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마가는 ‘때가 찼다’(막 1:15)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여기에서 ‘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를 말한 것이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부른다(the Kairos is fulfilled).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현세에 살 뿐만 아니라 저 세상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두 세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두 세상의 시간개념은 전혀 다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말라”(벧후 3:8).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기억의지속> 1931

우리 인생이 참으로 절망스러운 것은 시간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인생은 종착점으로 향하여 달려간다. 모든 육체는 쇠하며 시간의 독재 앞에서 사람들은 남은 셈을 하며, 두려움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누가 이 시간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시간을 쓰러뜨린 화가가 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대표화가인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이다. 지금 소개되고 있는 ‘기억의 지속’이라는 그림은 우리 삶의 절대적인 폭군인 시간의 시체를 그렸다. 네 개의 시계가 보인다. 그러나 이미 시계는 멈춰 있고, 녹이 슬고 썩어버려 개미와 파리가 몰려들고 있다. 시계의 시체가 있는 대지는 이미 생명의 존재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이상한 물체들과 사람의 코와 눈과 털과 피부를 가진, 알 수 없는 동물이 시계와 더불어 나뒹굴어져 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아 보인다. 한가지 미련을 둘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 현실 넘어 저 수평선 끝은 이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빛이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과 시간은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뿐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이요, 하나님의 공간은 천국이다. 애초부터 우리가 그 개념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의 노예로 사는 사람은 자꾸 과거를 그리워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붙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늘어나는 주름살을 붙잡고 시간의 횡포에 대하여 억울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휘두르는 심판의 칼 앞에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달리는 이 시간을 처형하기로 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하기로 선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원한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 지금 시간의 횡포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이 현실이 아니다. 영원한 세계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반문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재라는 것이 현실인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현실은 곧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러므로 사실상 현실은 초현실(시간을 극복한 시간)이 현실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현재는 영원이 현실인 것이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