통 신학자들의 삼위일체에 관한 아래와 같은 견해들은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론’의 관점에서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A. H.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p.332-333).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4)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69쪽, 성문).

 “주기도문에서 … ‘아버지’라는 단어는 … 배타적으로 첫째 위격만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107).

아래의 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정통 신학자인 그루뎀은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를 믿는 학자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한국교회의 모든 독자들에 의해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그의 역저(力著)인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아래는 그의 책에 있는 한 단락을 필자가 번역해서 인용한 것이다. 아래의 글은 위에 인용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어떻게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리되지 않는 존재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존재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 . . 첫째, 각 위격은 전적으로(completely) 그리고 완전히(fully)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중요하다. 말하자면 각 위격은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존재의 모든 충만(the whole fullness of God’s being)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아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 혹은 단지 하나님의 삼분의 일이 아니시다. 아들은 완전히 그리고 충분히 하나님(wholly and fully God)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각 위가 하나님의 오직 삼분의 일임을 나타내는 도표 14.1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 . . 도리어 우리는 아버지의 위격(the person of the Father)은 그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whole being of God)를 소유하고 계시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함께 말할 때 우리는 아버지 혼자, 혹은 아들 혼자, 혹은 성령 혼자에 관해서 말할 때보다 어떤 더 큰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all of God’s being)이시다. 아들 역시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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