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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원리와 과제
2013년 10월 06일 (일) 23:35:56 김성수 총장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개혁신학회(회장 김길성 교수)가 지난 10월 5일 성남시 분당구 소재 한울교회에서 ‘2013년 가을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개혁주의 신앙과 교육”이라는 주제로 논문 12편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이날 주제발표를 하신 고신대 김성수 총장의 논문임을 알려드립니다.<편집자주>

김성수 총장 / 고신대학교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창조 세계의 교육적 현상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과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 교육자는 교육자됨의 자기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기도, 전도, 교회 봉사, 구제 등과 같은 소위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복음은 협의적 의미의 종교적 행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한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육 현상의 탐구와 실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그리스도인 교육자는 교육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Kingship)을 인정하며 높이는 삶을 증시해(demonstrate) 보여주려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교육의 원리와 과제를 고찰해 보는 일은 그리스도인 교육자의 이러한 소망을 성취하는데 유용한 도움을 준다.

1.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규명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1)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개혁주의의 광의적인 의미는 사제주의(司祭主義)에 반항한 역사적 종교개혁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에 일어났던 루터(M. Luther)와 칼빈(J. Calvin)의 종교개혁 운동은 사제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소명(Berufen)의 개념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로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제라는 소위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하였다. 이때까지 사제란 금욕생활을 하는 자들이고,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세 가지 점들이 나름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1) 개혁주의의 특징은 16세기의 이러한 역사적 종교개혁운동의 전통에서 조망해 볼 수 있다.2)

2) 개혁주의 즉 칼빈주의
그러나 개혁주의의 협의적 의미는 칼빈의 신학과 사상의 발전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제주의에 반항한 모든 종교개혁운동을 개혁주의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제주의에 반항한 종교개혁운동의 모든 유형들이 계시관이나 세상관, 또는 교회관에서 관점을 같이한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는 르네상스 정신에 충실하여 중세교회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고, 영감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사제주의에 반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재세례파(Anabaptist)들도 루터와 유사한 계시관에서 출발하면서도 세속에 대한 견해와 교회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는 루터와 입장을 달리하였다. 3)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이 모두 개혁주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협의적 의미의 개혁주의는 칼빈의 가르침에 많이 의존하고 그 전통을 따르는 칼빈주의(Calvinism)라고 할 수 있다.4)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주의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며,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또한 성경계시, 창조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covenant),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순종과 책임, 하나님의 법(law)에 대한 인간의 반응,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개혁주의 사상은 창조, 타락, 구속의 우주적이며 보편적, 전체적 의미와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을 강조하며, 성별보다는 성화, 그리고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Grace restores nature)는 사상을 핵심적으로 강조한다.

2.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의미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배경으로 볼 때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모든 교육활동은 그것이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교육이던 비기독교적 교육이던지 간에 본질상 종교적(religious)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육은 본질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유목적적인 인간형성 활동이다. 기독교교육이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이지만, 인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법(law)에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순종적인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형성 활동은 협의적 의미의 기독교적 내용만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모든 법칙과 현상에 관련된 다양한 교육내용을 매개체로 하여 가정, 교회, 학교, 사회 등 다양한 교육의 장(field)에서 일어난다. 혹자는 기독교교육을 교회교육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교육을 좁은 의미의 기독교적 신앙을 가르치는 정도로 생각해 버리는 협의적 사고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교육이란 일반교육에 기독교적 요소를 단순히 가미하는 정도의 교육도 아니다.5) 어떤 프로그램이나 내용을 첨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육을 기독교적인 교육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교육의 장에 관계되어지는 모든 요소들과 행위들이 성경적인 종교적 동인(religious ground motive)과6) 성경적인 세계관(worldview)을 바탕으로 조직되고 추진되며 실행될 때 우리는 그 교육을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교육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교육의 주체와 대상에 대한 관점, 교육의 기초와 내용, 그리고 교육방법, 행정과 평가 등 교육의 모든 요소들이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동기 지워지고 실천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교육을 기독교적 교육이라고 평가할 수가 없다. 모든 교육은 그것이 진정으로 참되고(genuine) 올바른(true) 기독교적 교육이 되기 위해서 교육내용 뿐만 아니라 교육의 장면을 구성하는 전체 요소들이 성경적인 세계관의 토대 위에서 구성되고 진행되어 나가야 한다.

3.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기초

1) 하나님의 말씀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칼빈(Calvin)이 말한 바와 같이 성경은 마치 안경(spectacles)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성경은 교육의 제반 이론적 활동과 실제에서 우리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여 바르게 초점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2) 성경적 인간관
교육은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형성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교육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교육관은 근본적으로 인간관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기초하여야 한다. 성경적 인간관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형상
성경적 인간관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창 1:27, 9:6, 약 3:9).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bearer)이라는 것은 인간이 책임적, 반응적, 응답적 존재(responsible being)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며 응답적인 존재이다. 동물은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적이며 응답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삶의 모든 영역과 순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질서(법)에 대한 반응적 존재로 특징 지워져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문화적 사명과 청지기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bearer)이라는 것은 또한 인간이 본질상 관계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항상 자신과 동료인간, 환경,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적이며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은 인간의 모든 관계를 올바로 회복시킨다. 구속은 파괴된 인간관계를 재창조하고 용이하게 한다.

기독교교육자는 피교육자의 본질을 항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죄성은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창조질서에 대한 반응적 삶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과 그의 창조질서를 향한 온전한 반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인간을 창조-타락-구속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성경적 인간관은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특별한 함의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야 한다. 교육자가 교육의 장에서 피교육자를 존중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보주의 교육이론 때문이 아니라, 이들 피교육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마 18:1~14).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결코 상품화되거나 행동주의 이론이 강조하는 것과 같은 조작(manipulation)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성경적 인간관은 특별히 교육의 제반 이론들을 평가하고 수용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첫째,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으로 선하며, 따라서 사고와 감정,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 본질상 스스로 선함과 건전성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관점에 기초해 있는 교육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인간중심 교육이론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성취할 수 있으며, 자기의 생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개혁주의 교육관은 이러한 인간주의 교육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둘째,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본질상 결정론적이거나 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교육이론 역시 수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 타락의 본성을 심각하게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단순히 동물처럼 반응하는 존재로 묘사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행동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적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육관은 인간성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부정적이며 결정론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프로이드 학파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셋째,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의 자율성을 조장하는 모든 관점을 거부한다.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삶의 주인이라는 신념을 거부하며, 인간은 홀로 우주에 있으며 자신에게 홀로 응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인간 자율성에 근거하고 있는 실존주의 교육이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계획하고 창조하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이 자기의 인생을 만들며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관점을 주창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육관은 이와 같은 실존주의적 교육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성경적 인간관이 인본주의적 교육이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이러한 이론들을 완전히 무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들 이론들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기독교교육자들은 일반교육의 이론과 실제로부터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으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들 이론들이 복합적인 인간존재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이해하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인간관이 낙관주의적 인간관이나 결정론적 인간관을 거부한다는 것은 교육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인간의 문제와 인간존재의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특성을 간과하고, 하나의 문제나 특성을 절대화하거나 축소시키는 환원주의적(reductionism) 경향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② 종교적 존재
인간은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개인적인 취미와 같은 사적(private)인 문제로 생각한다. 사적인 종교는 또한 “종교의 자유”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를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으로 소유하는 한 그것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7)

그러나 종교는 결코 사적인 것이거나 인간 삶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인간 삶 자체가 종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종교적 존재라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란 인간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개별적 삶과 공동체적 삶은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삶 전체가 종교적이라는 의미는 곧 인간의 생활은 그 모든 활동 영역에서 섬김과 경배의 생활이라는 의미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잠을 자든지 생각을 하든지, 기도하든지 시장에 가든지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종교 생활의 한 부분이고 성격상 종교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총제적 자아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봉사하든지 아니면 우상에 대한 경배로 봉사한다. 소위 말하는 중립적 영역은 인간 생활에서 결코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현상 역시 본질상 결코 중립적일 수가 없다.

하웃즈바르트는 “과잉 발전한 서구를 위한 도움”(Aid for the Overdeveloped West)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성경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8) 이 기준은,

첫째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신(들)을 섬긴다는 것이고,
둘째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믿는 신의 형상을 따라 변화된다는 것이며,
셋째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믿는 신의 형상을 따라 사회구조를 창조하고 문화를 형성한다는 기준이다.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종사하는 교사나 피교육자, 교육의 모든 프로그램과 방법, 그리고 교육의 결과도 궁극적으로는 이와 같은 기준을 따라서 그 본질과 모양이 형성되고 채색되어질 수밖에 없다.

③ 전인적 존재
인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항상 총체적 관점이며 전인적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때로는 마치 이분법적 인간관이나 삼분법적 인간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성경은 항상전인적 인간관을 견지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음으로서 인간”(man as heart)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 존재의 가장 심오한 핵심(the deepest core)이며, 종교적 삶의 좌소(the seat of his religious life)로서 전인(the whole of man)을 지칭한다. 또한 “영으로서 인간”(man as spirit)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아니면 우상의 인도 하에서 인간 존재를 동기지우며 인도하는 능력을 지칭하면서 “인간 내부에서 밖으로”(from the inside out) 바라본 전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때로 인간의 몸에 초점을 맞추면서 “몸으로서 인간”(man as body)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가시적인 현현이며 기능으로서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바라본 전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으로서 인간”(man as soul)도 인간의 한 구성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호흡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전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영혼이나 영은 인간 안에 있는(in man) 어떤 것, 또는 인간에게 속해있는(of man)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이 영혼이며, 인간 자신이 영이다( man is soul and is spirit.).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인을 이야기하고 있지 인간의 어떤 구성 요소나 “부분들”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다.9) 성경적 인간관은 단일론적 또는 이원론적 인간관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간관을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교육은 그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이와 같은 성경적인 전인적 인간관을 기초로 해야 한다.10)

④ 다차원적 존재
전인적 인간관은 인간이 다양한 측면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화학적, 물질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고, 역사를 만들며, 사고하고, 말하고, 사회적으로 교통하고, 교역을 하고, 예술을 창조하고, 공의와 신앙을 유지하며, 신앙을 실천할 줄 아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를 적어도 다음과 같은 15개의 국면(facets), 양상(aspects), 또는 기능(function)으로 구분할 수 있다.11)

   

이들 여러 다양한 국면들 사이의 구별은 물질, 식물, 동물, 인간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물질: 단지 처음 4가지 양상(수적 측면에서 물리적 측면)만을 보여준다.
㉡ 식물: 살아있는 존재 (생물학적 기능을 추가한다).
㉢ 동물: 더 복잡한 피조물이다. 이들은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감각적 측면이 추가된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도 분명히 가장 복잡한 피조물이다. 이미 살펴본 여러 가지 측면들에 추가하여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갖고 있지 못하는 9가지의 특징을 더 드러내 보여준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역사를 만들고, 말하고,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가지며, 예술을 창조하고, 법을 만들며,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참된 하나님이 아니면 거짓 신(들)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에서는 이상의 15가지의 기능들 중 단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만 인간을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어 왔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 도덕적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 아니면 조금 더 광범위하게 이성적-도덕적 존재로 불리워져 왔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단순화 또는 환원주의적 이해 방식이다. 이러한 이해는 단지 일차원적 또는 이차원적 인간관에 불과하다. 계몽주의 교육관과 행동주의 교육관은 모두 환원주의적 인간관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being)이다.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반드시 이와 같은 환원주의적 인간관을 거절하고 다차원적 인간이해에 기초하고 있어야만 한다.

3) 실재관
기독교교육은 또한 성경적 실재관에 기초하여야 한다. 우주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실재의 법칙성과 변화성 등에 관한 다양한 관점은 교육의 형태와 체계를 다르게 이끌어 간다. 성경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천지창조, 창조세계의 법칙성과 다양성, 그리고 창조세계의 통일성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교육은 특별히 창조세계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없이 다양한 측면에서 창조세계를 접하고 그 표지들을 잡아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인간 존재가 다차원적 특성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창조 실재 역시 다차원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의 물리적, 화학적 측면은 사실상 창조실재의 다양한 측면들 가운데 단 한 두 가지의 측면일 뿐이다.

밝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굴절되면 아름다운 색깔의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빛줄기로 생각해 볼 때 그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창조실재를 다양한 측면(양상)으로 배열해 준다. 실재에 대한 비기독교적 관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하는 실재의 한 측면만을 선택하여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게 하는 환원주의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진보주의, 항존주의, 행동주의, 실존주의, 심리주의, 경제주의, 역사주의, 과학주의, 물질주의 등과 같은 각각의 ‘주의’(-ism)들과 교육사조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경향성을 반영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와 절대주의는 창조세계 전부를 담기에는 부족한 그릇이다. 피조물 중 어느 하나가 우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 중 그 어느 한 측면이라도 절대화시키게 되면 그것 자체가 바로 우상이 될 수 있다.

4) 지식관
지식에 대한 관점은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교육의 많은 기능 가운데 한 기능인 보수적 기능은 가치 있고 타당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승해 주는 일이며, 그러한 지식을 계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일이다. 따라서 만약 지식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지 못하면 우리의 교육실제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1900년대까지 지배적인 지식관은 지식은 그 자체가 사실, 기술, 개념, 이론의 객관적인 총체라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지식을 더 많이 획득하면 할수록 삶을 더 잘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식 자체가 힘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지식은 주관적인 성격의 신앙과는 분리되는 것이었다.12)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지식이 중립적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지식은 질서와 의미, 인간의 본질, 목적, 과업, 그리고 구원의 필요성 등에 대한 일련의 신념의 틀(framework)안에서 획득되고 축적되며 전수되어 간다. 지식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수동적 수납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한 전제를 따라 실재를 능동적으로 형성하고 해석해 가는 것이다.13)

신앙은 그 자체가 지식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의 기초이다. 모든 지식은 참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거나 아니면 인간 자율성이나 과학기술과 같은 우상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14) 교육이란 아동을 이와 같은 지식을 갖도록 인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결코 중립적, 탈가치적(value-free)인 행위일 수 없다.

4.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원리와 특성

1)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육
개혁주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도교회의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이런 입장은 하나님을 모든 삶과 학문의 주권자로서 보는 기독교교육의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로 통하여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고 있다(롬 11:36).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은 만물의 주권자다. 주님은 교회의 주권자이실 뿐만 아니라 교육의 영역에서도 홀로 주권자 되신 분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present reality)를 고백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미래적이며, 구속받은 백성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준비하는 교육보다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또는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교육의 오류에 빠져들 위험성이 크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실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나라를 완전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때에 완전한 형태로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했다.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 그의 대적들에 대해서 승리하시고 일어나셨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보편적 능력과 권위를 가지시고 통치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구속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full-time)의 왕국 봉사를 하도록 요청하신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에서 제외되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This is mine)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혁주의 원리는 교회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교육, 학교교육, 그리고 사회교육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권 하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독교학교교육과 기독교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는 아동 및 청소년들을 가정, 학교, 교회, 국가, 대학, 직장, 농장, 상업, 정치, 과학, 예술, 의학, 연극 영화, 음악, 저널리즘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의 왕국 봉사자들로 준비시켜야 한다.

2) 창조-타락-구속의 우주적 이해
개혁주의 교육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포괄적이며 보편적,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실제로 창조의 성경적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의 의미 역시 단순히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였다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의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대로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통치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혹성들을 그 궤도에 두시고 계절들이 제 시간에 오가게 하시며, 씨가 자라고 동물들이 번식하게 하신다. 그러나 도구를 만들고 정의를 실행하며 예술품을 만들고 학문을 추구하는 일은 인류에게 맡기신다. 하나님의 법 지배는 비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직접적이고,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매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물체와 동식물 영역이 자연의 법과 문화와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법 곧 규범(norm)을 통해서 우주를 통치하신다.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하는 교육의 한 기본 원리는 한편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 신비로움, 곧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질서에 순응하고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갈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교육도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되 단순히 분리된 조각으로서의 산발적 지식을 가르치거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답들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창조 세계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주는 성경의 역할, 비유컨대 ‘광부의 전등’과 같은 성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인간 타락의 영향이 철저하며 창조 세계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죄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도 아니며, 창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개혁주의 교육은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의 의미를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창조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개혁주의 교육의 이와 같은 특성은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흔히들 우리는 ‘세상’을 단순히 속된 것, 허무한 것, 육적인 삶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이란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지 예술, 정치, 학문, 언론, 사업, 교육등과 같은 창조 질서의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도록 인도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이와 같은 교육적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인간의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우주적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은 죄와 구속의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왕권)을 인정하고 높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가는 인재양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육은 통합(integration)의 차원 보다도 통전적(integral) 차원의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

3) 성별(consecration)보다는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교육
성화 즉 ‘거룩케 함’은 “죄로부터 해방시킴, 윤리적 부패로부터 깨끗게 함, 정하게 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성별은 일반적으로 단지 “하나님을 섬기거나 예배하기 위해 구별함, 헌납함, 헌신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별은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고 성화는 내적인 갱신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내적인 의미의 재생으로서의 성화를 강조한다. 월터스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성화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승리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정화시키는 행위, 거룩케 함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내적으로 갱신하고 재생하는 과정이지 제도적인 교회와 교회의 예배 의식에 외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영’께서는 우리의 피조된 삶에 침투하셔서 가정, 사업, 예술, 정부 등의 내적인 작동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거룩한 생활의 의미를 삶의 어떤 특정한 영역에만 제한시키지 아니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성화와 성령의 사역을 신성하고 거룩한 영역에만 제한시키고 나머지 삶에는 오직 성별만을 강조하는 관점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사적인 삶이든 공적인 삶이든, 개인적인 삶이든 문화적인 삶이든, 모든 삶이 원칙적으로 성화될 수 있으며 내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 개혁주의 교육은 단지 예배 행위의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단면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내적 갱신 과정으로서의 성화를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힘이 누룩과 같이 부풀게 하는 영향을 나타낼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을 강조한다. 요컨대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은 단순히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는 성별보다는 내적인 갱신으로서의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전인적 교육(wholistic education)을 강조한다.

4) 언약 사상과 신자 부모의 교육적 권리와 책임
개혁주의 세계관은 신자 부모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언약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의 자녀들은 언약의 백성들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들에게…세우리니” 라고 하셨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라고 하는 언약의 약속(covenant promises)을 들어야 한다.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은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혼신으로 사랑하고, 자신들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언약적의무(covenant obligations)에 관해서 배울 것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개혁주의 교육은 자녀 교육의 일차적인 권리와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성경적 관점을 강조한다. 부모들의 세계관을 따라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는 권한과 책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모에게 위임된 것이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인도하라는 명령은 처음부터 교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모들에게 주어졌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려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진리가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잊혀 지지 않도록 모든 장소와 효과적인 모든 방법으로 그들에게 열심을 다해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개혁주의 신자 부모들은 이와 같은 교육적 권리와 책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자녀들이 유아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 앞과 온 회중 앞에서 부모로서 하는 서약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릴 때 가정에서 자녀에 대한 교육, 특별히 신앙 교육을 소홀히 생각하지 아니한다. 식탁에서 아버지가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든지,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앞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해 주는 일 등은 교육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아름다운 노력들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학교나 교회에 전담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의 학교교육이나 교회교육의 형태도 문화가 발달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달하고 정착되어 온 것이지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와 구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상 학교라는 제도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 주고 정신적, 종교적 교육 활동을 담당했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모들이었다. 가정에서 또는 비교적 생활 방식이 단순했던 사회구조 속에서 미성년자들은 성인들의 자기 보호적 활동들을 보면서 참여와 모방의 형태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가 점진적으로 발달하고 인간 사회의 복잡성이 증대됨에 따라 부모들로서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부모들은 새로운 요구를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교사와 교육 구조를 모색하게 되고 여기에 자기들이 갖고 있는 교육적 책임과 권한의 일부를 위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오늘날과 같은 학교 제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개혁주의 교육 원리는 교사와 학교가 결코 부모와 가정의 대리 역할을 할 수가 없으며, 교사와 학교는 어디까지나 부모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교육의 책임을 수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육의 한 특성은 교사는 결코 부모의 대리인이 아니며 학교는 가정의 단순한 연장이나 대리 기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가 감당할 수 없는 교육의 일부 영역을 교회나 학교라는 기관에 위임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책임을 다하였다거나 면제받았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자녀에 대한 교육적 권리와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게 되어있는 숭고한 사명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독교학교교육과 기독교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 또 다른 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5) ‘마음’(heart)을 구비시키는 교육
개혁주의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의 ‘마음’(heart)을 구비시키는 일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마음’은 신체적, 물리적 차원의 심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핵심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모든 사상의 원천이며 활동과 생활의 근원이다. 마음은 또한 지혜와 감정적 생활의 배경이 된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 악하고 추한 것 등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마음은 우리가 무엇을 섬기느냐는 것을 결정해 주는 ‘종교’가 위치하는 자리 곧 종교의 좌소다. 타락한 이후 인간의 마음은 그 종교적 방향에 있어서 참되신 하나님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인간은 본질상 종교적 존재(religious being)다. 인간이 종교적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의 삶이 본질상 배후에 추진력(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방향이 있고 섬기는 경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불순종으로 나타나든지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 형태로 행사된다. 인간은 자신의 총체적 자아를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봉사하든지 아니면 우상에 대한 경배로 봉사한다는 점에서 중립적 영역은 인간 생활에서 결코 존재하지 아니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나 기술의 전수 활동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과 기술을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전수시켜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의 방향이 잘못 구비되어 있으면 그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오히려 더 교묘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인간이 되게 할 수도 있으며, 이웃을 위해 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개혁주의 교육이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주지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이들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고 그들의 마음이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구비되어 모든 생각과 행하는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높이는 “지식과 능력을 겸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6) ‘펼쳐 보임’(unfolding)과 ‘능력부여’(enabling)
인간은 출생시에 많은 가능성(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교사가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펼쳐주어야 할 아동의 잠재적 가능성은 운동이나 예술적인 방면의 능력, 수학이나 논리적인 능력,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방면에서 개발될 수 있는 능력, 윤리적이며 신앙적인 영역에서 개발될 수 있는 제반 가능성 등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교육한다는 것은 아동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들을 개발하고 실현시켜 주는 활동을 의미한다.

교육은 또한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함, 인간의 죄로 인한 왜곡,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소망의 비전을 펼쳐 보여 주어야 한다.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은 인지적 교육에 그치지 않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인도해 주는 일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육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반응적인 존재로 형성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개혁주의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이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창조 세계의 왜곡을 경험할 때 거룩한 분노를 느끼며, 창조 세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려고 노력한다.

‘펼쳐 보임’과 ‘능력 부여’의 과정은 피교육자의 신앙적 기능(pistical aspect)이 어떻게 열려지느냐에 따라서 아주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다. 피교육자의 ‘마음’이 교육을 통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하나님에게로 열려져 있으면 그의 다른 모든 기능과 재능들, 관점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지게 된다. 신앙적 기능(faith function)은 비유컨데 ‘하늘로 향하는 창문’(window towards heaven)과도 같다.

개혁주의 교육은 피교육자의 신앙적 기능을 올바로 펼쳐서 그의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열어주는 과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인간 형성을 지향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회적인 제 규범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 그리고 언어를 책임성 있게 사용하려고도 노력하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방향으로 문화를 형성하며 명료한 사고 활동과 감정적 삶을 풍요롭게 영위하되 순종적인 방향으로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인간 형성을 지향한다.

펼쳐 보임과 능력 부여의 활동이 임의적으로나 우연히 일어나도록 버려 둘 수는 없다. 이 과정은 아주 주의 깊게 계획되고 아주 잘 훈련된 교사들이 직분 의식을 가지고 아주 신중하게 감당해야 하는 과업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러한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자 부모들은 학교와 교회의 전문 교사들에게 이러한 과업의 수행을 위한 권리와 책임의 일부를 위임해 준다. 그러나 많은 교사들이 이처럼 중요한 과정을 너무도 단순하게 생각해 버리고 교실에서의 일상적인 단조로운 학습 활동으로 생각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교육자 편의 이와 같은 부주의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신앙적 기능이 충분히 펼쳐지지 못하고 교육의 장을 떠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7)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 교육의 강조
개혁주의 교회의 생명은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이나 나의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지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바를 그대로 고백하고 전승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 구성원들의 감정적 연대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중심으로 연합되는 내적 결속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피교육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그분이 어떠한 분이시며, 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 그분이 누구신가를 계시의 말씀에 근거해서 가르치는 교리교육을 강조한다.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올바로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 “바라보는 사람들”(spectators)이다. 저기에 “바라볼 광경”(spectacle)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안경”(spectacles)인 성경이 있다.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은 바라보는 사람들인 우리의 아동들에게 말씀의 안경을 맞추어 주어서 그들이 바라볼 광경 곧 하나님의 세계를 보다 올바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적 중심성(centrality)이라는 개혁주의 원리는 개혁주의 교육의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핵심적인 열쇠와도 같다.

5.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과제

이상에서 고찰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몇 가지 원리와 특성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미래를 가늠해 볼 때,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한 미래 사회에서도 비교적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그 가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해 볼 수 있다.

1)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개혁주의 세계관(성경적 세계관)이 교육의 제반 요소와 과정에 어떠한 함의점(implications)을 갖고 있는가를 부단히 추구하면서 그 사고의 결과들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2)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개혁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기독교철학의 도구(tool)를 정교화 하는 작업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세계관이 기초가 되고 특색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세계관은 보다 더 심오한 이론적인 차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교한 도구는 아니다. 세계관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 관점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 포괄적인 어떤 관점을 제공해 줄 수는 있어도 교육의 현상을 체계적이며 이론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정교한 도구는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개발된 기독교철학의 도구 중에서 우리가 기독교교육의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아마도 도예벨트(Herman Dooyeweerd)와 같은 개혁주의 기독교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우주법철학(Cosmonomic Idea)이라는 도구이다. 이 이론적 도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다양성과 통일성, 법칙성, 그리고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법령(규범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15) 특별히 창조실재를 설명하는 양상이론(Modality Theory)은 교육목표의 구체적 설정과 교육과정의 계획과 조직의 과정에서 아주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3)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세계관과 기독교철학의 도구를 통하여 일반교육의 이론들을 비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체계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어떤 특정의 교육이론과 실제가 인간(학습자)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맥락 안에서 형성적인 영향력(formative influence)을 행사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관점은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평가하는 아주 중요한 준거가 된다. 둘째로, 어떤 특정의 교육이론이 교육의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환원주의적인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지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교육이론은 교육의 문제를 특정의 영역 또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면서 교육현상의 복잡성을 특정의 영역과 방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셋째로, 어떤 특정의 교육이론과 실제가 인간삶의 규범성(normativity)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규범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자율성만을 주창하는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로, 교육의 과정에서 학습자의 책무성을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인정하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로, 어떤 특정의 교육이론과 실제(방법)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약점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서 평가해보아야 한다.

4)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교육과정(curriculum)의 개발과 기독교적 교육방법, 그리고 기독교적인 평가방법의 개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의 기독교교육연구는 그 기초가 되는 기독교세계관과 기독교적 관점(Christian perspective), 그리고 기독교철학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독특한 관점의 조명하에서 성경적 인간관, 성경적 지식관, 학교의 본질과 과업 등에 대한 이론적이며 역사적인 탐구는 물론, 기독교적 교육과정의 개발과 교수-학습방법 및 평가방법 등의 개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예컨데, CSI(Christian School International)의 연구활동과 결과들을 살펴보면 기독교학교의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Redemptive-Historical Perspective)에서 학습할 수 있는 성경교재의 개발은 물론 국어, 사회, 과학, 역사, 음악 등 거의 전 교과영역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수교육, 도덕교육에 대한 성경적 조망, 그리고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교수방법 및 평가방법에 대한 연구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5)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오늘날 공교육의 독점(public school monopoly) 문제를 직시하면서, 기독교학교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기독교학교의 설립운동을 이론적이며 실제적인 차원에서 인도하고 후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부모의 교육적 책임과 권리를 일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권리와 책임은 일시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다. 국가는 단지 특수한 상황에서만 교육에 간여하고 간섭하여야 한다. 교육이란 결코 중립적이거나 탈가치적인 행위일 수 없기 때문에 기독신자부모는 학교교육의 종교적 방향이 신자부모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해야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6)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기독교가정교육과 사회교육, 특별히 교회교육의 재정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가정교육에 대한 많은 논의는 가정의 본질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성경의 조망하에서 가정의 본질을 규명하고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며, 나아가 사회교육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대안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교육의 영역에서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을 교회교육의 교육과정(curriculum)에 독특하게 반영하는 작업은 기독교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7)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공의(justice)와 샬롬(shalom)을 위한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지금까지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과 ‘하나님의 법’(God’s law)에 대한 순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관심인 살롬을 위한 교육에는 소홀하였다. 문화 변역에 대해서는 많은 가르침을 베풀면서도 인간이 겪고 있는 억압(oppression)과 박탈(deprivation)과 고통(suffering)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월터스톨프의 지적과 같이 개혁주의 교육은 인간 존재의 슬픔과 눈물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했으며, 애통(lament)의 성경적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개혁주의 교육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구비시켜주는 것을 특성으로 삼는다면 그 교육은 결코 공의와 샬롬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6. 맺는 말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일반교육에 기독교적 내용을 단순히 추가하는 교육이 아니다. 기독교적 첨가물이 교육을 기독교적인 교육으로 만들어주는 보장책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세속주의의 영향은 ‘여우의 전략’을 사용하여 현대교육의 장에 스며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육의 이론은 물론, 교육의 전체 과정(process)을 통하여 개혁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내적 변혁(inner transformation)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교육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이 본질상 종교적이며 예배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교육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인 이해를 배경으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철학의 정교한 도구를 가지고 교육의 제 이론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개인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동일한 소망과 세계관, 그리고 동일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이 이러한 과제를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 그 미래는 비교적 밝은 것으로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발표자께서 참고문헌을 제출해주셨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하였습니다.)

[미주]
1) 이보민,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기독교교육연구시리즈 7), 고신대학교부설 기독교교육연구소, 1988, p. 2.
2) 이상규,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2010, pp.12~13.
3) 이보민, Ibid., pp.3~4.
4) 이상규, Ibid., p.17.
5) John Van Dyk, The Craft of Christian Teaching: A Classroom Journey, Sioux Center, IA: Dordt Press, 2000.

6) 종교적 동인은 인간 사회의 절대적인 중심적 동기로서 활동하는 영적인 힘이다. 이 근본 동인은 삶의 종교적 중심으로부터 삶의 모든 시간내적 표현들을 지배하며, 이것들을 존재의 참된 근원 또는 존재의 가정된 근원(supposed origin)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이 근본동인은 특정 시대의 문화, 과학, 사회구조에 지울 수 없는 특징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체 세계관을 심오하게 결정한다. 그런데 종교적 동인에는 어떤 영(spirit)이 작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거나 아니면 우상의 영이다. 인간은 자기존재의 근원과 확고부동한 근거를 위해 영에 의지하며, 자신을 이 영의 봉사에 바친다. 인간이 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인간을 통제한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봉사자로서 대면한다.

7) Gordon J. Spykman, Christian Faith in Focus, Ontario, Canada: Paideia Press, 1992, pp. 9~10.
8) Goudzwaard, B., Aid for the Overdeveloped West, Ontario, Canada: Wedge Publishing Foundation, pp. 14~15.
9) Van der Walt, B.J., Being Human in a Christian Perspective,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ersity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1977. p.11.
10) Ibid., p. 16.
11) Spier, J.M.,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Philosophy, Nutley, New Jersey: Craig Press, 1976, p.43. cf. Van der Walt, B.J., Ibid., p. 18.

12) Harro Van Brummelen, Steppingstones to Curriculum: A Biblical Path, Seattle, Washington: Alta Vista College Press, 1994, p. 88.
13) Doug Blomberg, "If life is religion, can school be neutral?" Journal of Christian Education Papers 67, July 1980. pp.5~11.
14) Ibid., p.93.
15) Stuart Fowler, A Christian Voice Among Students And Scholars, Potchefstroom: IRS, 1991, pp.2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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