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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구한말 조선의 상황
1884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와 그 역사적 의미④
2014년 07월 29일 (화) 13:55:25 김재성 박사 webmaster@amennews.com

김재성 박사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한국기독교선교13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뿌리와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한국교회연합(한교연) 교회와신앙위원회(위원장 김재성 목사)가 2014년 7월 3일에 개최한 ‘한국교회와 신앙세미나’에서 “1884년, 미국 북 장로회 한국 선교와 그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원고임. <편집자주>

4. 1884년, 갑신정변과 구한말 조선의 상황

   
▲ 김재성 박사
한반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시기는 한국의 군사력이 충분치 못하여 이웃 나라에 의존하던 때였다. 그러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구한말 조선의 상황은 존립마저 확신치 못할 정도로 위태롭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탈에 무너져서 1910년 이후로 1945년까지 치욕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884년도 한반도의 실상은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상한 시기에 구한말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해 주시고,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복음으로 구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실 때에, 정치적으로 참담한 핍박에 처해 있을 때였다. 람세스와 숙곳을 건설하는 노역에 지쳐서 쓰려질 때였다. 주전 538년에 바빌로니아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45:1, 에스라 1:1). ‘구원자’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로마의 압제 하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하실 때에도 역시 정치 군사적으로는 소망없이 처참한 상태에 놓여있을 때였다(눅 24:21). 백성들을 돌아보사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첫째, 구한말 조선의 궁궐 안에서는 편협한 지배층의 쇄국적인 폐쇄성으로 암담한 시절이었다. 암담한 미래를 모색하던 조정에서는 그러한 때에 알렌 의사를 만나기독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의존하고 신뢰하게 된다.

1866년에 벌어진 ‘병인양요’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개신교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이미, 다수의 로마 가톨릭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살해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중국을 거쳐서 조선에 들어온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 9. 7-1866. 9. 2) 는 충분한 의사소통이 없어서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흘린 피는 훗날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젊은 청년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의 과정은 어느 한쪽을 탓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고 무지하였다.1) 1863년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토마스 목사는 영국 성경공회 소속으로 윌리엄슨 목사의 집에서 한국 사람 두 명을 만났는데, 이들은 지푸의 조선 천주교인들이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음을 착안하였다. 중국어를 이해하는 조선인들이 많다고 하면, 한국에 가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나눠주면서 선교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1865년 9월에 백령도와 서해 항구도시들을 답사하였다.

다음 해, 상업적인 교역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으로 나서서, 선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숨겨 들어왔다.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배가 잠시 정박하는 곳에서 약 2백 여권의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이 배가 제지를 당하고 화염공격에 전복되자, 물 밖으로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면서, 살해당했다. 그가 도움을 주고자 찾아온 사람인 것을 전혀 몰랐던 자들이 가장 소중한 성경을 얻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 사건에 연계된 박춘권과 후손들과 새무얼 모펫 선교사가 만나게 되어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세우게 된 역사를 자세히 기술하였다.2)

이후로, 자칫하면 무지한 자들의 애국심으로 인해서 외국인은 무조건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들은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기에 외국 선교사는 조선 땅에 들어올 수 없었다. 1874년 흥선대원군의 실각하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보내어서 개화를 촉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는데, 조선군의 선제 발포를 문제가 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변란이 빚어낸 혼돈 속에 있을 때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3) 마침내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4)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도망했다. 직간접으로 관련된 개화당 세력 약 600여명이 처형되었다.5) 젊은 정치인들의 국가장악 시도가 실패하여 피로 물든 나라, 더 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음의 공포가 뒤엎은 땅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혁파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부패의 요인을 제거,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시각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중국에 속국화 되어져 내려오던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국화 하려 했던 것이다. 일종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본다.6)

그러나, 갑신정변을 연구한 대부분의 한국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높이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 갑신정변은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였으며,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을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었다. 급진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가장 치명적인 실패의 요인은 주도자들이 외세에 대해서 전연 인식이 부족했었다는 사실이다. 개화파는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라는 것을 단순히 근대 일본화라고 착각하면서 단지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7)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국세력,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8)

셋째, 구한말 조선의 정신적인 갈등, 사상적 방황과 지도층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 실학파의 구국운동이 실패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할 정신적인 중추세력이 표류하던 비극적 현상이다. 구한말 왕정 통치의 한계와 봉건제도의 패착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는데도, 개혁적 실학운동은 정치적인 격변에 휘말리면서 사색당쟁에 빠져 있었다. 충효적인 애국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이념적 혼돈의 연속이었다.

간략하게 조선 후기의 사상적 흐름을 요약하자면, 명나라를 무너트린 청나라를 통해서 서구 문물이 유입되었지만,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는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조선-중화주의와 주자성리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북벌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이요, 침략자인 청나라를 끝까지 도덕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조선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개화사상의 선구적인 흐름이 나타나는데, 청나라는 거부하지만, 문화와 산업, 기술은 수용한다는 다소 유연한 자세가 북학(北學)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다.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등이다. 북학을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던 연암 박지원을 정점으로 하여 실학이 점차 수용되었다.9)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학문이 아니라 기계와 태엽 시계, 각종 태엽 기계 등의 제조 기술을 배울 것과 서양의 학문도 직접 받아들이자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노론 내 비주류인 북학파와 소론 양명학파 외에도 중인 출신 지식인들은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신분제도의 비합리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차츰 외국 문물의 개방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는데, 북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후신이기도 했지만, 개화사상에 따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외정치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노론 북학파의 학통과 정치사상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은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결집하고자 노력하였다.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의 문인들을 문하생으로 삼았고, 1870년대 개항기에 와서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창, 서재필, 유길준, 윤웅렬, 윤치호 등 젊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이들의 논지를 따라서 고종은 1880년대 이후에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했다. 그러나, 안기영을 비롯한 대원군 주변 인물들이 고종을 폐위하고,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세우려는 국왕 폐립운동을 추진하다가 역모가 탄로 나면서 급반전되었다. 결국, 구한말 조선 조정은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쟁이 벌어지고 있던 1884년도 한반도에 기독교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들어온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한말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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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근처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확한 설명이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약탈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방금 평안 감사 박규수의 장계를 보니, ‘평양 방수성에 정박한 이양선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는 통에 우리 사람 7인(人)이 피살되었고 부상자 또한 5인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전사편찬연구소에서 낸 "병인/신미양요사"에 의하면, 선원들이 식량과 식수를 구하려고 하선하여 총질을 하며 백성들을 죽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음 글에는 주변의 현장 조사를 포함하여 그러한 부정적인 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M. W. Oh, The Two Visits of Rev. R. J. Thomas to Korea (May 6, 1933). 김원모, 『近代韓美交涉史』 (홍성사; 1979).
2) W. N. Blair, Gold In Korea, 13-15. 블레어 선교사는 제너럴 셔면호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3)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개혁파의 의지를 높이 인정하면서도, 철저한 국가운영의 준비가 부족했으며,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고 본다.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신용하 저작집 3. (지식산업사, 2000). 아세아문화사,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 진술 기록」 박은숙 역, (아세아문화사, 2009).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강범석, 「잃어버린 혁명:갑신정변 연구」 (도서출판 솔, 2006). 한국정치외교사학회, 「갑신정변 연구」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86). 윤병석 외, 「개화 운동과 갑신정변」 (삼성문화재단, 1977). 이광린, 「개화당 연구」 (일조각, 1973). 민태원,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문화협회, 1947).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6). 채만식, 「채만식 전집 08 (近日 외)」 (창작과비평사, 1989).
4)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에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와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 조정 대신들의 회의제 국정운영 등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국가재정를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고,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하면서 세제 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당시 반(反) 봉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인 민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져왔다. 김옥균의 「갑신일록」 참조.
5)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269.
6)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제1장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갑신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하였다.
7)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1-253.
8)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 출판부, 2003).
9)  금장태, “한국 실학사상 연구,” 「宗敎硏究」 Vol. 3 (1987); 282-286. 금장태, 고광직, 「儒學近百年: 개화사상 과 근대 개혁 사상」 (한국학술정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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