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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교회를 음녀로 매도하는 이단적인 교회론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 교리 비판 - 재반론 ②
2016년 06월 06일 (월) 15:47:10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Ph.D., D.Min.,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필자는 재반론을 함에 있어서 지방교회의 반론의 몇 가지 핵심 쟁점에 집중할 것이다. 지난 글이나 재반론에서 충분히 다룬 내용들은 가급적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지방교회의 말을 인용한 후 그 말에 대하여 반박을 하는 방식을 취하도록 할 것이다.

양의 옷에 가려진 늑대의 발톱

지방교회: “김홍기 목사는 성경적인 교회는 공격하고, 비성경적인 교파주의는 끌어 안는가?”

반박: 지방교회가 왜 성경적인 교회가 아닌지는 아래의 논의에서 충분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교파주의’에 관해서는 앞으로 적절한 시점에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교파주의’에 대한 지방교회의 비판과 관련해서 3가지 점만을 간략히 밝히도록 한다.

첫째, 지방교회의 ‘교파주의’ 비판은 교파의 순기능(順機能)에 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매우 부당하고 균형이 없는 비판이다. 지방교회의 교파주의 비판은 교파를 ‘분열의 악’으로 규정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떤 교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취할 때 그 교파와 그 행위는 악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장로교파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한 것은 악이 될 수 없다. 또한 미국의 한 감리교파가 아펜젤러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한 것도 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조선을 복음화하시기 위해서 미국의 한 장로교파와 한 감리교파를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경우 교파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선한 도구였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교파를 ‘사탄의 조직’으로 정죄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를 사탄의 조직으로 정죄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둘째, ‘교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교파주의’를 얼마든지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교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교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악으로 여겨 비판한다면, 그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속한 교파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악으로 여긴다면 그 교파가 주는 혜택을 더 이상 받지 말고 그 교파를 탈퇴하는 것이 정당한 자세이다. 가톨릭을 마땅히 귀환해야 할 어머니의 품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개신교의 죄악(?)을 통회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부터 회개하고 가톨릭으로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셋째, 지방교회의 ‘교파주의’에 대한 비판은 성별(聖別)을 위해 새롭게 출발하는 교파를 악으로 정죄한다. 지방교회는 모든 분리를 ‘영적 음행’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는 행위를 악으로 정죄하는 신성모독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를 따라 거룩하게 순종하는 교회를 가리켜 ‘영적 음행자,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의 가혹한 용어로 비난하는 지방교회의 사악한 행동은 늑대의 발톱으로 양을 해치는 참으로 무서운 죄악인 것이다.

늑대의 발톱으로 지방교회의 역사 왜곡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대만에서의 사역에 대한 심각한 사실 왜곡”

반박: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일방적이고 왜곡된 역사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지방교회의 일방적인 자화자찬의 역사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지방교회가 회심전도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가 아닌 다른 정통교회들을 ‘영적 음행자,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과 같은 가혹한 용어로 비난하면서 순진한 성도들을 기만하고 미혹하며, 또한 이러한 음흉한 늑대의 행동을 후안무치한 강도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지방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방교회가 신뢰를 받으려면 먼저 그 흉칙한 늑대의 발톱부터 빼버려야 한다!

배타적 침례교 역사관(Landmarkism) 주류가 아니다

지방교회: “한편 침례 교인인 베논 리온스(Vernon C. Lyons)는 “침례교는 개신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김홍기 목사는 성서 침례교 소속임). 이러한 침례 교단들 중에는 자신들만 참교회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 . . 김목사는 “침례교만이 유일한 참교회”, 즉 정통 교회이고 정통이 아닌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강단 교환을 금지시킨 위 <지계석주의(혹은 랜드마크) 침례교단>을 다음과 같이 두둔하고 있다. . . . 만일 위 김목사의 말대로라면, 랜드마크 침례교인들은 장차 참된 침례 교회, 참된 신약 교회를 세우려고 원래의 소속인 남 침례교단에서 분리되었으니, 남 침례교단도 ‘참된 교회’가 아닌 셈이다. 이처럼 소위 정통 교회는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자의적이고 가변적이며 상대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모순된 개념이다.

반박: 필자는 중학교 말엽에 한국의 감리교회들 중 두 번째로 역사가 깊은 종로에 위치한 ‘중앙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의 담임목사님은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지금도 당시의 담임목사님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말엽에 ‘조이 클럽’(현재는 조이 선교회)에서 주최했던 전도집회를 통해서 중생의 체험을 했고 수년 간 그 선교회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후 ‘불광동성서침례교회’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교회를 개척하도록 파송도 받았다. 필자는 사당동과 방배동에서 9년간 목회 사역을 한 후 신학공부를 위해 도미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리버티침례신학대학원(M. Div.), 남가주에 있는 ‘탈봇신학대학원’(복음주의 신학교, M.Div., D.Min.), ‘캘리포니아주립대학’(B.A. 철학 전공) 및 텍사스 주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미남침례교, Ph.D.)에서 공부를 했다.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토마스로드침례교회(제리 팔웰 목사), 새들백교회(미남침례교회, 릭 워렌 목사)와 Evangelical Free Church Fullerton(찰스 스윈돌 목사) 및 Fellowship Church(미남침례교회, 에드 영 목사)에 출석하며 교회를 관찰했다.

필자의 신앙과 신학과 사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찰스 스펄전, 알 에이 토레이, 존 알 라이스, 마틴 로이드 존스, 잭 하일스, 제리 팔웰 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필자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적이고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다. 필자는 ‘랜드마크(지계석주의) 침례교인들’의 신앙과 사역에서 훌륭한 점들을 많이 발견하고 좋은 영향을 받았다. 적극적인 전도, 철저한 경건생활, 성별(聖別), 강력한 설교 등은 랜드마크 침례교인들의 큰 장점이다. 지난 20세기에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개교회와 주일학교를 이끌었던 잭 하일스 목사가 대표적인 랜드마크 침례교인이다. ‘랜드마크 주의’(Landmarkism)는 교단이 아니라 미국의 일부 침례교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비주류 침례교 역사관이다. 미남침례교회 안에서도 한때 영향력을 미쳤으나 주류가 된 적이 결코 없었다. 현재는 미국의 일부 독립침례교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배타적 침례교 역사관’이다. 그러나 필자는 랜드마크 침례교인 중 하나는 아니다. 즉 랜드마크 침례교인들의 ‘배타적인 침례교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서침례교회, 더 정확히 말하면 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는 교단이 아니라 친교회이다. 필자는 다년간 성서침례친교회의 몇몇 사역자들과 교제를 해왔다. 그러나 북미에 온 후 지난 30년간 성서침례친교회 안에서 공적인 활동을 한 바가 전혀 없다. 필자는 그저 한국과 미국의 성서침례친교회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한 영향력을 감사하고 그 안의 사역자들과 교회들을 사랑하며 외부에서 그들을 돕는 것으로 족하게 여긴다. 필자는 보수적이고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침례교인이고,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공유하는 분들과 폭넓게 교제하며 협력하는 사역자이며,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개신교 목사 중 하나이다.

계시와 계시의 영을 혼동하는 오류

지방교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계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 . .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해 주시고(엡1:17). 위 말씀은 분명히 ‘조명의 영’이라고 하지 않고 ‘계시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박: 계시와 계시의 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쓰여졌다. “내가 전한 복음은 . .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즉 계시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엡 1:17의 지혜와 계시의 영은 복음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쓰여졌다. “계시의 영”은 달리 말하면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인 것이다. 따라서 니와 리는 “계시”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고 “계시의 영”이라는 말을 써야 했었다. 지방교회는 성경적인 단어를 비성경적으로 사용한 후에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변명을 하는 아주 고약한 악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악습관은 많은 혼동과 오해와 논쟁을 유발한다. 지방교회가 이런 일탈한 행동을 지속하며 계속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주류 정통교회에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방교회가 “계시의 영”이라는 말을 쓴다면 아무도 지방교회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과대 선전으로 포장한 함량 미달의 지방교회 옹호자

지방교회: “엘리옷 밀러를 “연구실 중심의 작가”로 애써 폄하한 것은 사실 왜곡이며 김목사가 크게 실수한 것이다.”

반박: 밀러는 연구 중심의 생활을 사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는 개척교회와 소교회를 이끄는 사역자들이 목회 현장에서 당하는 고난과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몇몇 국가의 지방교회 신자들을 가서 만났다고는 하지만 잠시 만나서 환담하는 것으로 어찌 사람들을 깊이 관찰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몇 년간 가까이 함께 지내며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조 죄의 근원으로 여기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아이디어

지방교회: “김목사가 성경 지식을 진리와 동일시 한 것은 큰 실수이다. . . . 워치만 니는  김목사의 말처럼 성경 진리 즉 그리스도를 무시하거나 희생시킨 적이 없다.”

반박: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딤후 2:15)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를 말하면 성경 지식을 말한다고 매도해 버리고, 진리는 “성경 진리 즉 그리스도”라고 비틀어 버리면 언제 ‘진리의 지식’(딤후 3:7)에 이를 것인가? 어리석은 변론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시키지 말고 논의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라. 성경이 진리를 언급할 때 그것이 모두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대한 설교자 크리스웰은 신구약 전체의 진리를 설교하는 일에 17년 반을 필요로 했다. 탁월한 강해 설교자 존 맥아더는 신약의 진리를 설교하는 일에 40년 이상이 걸렸다. 권위 있는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의 진리에 관해 366회 설교를 했음에도 로마서 강해를 다 마치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 진리는 이처럼 심오하고 평생을 바쳐 전한다 해도 다 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고(요 8:32),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딤후 3:16), 순례자의 길에 등과 빛이 되고(시 119:105), 교훈을 얻게 하고 소망을 주며(롬 15:4), 생명을 장구하게 하고(신 32:47), 능히 든든히 세워준다(행 20:32).

‘진리와 성령 안에서’라는 전제 조건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치에 관한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의 주장은 비성경적인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 니는 ‘그리스도인의 신조’를 분열의 죄의 근원으로 매도하고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신조를 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조’를 버리라는 말은 곧 성경의 진리를 버리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인 교회가 진리를 희생한 대가로 일치를 도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통 삼위일체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신조를 버리고 양태론을 믿는 사람들과 일치를 도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신조를 죄의 근원으로 여기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로는 결코 일치를 도모할 수 없다. 오히려 ‘본질적인 진리’를 기초로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실천 가능한 것이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는 말씀을 주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즉 ‘진리와 성령 안에서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10: 마틴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의 근본적인 차이)을 참조하기 바람.

후안무치한 강도의 논리를 사역의 철학으로 삼은 지방교회

지방교회: “김목사는 허드슨 테일러가 만든 중국내지 선교회 산하의 모임들을 워치만 니가 복수의 장로들이 전적으로 행정을 주관하는 <한 지역에 한 교회>라는 성경적인 위치로 되돌린 것을 두고, 허드슨 테일러 사역에 해를 끼쳤다고 했다.”

반박: 일본이 한국을 침탈한 이유를 변명할 때 사용하는 논리는 이것이다. 일본은 낙후된 조선에 근대 산업을 소개해 주었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강도의 후안무치한 논리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러한 ‘후안무치한 강도의 논리를 사역의 철학으로 삼고 있는 집단’이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는가? 마땅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런 사람들과 무슨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통교회와 지방교회의 근본적인 차이

지방교회: 김 목사는 ‘정통 교회’라는 말을 반복해서 썼지만, 무엇이 정통 교회인지를 밝힌 적이 없다. . . . 김 목사가 말하는 보편 타당한 정통 교회의 정의는 무엇인가?

반박: Merriam-Webster 사전에 의하면  정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되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된 것으로 지지하거나 믿는 것(accepted as true or correct by most people : supporting or believing what most people think is true)”을 뜻한다.  정통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교회에 적용해 보면 정통교회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으로 볼 때 정확하고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정통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달리 말하면 ‘삼위와 한 본질’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경륜적으로 볼 때) ‘일위일체 하나님,’ 즉 (경륜적으로 볼 때) ‘일위와 한 본질’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물론 이것은 정통 신앙이 아니다. 지방교회와는 달리, 정통교회는 (존재론적으로나 경륜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봉한다.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는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위격을 동일시하는 주장(일위일체론)을 편다. 물론 이런 무분별하고 비성경적인 행위는 듣는 사람들이 위격에 관해 혼동하도록 악영향을 미친다.

사실상 주님은 “그[성령]가 오실 때 내가 온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인 것이다.” 성령은 주 예수님이시고, 주 예수님은 성령이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주님은 17절에서 “실제의 성령이 . . . 네 안에 계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20절에서 그는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죽었다가 살아나셨고 지금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 . . 게다가 로마서 8:9-10은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은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에 언급된 생명의 성령은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의 경험이 된 그리스도이시다. . . . 그러므로 성경은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성령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셋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0)

반면에 정통교회는, 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 찰스 핫지의 아래의 설명과 같이, 삼위는 구별되며 본질에 있어서 동일함(정통 삼위일체론)을 명확하게 천명한다.

주는 성령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들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 하나이시고 동일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이시고 동일한 존재(Being)이시다. . .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의미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본질과 능력의 동일함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73)

정통교회를 정의하기 위한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정통이 아닌 것을 먼저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통과 상반되는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이단이다. 그러면 이단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미국의 탈봇신학대학원의 교회사 교수인 알란 곰즈는 이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독교의 이단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성경 66권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central doctrines)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명백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부정하는 한 개인 혹은 한 무리의 지도자들 혹은 조직으로부터 배운, 어떤 특별한 교리 체계를 신봉한다(Alan Gomes, Unmasking the Cults, 7).

그러면 정통교회(orthodox church)는 무엇인가? 답은 이단의 정의를 뒤집어 보면 바로 나온다. 즉 정통교회는 성경 66권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central doctrines)을 공유하는 교회들(여기서는 정통 개신교)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은 무엇인가? 곰즈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교리들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몸의 부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대속 및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포함한다”(Ibid., 10). 그런데 왜 이러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교리로 꼽히는가? 곰즈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성경(마 28:19; 요 8:24; 엡 2:8-10)은 위에 언급된  신앙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Ibid., 11). 정통교회는 따라서 위에 언급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공유하는 교회들’을 말한다.

정통교회들은 그러나 ‘비본질적인 교리들’에 관하여는 다른 견해를 소유할 수 있다. 곰즈에 따르면, “지엽적인 (예를 들면 비본질적인) 교리들은 환난의 시기, 세(침)례의 방법, 혹은 교회 정치의 구조 등과 같은 사안을 포함한다”(Ibid., 11). 이런 맥락에서 정통교회들은 무천년설과 전천년설로 신학적 해석이 갈릴 수 있다. 또한 실행적인 측면에서 세례와 침례로 나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로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인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재림’ 및 ‘성례 혹은 교회 의식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신조 등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즉 정통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비본질적인 교리들’에 한해서는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따를 자유를 부여한다.

가톨릭은 정통교회의 개념을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과 16세기의 개혁자들 및 그 이후의 개신교회들을 박해하는 일에 심히 악용했다. 가톨릭의 박해는 교회사뿐 아니라 인류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정통교회의 개념과 실존’은 카톨릭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A. D. 325년 아리안주의(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당시의 교회들(정통교회)이 니케아에서 회의를 개최했을 때, 교회사가 케언즈에 의하면, “250명에서 300명 정도의 교회 감독들이 참석했는데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부터는 1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126).

초대교회는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정통 신앙을 확정했고, 이와 더불어 정통교회의 범주를 설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통교회는 가톨릭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종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유산인 것이다. 그리고 정통교회의 범위를 세분화할 때 정통 개신교도 있고, 정통 루터교회도 있으며, 정통 개혁교회도 있고, 정통 침례교회도 있으며, 정통 복음주의 교회도 존재하는 것이다.

정통교회(여기서는 정통 개신교)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공유하며, 초대 교회의 ‘성경적인 신조들’(creeds) 역시 공유하는 교회들을 가리킨다.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변증학자인 노먼 가이슬러는 그래서 초대교회의 신조를 정통의 한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탈한’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일반적으로 인정된 기준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서[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의 문맥에서, 어떤 교리가 성경과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조들에 기초한 역사적인 그리스도인의 정통 신앙을 훼손하거나 이 정통 신앙과 심각한 긴장 관계를 유발할 때, 우리는 그 교리를 일탈한 것이라고 말한다 (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 1)

지방교회는 정통교회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정통교회의 개념은 정통교회와 비정통교회(이단 포함)를 나누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분별하거나 나누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왜냐하면 ‘단일성의 철학’을 강조하는 종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를 신봉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교회를 (비유적으로가 아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후 ‘비성경적인 교회론’(한 도시에 한 교회)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실제적인 지방교회의 개념

지방교회:김 목사는 . . . 또한 비판 대상인 ‘지방 교회’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반박: 지방교회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지방교회’의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먼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지방교회’에 대한 개념을 지방교회의 글(#2: 지방교회, 지방교회-이단과 정통)을 통해 파악해 보도록 한다.

제목에서 ‘지방교회’라는 말이 두번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앞의 지방교회(Local church)는 외부인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한 말이라면, 뒤의 지방교회(local church)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처럼 ‘어느 한 지역(city) 안에 참되게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자신들의 책에서 ‘지방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후자를 의미한다(위트니스 리, 성경에 나타난 교회, 1986, 102-103쪽).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지방교회’는 “어느 한 지역(city-도시) 안에 참되게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한 지역’(city-도시)과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한 지역(city-도시)의 모든 거듭난 사람들로 구성된 한 교회’인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city-시)에 있는 단 하나의 교회,’ ‘예루살렘(city-시)에 있는 단 하나의 교회’ 등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개념의 ‘지방교회’가 성경에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하여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웨인 그루뎀 교수는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가지 유형의 교회(지역교회와 우주적/보편적교회)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준다.

신약에서 ‘교회’라는 말은, 한 개인의 집에서 모이는 매우 작은 한 무리의 모임에서부터 우주적인 혹은 보편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한 무리의 신자들(a group of believers at any level)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한 ‘가정 교회(a house church)’는 롬 16:5(‘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및 고전 16:19(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로 불려졌다. 한 도시 전체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an entire city)도 ‘교회’로 불려졌다(고전 1:2; 고후 1:1; 살전 1:1). 한 지역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a region)도 행 9:31에 ‘교회’로 언급되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행 9:31). 마지막으로 전세계 도처에 있는 교회도 ‘교회’로 언급될 수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 5:25). 또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 . .”(고전 12:28). 여기 마지막 구절에서, 그 어떤 개별적인 교회에 주어지지 않은 ‘사도들’에 관한 언급은 이 말이 우주적인(혹은 보편적인) 교회에 주어졌음을 보증한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857-58)

우리는 지역적인 것에서 우주적인(혹은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는 ‘교회’로 마땅히 불려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집들에 있는 한 교회의 모임만이 교회의 참된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거나 전 도시의 수준(a city-wide level)에 이르는 한 교회만이 교회로 마땅히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하거나 우주적인(혹은 보편적인) 교회만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모든 수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God’s people)는 교회로 마땅히 불려질 수 있다.

그루뎀은 여기서 네 가지 수준의 교회를 언급한다. (1) 가정교회, (2) 한 도시 전체에 있는 교회들, (3) 한 지방 도처에 있는 교회들, (4) 모든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불가시적인 우주적인(혹은 보편적인) 교회 등이 그것이다. 그는 또한 이 네 가지 수준 가운데 어디에 속할지라도 “한 무리의 신자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라면 “교회로 마땅히 불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루뎀은 여기서,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한 도시에 존재하는 한 교회’만이 교회로 마땅히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한 도시 전체에 많은 가정교회들이 있으며, 이 모든 가정교회들은 마땅히  다 교회로 불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한 도시 안에 한 교회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지방교회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한 도시 혹은 한 지역 안에는 다수의 교회들이 있고, 하나님은 이들이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요 17:17; 고후 13:8; 딤전 3:15; 엡 4:3, 24).

지방교회의 ‘한 도시(city)에 한 교회’ 주장은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다. 그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말은 ‘한 도시에 한 교회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지시적인’(prescriptive) 내용의 진술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에 존재했던 한 교회에 관한 ‘서술적인’(descriptive) 진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는 예루살렘에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지시적인’(prescriptive) 내용의 진술이 결코 아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한 지역교회를 ‘기술하는’(descriptive) 진술이다. 따라서 본문 말씀(고전 1:2; 행 8:1)을 근거로 ‘한 도시에 한 교회’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지방교회의 주장은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한 도시에 한 교회’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바가 전혀 없다!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는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인 근거 위에 자신들의 부실하고 왜곡된 교회론을 수립해 놓은 것이다. 이들의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은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막연한 환상일 뿐이고,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다.

지방교회는 지방 명칭(예: 데살로니가) 외에 다른 명칭으로 교회 이름을 붙인 예가 성경에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하곤 한다. “성경에 지방 명칭을 교회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구절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지방교회는 늘 꽁무니를  빼곤 한다. 성경에서 그런 명령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방 명칭을 붙인 교회들(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을 사실적으로 기술했을 뿐이다. 성경은 교회 명칭을 어떻게 붙이라 혹은 말라 하는 명령을 내린 바가 전혀 없다! 성경의 기술적인(descriptive) 표현을 지시적(prescriptive)인 표현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순진한 성도들을 기만하고, 교회 명칭을 붙이는 행위를 죄, 영적 음행, 배도, 큰 바벨론이라는 등의 몰상식하고 비성경적이며 거칠고 난폭한 용어로 정죄하는 지방교회의 행태는 야만적이고 교활한 기만행위인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 교회 안의 분쟁과 다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책망(고전 1:10-13)은 지방교회의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을 결코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육신적인 행위를 책망한 것이지, 고린도 시에 교회가 단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고린도 시 혹은 다른 도시나 지역, 더 나아가 모든 시대의 모든 지역의 교회들은 파당과  싸움이 없이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 말씀(고전 1:10-13)을 개신교 안의 교파를 비판하고 척결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본문의 본래의 뜻을 곡해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본문을 지방교회가 하는 것처럼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용하는 것은 본문의 참된 뜻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한 도시(city)에 한 교회’ 주장은 또한 비논리적이다. 고대의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경제권이었다. 고대 도시는 그러나 규모 면에서 현대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대의 도시, 특히 복합 대도시권(metroplex)은 고대의 한 지역뿐 아니라 여러 지역, 심지어 한 나라의 크기에 버금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구 천만 명을 포용하고 있는 서울특별시를 생각해 보라. 또한 10개의 거대 카운티가 모여 이룬 미국의 남가주 메가 지역(Southern California Megaregion)을 생각해 보라. 이 거대한 단일 경제권에 남한 인구의 절반인 약 2천 3백만 명이 살고 있다. 장래의 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아시고 경영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거대 도시에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하도록 작정하셨을 그 어떤 논리적인 이유가 과연 존재하는가?

게다가 지방교회의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은 또한 비실제적이다. 교회성장에 관한 조사 보고서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존의 설립된 교회들보다 개척교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개척교회들이 전도의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교회보다 여러 교회가 전도할 때 더 효과적이다. 심지어 한 교파보다 여러 교파가 참신한 방법으로 선의의 경쟁을 할 때 더 효과적이다. 한 교회나 한 교파가 지리멸렬할 때 다른 교회나 다른 교파가 약진할 수 있다. 성령의 신선한 부으심 때문에, 혹은 새로운 지도자나 선교 원칙과 전략 때문에 새로운 활력을 얻은 새로운 교회나 교파가 기존의 교회나 교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교회사는 기존의 교회보다는 개척교회가, 한 교회보다는 여러 교회가, 한 교파보다는 여러 교파가 저마다의 개성과 다양하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선의의 경쟁을 벌일 때 교회는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무대 공간이다. 실제로 지방교회의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실제적인 교회론은 지방교회 내부의 비판과 분열을 압살하는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교회의 개척 및 성장과 확장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지방교회의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은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일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허구와 가설에 불과하다.

지방교회가 아닌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이단적 교회론

지방교회: “김 목사는 ‘교회’와 ‘교파’를 동일하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반박: 지방교회는 ‘교회’와 ‘교파’를 혼동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소위 지방교회, 즉 ‘한 도시에 한 교회’가 아니면 성경적인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도시에 한 교회’의 모델은 바로 워치만 니가 창시한 지방교회이다. “물론 입장으로 보나 원칙, 본질, 증거 등 각 방면으로 보아 [우리가] 지방 교회임에는 틀림없으나”(위트니스 리, 성경에 나타난 교회, p.99-100, 한국복음서원). 따라서 ‘지구상의 유일한 성경적인 교회’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뿐이다. 그들에게는 지방교회가 아닌 다른 모든 교회들은 참된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게다가 ‘명칭’(예를 들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및 ‘신조’와 ‘교제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모두 교회가 아닌 ‘교파’ 혹은 ‘교파 교회들’이다. 그리고 교파에 속한 교회들은 ‘성경적인 참 교회’(지방교회)가 아니라 분열의 죄를 범하고 있는 종교적 단체들이며 ‘영적 음행자,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이다.

이런 주장을 함으로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다른 모든 교회들을 비성경적인 거짓 교회요 교파로 매도해 버렸다. 그리고 이런 비성경적이고 (다른 성경적인 교회들을 거짓 교회요 교파로 매도하기 때문에) 이단적인 교회론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제멋대로 하고 있다. “김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배척하고, ‘성경에 없는 교파주의’는 옹호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말인가? 지방교회가 아니면 참된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교회가 소위 ‘명칭’과 ‘신조’와 ‘교제권’을 가지고 있으면 참된 교회가 아니라 교파로 변질되는가? ‘영적 음행자,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이 무슨 교회일 수 있는가?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란 말인가?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주장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한 도시에 한 교회’ 주장이 왜 비성경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을 마쳤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이러한 비성경적인 교회론은 성경적인 교회론과 비교해 보면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적인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탁월한 조직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은 ‘더 순결한 교회의 표시’(signs of a more-pure church)를 아래와 같이 논한 바 있는데, 이는 ‘성경적인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준다.

  1. 성경적인 교리 (혹은 말씀의 바른 선포) (딛 1:9, 11; 유 3)
  2. 성례(혹은 의식)의 바른 집행 (고전 11:17-34)
  3. 교회의 권징의 바른 사용 (고전 5:6-7, 12-13)
  4. 참된 예배 (엡 5:18-20; 골 3:16-17)
  5.  효과적인 기도
  6. 효과적인 증언 (마 28:19-20; 요 13:34-35; 행 2:44-47; 요일 4:7)
  7. 효과적인 교제
  8. 성경적인 교회 치리 (딤전 3:1-13)
  9. 영적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 (행 1:8; 롬 1:16; 고전 4:20; 고후 10:3-4; 갈 3:3-5; 딤후 3:5; 약 5:16)
  10. 교인들(members)의 개인적인 경건한 삶 (살전 4:3; 히 12:14)
  11. 가난한 자들을 돌봄 (행 4:32-35; 롬 15:26; 갈 2:10)
  12.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벧전 1:8; 계 2:4)

워치만 니에 의하면 위와 같은 순결한 교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정통교회일지라도 ‘명칭’과 ‘신조’와 ‘교제권’을 가지고 있으면, 달리 말해 한 도시 안에서 한 지방교회에 속해 있지 않으면 교회의 단일성을 해치는 ‘분열의 죄’를 범하고 있는 집단인 것이다. 또한 위트니스 리에 의하면 순결한 정통교회들일지라도 지방교회에 속해 있지 않고 교파에 속해 있다면 ‘영적 음행자요 음녀이며 배교자이고 큰 바벨론이며 사탄의 조직’인 것이다. 그리고  ‘영적 음행자요 음녀이며 배교자이고 큰 바벨론이며 사탄의 조직’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리와 지방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와 교회의 신조를 표방하는 행위 및 한 지역에서 하나의 지방교회에 속하지 않는 행위를 ‘교회의 단일성’을 해치는 ‘죄 혹은 영적 음행’으로 정죄한다.

정통 개신교회를 음녀로 매도하는 이단적 교회론

지방교회: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자 충만”인 유기체(organism)이지(엡1:23) 단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체 (organization) 가 아니다. 즉 ‘성경적인 교회’는 ‘종교’나  ‘기독교파’가 아니다. 대신에 주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하실 수 있는 ‘인격체’이다 (행9:4). 그럼에도 김목사가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를 “정통 교회의 무덤 위에서 번성하는 집단”, “정통 교회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라는 식으로 혐오스럽게 말한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님을 모독한 것이다(골1:18). 누가 이런 불경죄를 지을 권한을 김목사에게 주었는가?

반박: 교회는 신적 측면과 인적 측면이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교회의 신적 측면을 가리킨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고전 3:23). 반면에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을 때 이것은 교회의 인적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 3:3).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전 5:1).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전 6: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갈 3:1).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필자가 ‘정통교회의 무덤” 혹은 “정통교회의 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물론 정통교회의 인적 측면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 역시 교회의 인적 측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지방교회는 필자가 교회의 인적 측면을 표현한 것을 보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혹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한 것도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님을 모독한 것”이라는 말인가?

지방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교회라고 믿고 가르친다. 필자는 지방교회 측 진리 변증 위원회 한국어권 담당 김바울 사역자로부터 이 말을 직접 전해 들었다. 이뿐 아니라 지방교회의 이러한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교회론은 가이슬러와 로즈에 의해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지방교회의 입장의 터무니 없음(absurdity)을 예증하기 위해서 위트니스 리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심으로, 우리는 이제 삼일 하나님은 ‘사위일체 하나님’(‘four-in-one’ God)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넷은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몸이다. 신적인 삼위일체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삼위일체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Lee, A Deeper Study, 203-204). 아무리 많은 해석학적 회전(hermeneutical gyrations)도 이 신학적 부조리(absurdity)를 풀 수 없다. 분명히, 리는 그리스도의 몸(교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어떤 피조물이나 피조물들일지라도 삼위일체의 구성원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통 삼위일체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것은 비상식적(senseless)이고 쓸모없는(useless) 짓이다. (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0).

성경은 교회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표현한 것은 실제가 아닌 비유(metaphor)인 것이다.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교회를 위한 비유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교회에 관한 몇 가지 비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가족’(딤전 5:1-2), ‘그리스도의 신부’(엡 5:32), ‘포도나무 가지’(요 15:5), ‘감람나무’(롬 11:17-24), ‘밭’(고전 3:6-9), ‘건물’(고전 3:9), ‘추수’(마 13:1-30), ‘새 건물’(벧전 2:5), ‘새로운 한 무리의 제사장들’(벧전 2:5), ‘하나님의 집’(히 3:6),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그리스도의 몸’(고전 12:12-17)(Grudem, Systematic Theology, 858). 그루뎀은 또한 이러한 비유를 실제로 착각하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분명히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견해, 즉 교회는 오늘날 이 땅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지속적인 성육신’(continuing incarnation)이라는 주장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육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The church is not the Son of God in the flesh).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몸으로 부활하셨고 몸으로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그분은 지금 하늘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여기 이 땅 위에 있는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 .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비유는 서로에게 우리의 상호 의존을 증대시켜야 하며, 또한 몸 안의 은사의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증대시켜야 한다. (Ibid., 859)

지방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견해와 흡사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결코 아니다! 지방교회는 이런 터무니없고 비성경적이인 교회론을 가지고 정통교회의 성경적인 교회론을 공격한다. 또한 가톨릭과 흡사한 이단적 교회론에 기초하여 정통교회를 ‘영적 음행자’요 ‘음녀’요 ‘배교자’요 ‘큰 바벨론’이요 ‘사탄의 조직’이라고 흉칙하게 비판한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지방교회는 가톨릭과 동방정교와 개신교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며 이런 가혹한 단어들을 불법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분열들과 교파들은 큰 바벨론 안에서 완성된다”(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463).

“바벨론이 무너졌다. ... 가톨릭이 무너졌다, 그리고 모든 교파들이 무너졌다”(Witness Lee, The Seven Spirits for the Local Churches, 97).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큰 바벨론, 즉 배교한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위에 임하는 심판을 본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 외에 주님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즉 큰 바벨론을 특별히 심판하실 것이다"(Witness Lee, Revelation, 22).

그런데 지방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지방교회여, 위와 같은 용어들(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교회, (지방교회에 의하면) 즉 그리스도’를 비난해도 괜찮은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단 교리의 두려운 실상을 본다. 만약 지방교회가 그들의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인 교회론에 함축되어 있는 이런 무서운 사실들을 빤히 알면서도 계속 동일한 주장을 반복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신성을 모독하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여, 정통교회에서 떠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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