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불만에 88년 이후 명절로 부활
일찍 성묘한 후 마을단위 놀이대회
당간부 김일성 시신 찾게해 우상화 이용도

나라의 살림살이부터 가계에 이르기까지 경제사정은 어려워지고, 민생을 외면한 채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해 있지만 오랜만에 고향을 찾거나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여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추석의 의미는 각별하다. 아무리 힘든 삶이지만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북녘 땅 북한에서도 추석은 나름대로 고유 명절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족 최대 명절이었던 추석이 김일성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 등에 밀려 일반 민속명절로 퇴색되기는 했지만 북한 주민들도 해마다 추석날만큼은 부모의 묘를 돌보고 제사도 지낸다. 하지만 분단 반세기동안 이질화된 남북한의 문화차이만큼 추석명절의 의미와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북한이 추석을 명절로 인정한 것은 지난 1988년부터다.

이전까지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의 생활양식과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워 추석이나 설 같은 민족 전래의 명절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 왔다는 게 우리 정부당국의 판단이다. 그렇지만 북한당국은 민족 전래의 전통문화에 대한 뿌리가 쉽게 뽑히지 않고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자 70년대 초부터는 추석을 계기로 한 성묘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당국은 88년 추석과 89년 음력설·단오를 잇달아 휴일로 지정하면서 민속명절로 부활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추석 성묘문화는 계속 허용돼 왔다는 탈북자들의 주장도 있다. 북한당국이 1960년대 말부터 김일성의 이른바 유일영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봉건유습 타파와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외치면서 민간풍속 대부분을 봉건적 잔재로 매도했지만 성묘까지 완전히 금지시킨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아무튼 북한은 올해도 추석 하루를 휴일로 지정해 쉴 수 있게 했다. 우리가 사흘간의 연휴를 가진 것과는 차이가 난다. 그나마 북한은 추석과 설·정월대보름·단호 같은 명절날 하루를 쉬는 대신 다른 일요일에 근무토록 하고 있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 주민들은 추석날 아침 일찍 준비한 음식과 벌초를 위한 낫 등을 가지고 조상의 묘를 찾아 떠난다. 남한에서는 많은 가정이 집에서 차례를 먼저 지내지만 북한에서는 곧바로 성묘를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차례를 지낼 경우 음식은 대체로 간소하게 준비하는데 쌀밥과 송편, 돼지고기, 사과·감·밤·대추 등 서너 가지 과일, 계란, 두부, 콩나물 정도이며 술은 청주를 쓴다. 북한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표적인 추석 음식은 송편이며 햇콩과 참깨, 밤, 대추 등으로 속을 넣어 만든 반달형 흰 송편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성묘를 위해 묘에 도착하면 가져온 낫 등으로 벌초를 하고 상돌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부은 후 묵례를 한다. 북한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절하는 문화가 지난 80년대 들어 조금씩 부활되고 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북한 출판물들은 묵례나 서서 깊숙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을 `서서 하는 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묵례 후에는 빈 접시에 술, 밥, 국, 반찬 등을 조금씩 담아 묘 주변 땅속에 묻은 뒤에 온 가족이 상석 주위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추석날 성묘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벌을 받는다면서 어떻게든 거르지 않았던 성묘 풍속도 90년대 중반 들어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지방을 중심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또 평양에 산소를 둔 지방주민들은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기 어려워 성묘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북한당국은 평양시 교외의 공동묘지에 가는 시민들을 위해 추석날 오전 5시30분께부터 오후 10시께까지 궤도전차, 버스, 지하철 등을 운행하고 묘지가 집중돼 있는 지역에는 별도로 전용 교통편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림없으며 교통편이 열악한 지방에서는 걸어서 묘지까지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부 주민들은 복잡한 추석날을 피해 1주일 정도 먼저 성묘를 다녀오기도 한다. 평양시의 주요 공동묘지는 중화군·용성구역·순안구역 등에 있으며 지방의 공동묘지는 교통편 등이 감안돼 시나 군내 구역안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1∼4시간 정도 걸으면 도달할 수 있다.
성묘 뒤에는 마을 단위로 씨름대회나 그네뛰기·윷놀이 등 놀이판을 벌인다. 손꼽히는 그네뛰기 장소는 평양 창광산과 모란봉으로 이곳에 군집해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마다 줄을 매고 여인들이 치맛자락을 날리며 그네를 뛴다. 씨름경기는 대동문과 보통문 앞뜰에서 하는 경기가 유명하다고 한다. 또 지방에 따라서는 줄당기기(줄다리기)와 소놀이, 거북이놀이, 길쌈놀이 등을 즐긴다.

북한의 명절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가계 우상화를 위한 계기로도 활용된다. 노동당과 내각의 간부, 북한군 장병, 노동자들이 추석을 맞아 김일성의 조부모와 부모 등의 묘를 찾아 화환을 증정하는 풍경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정군의 간부들을 모두 데리고 김일성의 시신이 있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는 것도 이채롭다. 이는 북한에서의 명절 개념이 우리와 다른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민족전래의 전통관습에 따른 민속명절만을 지칭하는 데 비해 북한은 국경일·기념일·민속명절을 모두 합쳐 명절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명절은 종류 별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필요에 따라 노동에서 자유로운 공휴일, 노동은 하지 않지만 노동량은 부과돼 추후 공휴일 등을 기해 할당된 노동량을 보충해야 하는 휴무일, 그리고 단순히 기념행사만 하는 기념일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이른바 태양절)과 김정일의 출생일인 2월 16일은 “나라와 민족의 융성·발전에 매우 의의 깊고 경사스러운 날”인 국경일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간주된다.
지난해 김일성의 90회 생일 때 북한 언론들은 평양 등 북한 각지서 진행된 각종 생일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각 계층 근로자들이 큰 기쁨과 환희 속에 명절의 하루를 뜻깊게 보냈다”고 선전했다. 북한이 김일성의 생일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생일이 이처럼 대규모 경축 행사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72년 환갑을 맞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1974년 4월 62회 생일을 기해 ‘민족최대의 명절’로 제정됨과 동시에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각종 기념행사들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한편 주민들에게는 각종 생필품과 고기와 과자 등 생일 특별배급이 제공됐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듬해인 95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북한은 그 해 2월 7일을 기해 △2월 16일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하고 △매년 2월 16일과 17일을 휴일로 하며 △모든 기관·기업소·단체들과 가정에서는 이날 공화국 국기를 게양하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이밖에 북한군 창건기념일(4.25)과 국제노동자절(5.1), 조국해방기념일(8.15), 정권 창건기념일(9.9), 당 창건기념일(10.10), 헌법절(12.27) 등도 중요한 국경일로 취급되고 있다.

남북한은 추석을 계기로 8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를 9월 20일부터 북한 금강산에서 갖는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를 위해 지난 9월 7일에는 판문점을 통해 최종명단 각 100명 씩 교환했다. 분단 반세기 동안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사이가 돼버렸지만 수 천년을 이어온 조상전래의 명절에 인식을 함께함으로써 한 민족, 한 핏줄임을 확인한 것이다.

북한은 명단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우리측에 10만톤의 가을농사용 비료를 달라고 요청했다. “올 봄 남쪽에서 지원한 비료 20만톤이 남북화해와 단합, 남북관계 활성화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인 결실의 계절 최대명절에 동포에게 손을 벌여야 하는 북한당국의 속사정은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 아직도 남북한의 동포가 명절의 풍요로움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현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