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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바람직한 이단연구인가?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 ②
2015년 03월 05일 (목) 10:38:32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다음은 본인이 지난 2월 23일에 호주에서 모인 4차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총회 시 이단연구가들 앞에서 한 강의다. 한국교계에는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하여 먹고 사는 소위 ‘하이에나’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이 글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할 빌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밝히는 것은 이 강의는 나를 반성하는 의미의 강의이며, 이단 연구가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교계의 하이에나와 한국교회와 이단연구가들 몸에 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3회로 나누어서 게재하는 바이다.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2)

최삼경 목사

어떻게 이단연구를 해야 하나?

바람직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 최삼경 목사
당연한 말이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 이단연구를 하지 말라는 의미다. 자기중심적인 이단 연구를 하는 자도 겉으로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매국노도 자기를 애국자라고 하는 것과 같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발등의 향유를 붓는 여인을 향하여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의를 가장한 것과 같다.

그러나 자기 성취적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한 번 이단 연구가가 잘못된 기준이나 잘못된 이해에 의하여 이단을 연구하게 되면 그 후부터 자신의 비판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끝까지 양보 없는 이단 연구를 한다. 이들의 특징은 이단의 칼을 적군이든 아군이든 상관하지 않고 들이 댄다는 것이다. 아무나 공격하고 아무나 정죄한다. 그것은 므리바 물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입으로 범죄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과 성경 말씀의 이름으로 이단을 연구하고 정죄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말씀은 이용될 뿐이며 자기 사상, 자기 의, 자기 영광, 자기 기분을 기준으로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이단연구를 하는지 아닌지 늘 반성하고 자기와 싸워야 할 것이다. 자기반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타에 대한 비판보다 앞서야 한다. 남에게 1천을 요구하려면 나는 1001이라도 살려고 해야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는다. 자기 논리, 자기 신앙, 자기 이성, 자기 경험 중심의 이단 연구를 하지 않도록 바울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2. 신학적 학문적 논리적 오류가 없는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신학적, 학문적, 논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의 연구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또 법정 송사에서 패하게 될 위험이 크다. 평신도 연구가의 경우, 비록 신학을 하지 않았어도 오랜 연구를 하고 그 업적이 있다면 전문가로 보아야 한다.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분이,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에 10년 넘게 일했고 그 성취가 있다면 그는 그 분야에 전문가로 보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라고 본다. 본인은 이단연구가로 평신도 연구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고, 목사로 부끄러운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을 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실수를 할 위험이 크다. 한 때 이단 연구를 하던, 한 물리학자가 있었는데 이만저만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신학의 본질적 부분이 아닌데도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정통신학자들을 이단으로 무차별하게 공격하였다. 한 비전문가가 수술을 많이 했는데 예측할 수 없는 마취 쇼크가 일어나자 간단하게 해결할 처방을 몰라 사람을 죽였다고 들었다. 이런 위험이 평신도 신학자에게 있다.

특히 이단연구가의 논리적 준비는 아주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큰 실수는 묻어질 수 있어도 이단 연구가들의 작은 실수는 크게 드러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개인적인 글과 공적 보고서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공적 연구는 관료적이면서도 불필요한 반복을 줄이고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 교단 보고서에조차 너무 장황하고 길고, 개인의 논문을 쓰듯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평신도 신학자들은 더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자신과 더 싸워야 하고, 더 겸손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신학의 개연성과 필연성, 그리고 논리적 개연성과 필연성을 구별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신학을 공부하고 이단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단연구가는 설교 경험, 전도 경험, 영적 경험, 목회 경험, 그리고 깊은 인생 연륜의 경험이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3. 사랑의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죽이는 연구보다 살리는 연구를 해야 한다. 사랑은 기독교의 기초다.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며, 공의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이단연구의 기능상 약점을 찾고 숨겨진 이단성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동정심 없는 이단 연구를 하기 쉽다.

10번 바른 이단 연구를 하고 1번 실수를 한다고 해도 그 한 번의 실수가 10번의 바른 이단 연구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이단자들의 이단 사상 못지않게 이단 연구가의 오류, 아집, 편견, 교만도 문제다.
학문과 법에도 동정심은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정 없는 이단 연구는 죽이는 이단연구다. 어쩌다 한 말 한 마디를 가지고 누구를 이단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이단 연구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문제를 가지고 이단을 규정할 때는 더 깊이 고민하고 가능하면 삼가해야 한다. 삼위일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삼위일체로 하면 ‘삼위일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터툴리안도 양태론자이다. 그가 사용한 예화들이 그렇고, 위격(hypostasis)이란 말을 본질(substantia)로 번역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동방신학과 달리 서방 신학에서 양태론적 삼위일체 사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심지어 동방신학자들은 칼빈마저 양태론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삼신론자라고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을 볼 때, 삼위일체로 이단을 쉽게 정죄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본인이 신사도와 관련된 모 목사의 경우 그가 잘못을 했다고 보지만 그를 보호했다. 그것은 굽어서도 아니고, 내 편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하고, 영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가르쳐주고 덮어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세이연 보고서에서 한국교회에 신사도 운동을 끌어들인 조 모 목사와 하 모 목사의 경우 그 이름을 제하자고 하였던 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교사로 최 모 씨의 경우, 본인이 그에 대하여 얼굴을 돌린 것은 그의 이단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거짓과 선교적 해악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리나 논리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제사장을 그토록 저주하셨던 예수님의 자세라고 본다.

4. 겸손한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잘못된 주장을 하고 비판을 해도 어디선가에 지지자가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자기 성취도가 높으면 겸손을 잃게 된다. 자신이 곧 기준이 되고, 자기가 판단자가 되고 만다.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의 극치다.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자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교만이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방 나라들의 교만이 심판의 주된 원인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만은 더 싫어하시고 더 저주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이단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하는데, 그 교리적 확신 뒤에 숨은 교만과 외식 즉 거짓이 없어야 한다. 교리주의는 이단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 제하고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적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창녀보다 세리보다 더 저주하셨다. 인류를 구속하는 마지막 고난 주간 1주일에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저주하는데 총력하셨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을 잃은 이단 연구는 또 다른 율법주의자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이 아니다. 은혜를 입은 죄인이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진리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이단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한국교회 앞에서도, 영혼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5. 인내심 있는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인내란 이름으로 불의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불의한 자라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무조건 비판하고 무조건 정죄하는 것만이 하나님 사람의 자세는 결코 아니다. 밝혔다면 그 후로는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로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다.

과거 본인이 조 아무개라는 분과 이단 논쟁을 하였는데 본인은 지금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사과문을 보내와 일단락 된 후에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가 두려워서도 아니고 굽어서도 아니며 회유를 당한 것은 더욱 아니다.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 다윗이 남긴 가장 위대한 말인,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은 이단연구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성도에게 누구나 모질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인내는 믿음의 속성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내가 옳아도 참고 기다려야 하며 내가 틀렸을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내심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 문제다. 성격이 급하다고 하지 않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이단들과 특히 이단 옹호자들에 대하여 참는다. 수백 번의 공격을 받았어도 거의 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의 논리적 윤리적 허점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모순 자체다. 그래도 참는다.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은 이단 연구가들의 실수에 대하여도 그동안 참았다. 이단 연구가들의 신학적 논리적 심지어 윤리적 약점을 발견하여도 참았다. 그렇다면 이단에 대하여도 특히 교회 안에서 이단성을 가진 자에 대하여 더욱 참아야 할 것이다.

6. 완전히 드러난 이단, 교회 밖의 이단과 교회 안에 이단성을 가진 자는 어느 정도로 구별하여 대처해야 한다.

이미 충분히 드러난 이단들이 있다. 예컨대 통일교 이단, 신천지 이단, 정명석 이단, 하나님의 교회 이단(안상홍, 장길자), 구원파 이단(권신찬, 유병언, 박옥수, 이요한) 그리고 안식교 이단, 박윤식 이단 등이 그렇다. 그러나 정통교회 안에 있으면서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 비판의 자세나 수위나 방법이 좀 달라야 한다고 본다. 그들에 대하여 ‘이단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작 비판할 때는 극악한 이단을 대하듯 비판하는 것은 자기 성취를 위하여 이단을 연구하는 분이란 증거다.

7. 영적 선과 정치적 선이 대치될 때, 정치적 선도 무시하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영적 선을 구해야 한다.

지구상에 지금까지 정치성이 배제된 이단 연구는 없었다. 항상 이단연구도 정치적 배경 속에서 생기고 또 연구되고 규정된다. 2-3명만 모여도 정치는 자연히 생기고 생겨야 한다. 그런데 이 정치가 이단연구를 어렵게도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또 피할 길도 없다. 그래서 선한 의미에서 정치를 무시하면 안 되며, 또 정치적으로 이단을 연구해서도 안 된다. 정치를 가까이 하면 정치의 오물이 묻고, 멀리하면 정치의 피해자가 된다. 개인 연구가들은 비교적 정치와 무관한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마저 정죄한다. 이 또한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개인 연구가는 공적 연구보다 힘이 없으며, 대신 자기 약점을 걸러줄 기구가 없다는 점을 모르는 무지다. 어떤 때는 개인 연구가 공적 연구보다 더 위험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치적 선과 영적 선이 대치될 때는 영적 선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랬다. 칼빈은 진리에도 충실했지만 탁월한 정치인이었으며, 탁월한 정치인이었지만 또한 진리의 사람이었다. 루터는 프레드릭이 자신을 도울 것을 계산하고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루터를 생전에 프레드릭을 만난 일이 없다고 한다. 그가 단지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프레드릭이란 사람을 붙여주셨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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