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 목사 / 예장통합 분당 아름다운교회 원로

미국에 갈 때 대사관에서 비자를 거부당했던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1970년 후반이었는데 신학공부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거절이었다. 당시는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대사관 앞에서 한 두 시간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가끔 여행사 직원이 대신 서주기도 했는데 언제 앞으로 갈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핸드폰이 있지만 그때는 전화 없는 집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거절을 당하면 다음에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영원히 남게 되니 정말로 운명의 인터뷰였다. 한 번 거절을 당한 나로서는 다음 해 5월 17일에는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반드시 돌아온다는 서약서를 냈다. 영사가 믿을 리도 없었지만 신기하게 비자가 나왔다. 바로 5월 17일까지 9개월짜리 비자를 준 것이다.

1978년 나이 31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다음날 대사관에 가서 서류를 들고 줄을 섰다. 일단 돌아왔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이번에는 긴 질문이 없이 그냥 물어본다. “공부를 마치려면 몇 년이나 필요한가요?” 적어도 5년은 있어야 한다니까 바로 5년짜리 왕복 비자를 찍어주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정말로 특별한 대접이었다. 5년 동안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다. 주위에서 모두들 복 받았다고 부러워들 한다. 물론 돈이 없으니 그림의 떡일 뿐이다. 비행기 값도 대단했으니까.

돌아가서 텍사스의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뉴저지로 갔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아는 이도 없고 돈도 없었다.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뿐이다. 천 명 넘는 학생들이 식사를 하니까 알바들이 많이 필요했다. 식판에는 큰 접시 2개 작은 접시 2개 국그릇과 포크, 수저, 나이프가 실려 들어온다. 그러면 몇 명이 서서 남은 음식을 털고 돌아서서 기계에다 그릇들을 꽂아야 한다. 기계는 그릇을 씻고 말리면 뽑아서 다시 내 보내야 한다. 접시 닦기라면 대단히 낭만적으로 기대했었는데 그런 중노동이 없었다. 두 시간 그러고 나면 기숙사로 와서 두 시간은 자야만 했다. 그런데도 받는 돈은 최저임금이었다. 그리고 항상 온 몸에서 음식 찌꺼기 냄새가 났다.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누가 가게 보는 알바를 하자고 한다. 한국 사람이 하는 가발가게인데 학교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뉴아크시였다. 뉴욕시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흑인지역이다. 저녁때까지 종일 서 있다가 30불을 받는다. 접시 닦기 보다는 많이 받기에 일 주일에 이틀을 갔다. 그러니 공부시간이 모자라 정말로 바빴다. 성경 말씀대로 “품꾼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그대로였다. 한 마디로 너무 바쁘고 피곤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이때 하나님께 불평도 꽤 했던 것 같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지원도 많이 받고 교회도 잘 만나고 나는 부모도 돈이 없고 배경도 없고 아는 이도 없으니 길이 없었다. 그 흔한 햄버거 하나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늘 일하러 다녀야 했으니 학생인지 일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루 밤에 영어로 된 대학원 책들을 적어도 20권은 다루어야 다음날 세미나에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극단적인 싸움이었다. 공부할 시간은 짧았다. 그러므로 낭비할 수가 없다. 바로 집중이 안 되면 그걸로 끝이다. 이러다 보니 정말 집중하는 훈련이 저절로 된다. 아무리 피곤해도 읽을 건 읽고 메모할 건 한 뒤에야 잘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해를 보내야 했다. Ph.D과정을 통신으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적어도 제대로 된 학교에서는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짧아도 2년은 학교 캠퍼스에서 살면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 각종 언어 시험을 통과하고 종합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학교 밖에서도 공부할 수 있다. 그 어려운 과정을 무슨 수로 통신으로 한단 말인가! 모두가 거짓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평도 많이 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내고 통과한다면 해당되는 실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너무 바삐 움직이다 보니 시간 사용하는 훈련을 한 셈이다. 그러니까 다른 시간과 돈이 많은 학생들보다 훨씬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라. 하루 종일 시간이 있고 재정적으로 풍성하다면 공부가 집중이 되겠는가를. 자꾸 늘어지는 게 습관이 된다. 그러다보면 4년 박사과정을 10년 이상 걸리게 된다. 빨리 졸업한 뒤에 한국에 와서도 시간 사용하는 훈련은 그대로 삶에 유익이 되었다. 교수 일을 보면서 책도 여러 권 쓰고 교회일도 하고 방송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느냐고? 훈련이다. 힘들고 바쁠수록 감사하라. 특별 훈련을 받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